코로나19 사망자를 이송했던 운구차 기사 안상연씨가 지난달 25일 오후 사망자 이송 당시 착용했던 방역복을 입고 서울 구로구 고척동 자신의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운구차 앞에 서 있다. 코로나19 사망자는 비닐과 보디백 사용해 이중으로 감싸 화장장으로 이송했다. 안씨의 차 안에 소독제가 있어 사망자 이송 전후로 소독제를 뿌렸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코로나19 위기가 2년을 넘겼지만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이들은 매일 발표되는 사망자 숫자로만 남았습니다. 끝없는 위기 속에서 산 사람은 살아야 했기에 ‘애도의 자리’는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기억하고 이별을 아파하고 울음을 토해내는 ‘애도의 시간’은 제대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차마 떠나보내지 못한 슬픔은 집단적인 상처가 되었습니다.
<한겨레>는 창간 34돌을 맞아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2만4522명(26일 0시 기준)을 기억하고, 촛불을 드는 애도의 자리와 시간을 마련합니다. 이 애도 기획을 통해 늦었지만 코로나 희생을 드러내고 온라인 추모소 ‘애도’(www.hani.co.kr/interactive/mourning)를 열어 ‘사회적 장례’를 시작하려 합니다. 작별인사도 못하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 수많은 가족, 친구의 슬픔을 나누고 그들을 애달프게 지켜본 의료진, 돌봄노동자 등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이 슬픔을 함께 대면하고 기록해, 코로나로 빼앗긴 삶을 숫자로만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애도가 사라진’ 2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들은 슬픔에 앞서 자책에 시달렸다. 임종을 지키지 못해서, 손 한번 잡지 못하고 화장터 화로로 보내야 해서, 외국에 있어 장례조차 같이할 수 없어서…. ‘선화장, 후장례’라는 여섯 글자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데도 가슴을 치고 자신을 탓했다. 같은 공간에서, 들썩이는 유족의 어깨를 지켜보는 이들도 자책감에 휩싸인다. 코로나19는 수많은 죽음을 묵묵히 지켜보며 고인을 배웅하고, 남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온 이들마저 죄인으로 만든다.
“그동안 제가 모셨던 고인분들께 그저 죄송할 따름이에요. 제가 이송은 해드렸지만, 원래 장례식장에 도착해 입관하면서 목욕도 시켜드리고, 얼굴도 닦아드려야 하는데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요.”(안상연 운구차 기사)
“가족이 확진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비닐에 싸인 채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하는, 심지어 몇초밖에 허용되지 않는 그 순간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유가족에게 뜻깊은 이별의 자리를 만들어드리는 입장에서 이별할 기회조차 빼앗는 것 같아 너무 죄송하더라고요, 제가 죄송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양수진 장례지도사)
“유가족이 고인과 충분히 이별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아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사망자가 폭증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화장을 기계적으로 하게 되면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습니다.”(박준호 인천시립승화원 장사관리원)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9일까지 <한겨레>가 만난 장례지도사, 운구차량 기사, 승화원 장사관리원은 지난 2년 떠나보낸 이들과 덩그러니 남겨진 사람들을 떠올리며 “죄송할 따름”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적게는 8년부터 길게는 37년까지, 경험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켜온 이들의 마음은 같았다. 2020년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정부 지침인 ‘선화장, 후장례’가 지배한 시간은 그들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죽음을 맞이함. 또는 부모가 돌아가실 때 그 곁에 지키고 있음.’ 코로나19는 ‘임종’의 사전적 의미를 바꿔버렸다. 코로나19는 죽음을 맞을 여유를 앗아갔고, 죽음의 곁을 내주지 않고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방역을 이유로 상당수 코로나19 사망자는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임종을 맞이했다.
코로나19가 시작되고 사망자를 장례식장과 화장장으로 운구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승합차를 타고 달린 안상연(60)씨는 고인의 유가족을 화장장에 가서야 만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한창 코로나 감염자가 폭증하고, 사망자도 늘어날 때는 병상이 없어 감염자들이 병실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어요. 유가족은 고인이 돌아가신 후에야 연락을 받고, 화장장에서 관과 사망진단서 정도만 확인하는 일도 빈번했죠.” 그는 사망진단서를 받아든 유가족이 무너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고인의 마지막을 곁에서 함께한 유가족들도 자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2020년 2월부터 코로나19 사망자 수습 및 장례지도를 총괄해온 이상재(54) 사단법인 장례지도사협회 회장은 지난해 겨울 서울 서대문구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을 가득 채운 50대 아들의 통곡을 잊지 못한다. “요양원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해 서둘러 80대 어머니를 퇴원시켰는데, 이미 코로나19에 감염되셨던 거예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했던 아들이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가슴을 치더라고요. ‘감염돼도 좋으니 화장장으로 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 얼굴 한번 보게 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가 가진 여분의 방호복을 건네 입게 한 후 (주검이 있는) 보디백을 열어드렸어요. 코로나19로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이 겪는 이중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같아서 잊히지 않아요. ‘왜 내 가족일까’란 억울함과 ‘나 또한 죄인’이라는 감정이 그들을 옭아매는 것 같아요.”
코로나19 사망자 장례를 맡은 경험이 있는 장례지도사 양수진씨가 지난 9일 서울 동작구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나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다. 고병찬 기자
장례지도사들은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고개를 떨군다. 장례지도사는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남겨진 유가족에게 입관 의식을 통해 애도를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이들의 마음을 보일 기회를 앗아갔다. 8년째 장례지도사 일을 하고 있는 양수진(37)씨는 수많은 삶의 마지막을 지켜본 경험을 담은 에세이 <이 별에서의 이별>을 2018년에 출간한 작가이기도 하다. “장례지도사의 입장에서는 입관이라는 의식이 가장 크거든요. 저희도 애도의 마음을 보여드릴 수 있는 굉장히 큰 자리인데….”
장례지도사가 고인의 얼굴에 화장을 하고, 알코올로 손을 닦는 것은 세상을 떠나는 이들과 남겨진 이들 모두를 다독이는 무언의 메시지다. “(화장은) 가족분들이 봤을 때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가 그래도 ‘편안하게 가시는구나’라는 느낌을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손도 한번 잡아 보실 수 있다’는 의미로 손을 깨끗이 닦고요. 이런 의식을 코로나 환자분에게는 아예 할 수가 없는 거죠.”
고인을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공간마저 코로나19 사망자 유가족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보건당국은 방역을 위해 화장장 내 ‘거리두기’를 요구했고, 유가족은 멀찍이 떨어져 화로 속으로 들어가는 가족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인천시립승화원에서 화장을 진행하고 유골함을 내어주는 업무를 맡았던 박준호(39) 인천시립승화원 장사관리원은 지난해 일주일 사이에 코로나19로 부모님 두분을 모두 보낸 한 50대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그는 두손에 덩그러니 남겨진 유골함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비극 앞에서 눈물마저 마른 듯했다. 그는 넋이 나간 채 부모님의 유골을 모두 유택(무덤) 동산에 뿌렸다. “고열로 화장하고 나면 코로나19 감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분이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그렇게 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일주일 뒤 다시 승화원을 찾아 부모님을 납골당에 모시고 싶은데 어떻게 해줄 수 없냐고 여쭤보셨지만, 이미 뿌렸기 때문에 다른 유골과 섞인 상태라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안내하자 그제야 한참을 펑펑 우셨어요.”
코로나19 사망자 장례 절차를 도맡아 진행했던 이상재 사단법인 장례지도사협회 회장이 지난달 26일 서울 은평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코로나19 사망자의 입관을 위해 사용했던 보디백을 꺼내 설명하고 있다. 고병찬 기자
이상재 회장은 지난해 9월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한참을 울었다. 당시 서울시립승화원에 외국인 노동자 7명이 모였다. 베트남에서 떠나와 경기도 한 공장에서 일하던 20대 외국인 노동자가 코로나19로 세상을 뜨면서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이들이 모인 것이다. 작업복 조끼 차림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언어로 동료를 추모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이들의 통곡은 한참 동안 계속됐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들이 서로 껴안고 우는 모습만 봐도 슬픔이 그대로 전달됐어요. 이들의 장례를 도와주던 저를 포함한 장례지도사 4명 모두 같이 펑펑 울 수밖에 없었어요.”
가족이나 동료를 떠나보낸 이들이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이들도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이들 역시 한명의 생활인이고, 가족 구성원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안상연씨는 손녀에게 코로나19를 옮길까 봐 지난 2년 내내 불안했다. “처음 전화를 받고 코로나19 환자를 이송해야 한다고 했을 때 솔직히 겁이 났어요. 가뜩이나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방호복을 입어 땀이 나는데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알 수 없는 병이란 생각에 일하는 내내 긴장할 수밖에 없어 더 힘들었죠. 그렇게 방호복을 입었어도 일주일에 한번씩 18개월 된 손녀가 우리 집에 오는데, 혹시 아이에게 옮기지는 않을까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도 저와 같이 잠을 못 자겠다고 해 2년간은 거의 각방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한달 사망자만 8172명에 이르렀던 지난 3월은 이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당시 장례지도사, 화장장 직원 등은 “6·25 전쟁 이후 화장장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몰려드는 것은 처음”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했다고 한다. 이상재 회장은 지금도 전화벨 소리에 가끔 놀란다. “3년간 주말 없이 매일 쉴 새 없이 코로나19 사망자 장례를 맡아왔어요. 지금도 정오만 되면 전화가 울리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릴 지경입니다.”
인천시설공단 가족공원사업단 사업관리팀 소속 장사관리원 박준호씨. 인천가족공원사업관리팀 제공
화장장에서 일하던 이들에게 지난 2년은 ‘감염으로 이곳마저 뚫리면 수많은 사망자를 어떡해야 하나’ 하는 불안에서 헤어나올 수 없던 시간이었다. 박준호씨는 매일같이 밀려드는 사망자에 승화원도, 자신도 과부하가 걸렸던 순간들을 쉽게 지울 수 없다.
코로나19 사망자가 치솟을 때 ‘밤새 화장장을 돌리라’며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에 올라오던 서운한 감정을 꾹 누르고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당시 인천시립승화원은 몰려드는 사망자들을 받기 위해 새벽 6시부터 밤 10시30분까지 쉴 새 없이 화장장을 운영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이런 일은 다시 없어야 돼요. 화장장을 혐오시설이라고 멀리할 게 아니라 늘려야 해요.”
양수진씨는 2020년 8월 70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30대 남성의 표정을 가끔 상상해본다. “외국에 유학을 가 있는 바람에 아버지 임종 연락을 받고도 입국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들었어요. 어머니는 “아이고, 우리 둘째도 못 보고 가네”라고 혼잣말로 말씀하시더라고요. 사실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건 이별의 순간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 30대 남성분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시겠죠.”
정부는 지난 1월27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망자 장례 관리지침 제3판’을 내 ‘선화장, 후장례’ 지침을 폐기하고, 4월부터는 장례 절차 제한을 전면 폐지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며 일상 회복이 시작되고 장례 역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오늘도 어딘가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누군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언제쯤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날까.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 박지영 기자
jyp@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