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기록③
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 사고 현장 골목길에 설치된 경찰통제선 앞에 추모객들이 준비한 국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편집자: <한겨레>는 6일 이태원 참사 생존자인 ㄱ(32)씨가 당시 겪었던 상황과 이후 심리 상담 과정 등에 대해 들었다. ㄱ씨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연재한 상담기록과 일지 등을 당사자 동의를 받아 차례로 옮겨 싣는다. 사고 당일인 29일 밤 친구와 함께 이태원을 찾았다 인파에 휩쓸렸지만, 행인이 난간으로 끌어올려 가까스로 구출된 ㄱ씨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고위험 환자로 판정 받았다.
국화꽃 무료나눔에 용기를 얻어
사과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더니 선생님은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충분한 애도를 하지 못하셔서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는 길에 이태원역에 들러 추모하고 가시는 거 어떨까요? 하셨고 저는 조금 망설였지요 “00씨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라고, 상담을 쭉 해본 결과 회복탄력성이 좋고,
사실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거와는 별개로 참사 현장에서 무언가 행동을 하지 않고 도망치듯 집으로 온 것에 대해
현장에서 충분히 애도를 하지 못해 미안함과 자책이 있는 것 같아요” 그길로 곧장 이태원으로 향했습니다.
선생님, 가는 길 내내 심장이 두근거리더라고요.
왜냐고요? 그냥 내가 미움받을까봐요
그냥,, 그 어린 영혼들이 나를 미워하면 어쩌나 싶어서요 이태원 꽃집 keepeen 이라는 곳 사장님이 인스타에서
‘추모 가시는 분들을 위한 무료 국화꽃을 드리고 있습니다
누구든 오셔서 가져가세요, 시간 상관없이 가게 문이 닫혀도 가게 앞에 배치해두겠습니다’ 이 글을 보고 더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누군가 일면식도 없지만 함께해준다―
그리고 함께 기꺼이 동행해준 친한 언니도 저의 추모 길을 응원해주었어요 (인스타 @keepeen) 꽃집에 들러 국화꽃을 가지고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도착해서 편지를 쓰고 붙이고 헌화를 하고 절을 두번 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어요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누구에게든 베풀며 살아갈게요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마음이 많이 풀렸습니다.
응어리진 것이 풀려나가고 가슴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어요
오길 잘했다 싶었고요.
놀러 갔다가 죽은 걸 뭐 그러냐는 사람에게
할머니가 놀다가 죽은 걸 뭐 어쩌라는 거냐―하셨더군요 그 할머니에게 대놓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어요 “할머니, 그러니까 이게 어떤 거냐면요.
트로트 좋아하세요? 임영웅 같은 사람이요.
임영웅 송가인 이런 사람들이 무료로 트로트 축제를 열었대요 놀러 가고 싶으시죠? 거기 놀러 갔다가 사람이 하도 많아서 깔려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전국노래자랑, 거기 구경 갔다가 그냥 깔려 죽을 수 있다는 소리예요” 놀러 갔다가 죽은 걸 뭐 그러냐는 많은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당신은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2002년 월드컵 때 성인이었나요?
그때 재밌게 잘 놀러 가셨지요? 전 국민이 축제 분위기였으니까 젊은 층 모두가 길거리에서 놀았잖아요 그때 깔려 죽었을 수도 있겠다는 소리예요 안녕하세요, 당신은 이런 거 저런 거 다 놀지도 않고 집돌이 집순이이신가요?
혹시 스트레스 어떻게 푸세요? 맥주 한잔? 피씨방?
동네 노가리 집 맥주집에 갔다가 갑자기 사람이 떼거지로 몰려서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예요
피씨방에 갔는데 피씨방에서 사람이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고요 쇼핑하러 명동에, 익선동에, 코엑스에 갔는데 그날따라 사람이 너무 많아서 깔려 죽을 수 있다는 소리예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생존자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나에게 왜 백화점을 갔냐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심리상담치료후 이태원 추모 현장에서-
발이 땅에 닿는 것조차…무섭더라고요 바깥이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 슬프고 화가나고 미안하고 우울했다가 불안하고 깜짝 놀라서 깨고, 이게 공통적인 감정 상태라고 하셨어요,
이런 것들이 ‘혼란스럽다'고 느껴지세요?” ―아니요, 저는,,
저는 사실 강한 사람이에요.
근거 없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살아오며 큰 몇번의 인생의 에피소드들이 있었고 그것을 잘 겪어내왔어요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가 성적 비관으로 세상을 등지기 전날,
반장이었던 저는 그 친구와 마지막 대화를 했던 사람입니다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 심한 거 알지만 그렇다고 다른 친구 프린트물 훔쳐가서 수행평가 점수 만점 받으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힘없이 가던 모습이,
그로부터 몇시간 뒤에 학년부장 선생님으로부터 전화 온 그 순간이,
그 다음날 학교 책상이 비워져 친구가 더이상 오지 않는 걸 바라보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잊어야 산다고 장례식이나 묻힌 곳을 알려주지 않아 16살 어린 마음에 응어리가 지게 했을 때도,
27살 초임의 담임 선생님이 너에게도 나에게도 큰 상처인 사건이니 우리 서로 잊고 각자 잘 살자.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하며 졸업식을 마쳤을 때. 마치 다리가 부러졌지만 깁스를 하지 않고 두 다리로 일어서려고 노력하며 없었던 일인양 덮어놓고 26살이 되었을 무렵. 트라우마라는 것이 그때 해결하지 않으면 십년이 지나서도 발병을 하는 거구나 깨달았고, 그때도 글을 쓰며 건강한 방법으로 잘 회복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인생의 난관이 생길 때,
저만의 극복 방법이 명확히 있는 편이었기에
혼자서 잘 해결해 내는 편이었어요. 운동을 했고, 글을 썼고, 등산을 갔고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루틴을 지키고자 노력했고요
영화를 봤고, 시나리오를 쓰고,
전국의 페스티벌을 다녔고, 음악을 즐겼고
클럽을 갔고,
사는 게 퍽퍽하고 외로울 때는
일부러 짝사랑하는 남자를 만들어
그 남자 한번 더 구경하러 간다는 마음으로 오늘만 살자,
그 남자한테 오늘은 초코렛을 건네봐야지 하며,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나를 놓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이것은 내 잘못 저것은 저 사람의 잘못
분리를 잘 시키며 성숙하게 잘 판단하는 사람이었어요
속상하지만 객관적으로 힘든 상황을 잘 판단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습니다.
참사 이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뉴스를 보는데
속이 메스껍고 두통이 시작되더니 구토할 것 같은 증상 그 다음날은 이겨보려 운동을 갔지만
발이 땅에 닿는 것조차 어려웠어요 무섭더라고요 바깥이.
운동이 되지 않아요 선생님,
그게 저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이고 무서움인지
아실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통제가 되지 않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 것이
저에게 얼마나 좌절감이 크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지
공감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선생님,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어요
잠을 자지 못하고 심장이 빨리 뛰고
밥이 들어가지 않는 현상은
어찌 보면 저에게 놀랍지 않아요
힘들면 찾아오는 증상이었으니까요 “대견해요 잘 살아오셨어요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
자아가 강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00씨 자아가 강할수록 견디지 못할 큰 사건이 다가오면 더 크게 무너집니다.
줄곧 지금까지 내가 알아서 잘 컨트롤 해오던 나의 세계가 무너져버리기 때문이에요. 삶은 무작위의 고통이 던져지는 거라서 크고 작게 우리를 뒤통수치지만 지구를 삼킬 만한 행성급 돌멩이가 뒤에서 던져지면,
별수 있나요 맞고 쓰러져야죠
그동안은 타격감이 없이 무수한 돌맹이를 잘 받아치고 요리조리 잘 피하는 능력자였다면 이번은.. 그냥 핵폭탄급 돌멩이인 거예요 자아가 강한 사람이 지금 나 맞고 쓰러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인정해주세요, 내가 지금 많이 힘들구나라는 걸” <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던, 심리상담치료사와의 대화에서> 정리 장나래 기자 w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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