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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됐고 빛났던 나의 공장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일터가 되었다”

등록 2023-01-09 07:00수정 2023-01-09 16:34

[2023, 공장을 떠나다] ①1988 정민의 무너진 꿈
정년 앞둔 정민씨의 ‘마지막 투쟁’
“생산 현장에 청년을 고용하라!”
윤정민 전국금속노동조합 에스앤티(SNT)중공업지회 지회장이 지난해 12월29일 낮 경남 창원시 에스앤티중공업 본사에서 ‘청년 노동자 현장 신입사원 채용!’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채 회사 안을 바라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윤정민 전국금속노동조합 에스앤티(SNT)중공업지회 지회장이 지난해 12월29일 낮 경남 창원시 에스앤티중공업 본사에서 ‘청년 노동자 현장 신입사원 채용!’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채 회사 안을 바라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2023년, 예순살 윤정민은 공장을 떠난다. 스물한살 최예린은 공장을 떠났다. 떠나며 질문을 남겼다. 왜 한국은 소수의 인재만이 아닌, 다수 노동자가 주인공인 성공을 꿈꾸지 못하는가. <한겨레>는 세 차례에 걸쳐 평범한 노동자의 숙련과 가치를 놓친 혁신과 경제 성장이 개인과 한국 사회에 남긴 불안과 경고를 전한다.

윤정민, 한 해 100만명 넘게 태어난 1963년생. 그가 창원 산업단지에 처음 들어설 때 스물다섯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청년이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잠시 신발 공장에 다녔다. 사양 산업인 탓에 밀려났다. 부산직업훈련원에서 기계 가공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을 쥐고 창원 통일중공업(현재 SNT중공업)에 1988년 입사했다. 정규직으로 안정적인 임금 소득자였으며 그 때문에 국민연금, 고용보험, 의료보험(건강보험) 등 사회 안전망의 초창기 기여자이자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35년이 흘렀다.

<한겨레>가 그를 처음 만난 2022년, 대공장·정규직·생산직·민주노총 금속노조 소속 노동자인 윤정민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때로 혐오의 대상이며, 기득권이라고도 불렸다. 어쩌면 맞는 말이다. 그의 공장에는 35년 전 윤정민과 같은, 스물다섯·정규직·생산직 동료가 단 1명도 없다. 회사가 30년 넘게 생산직 신입사원을 채용하지 않은 탓이다.

그런 공장을 남긴 채 2023년 12월31일 그는 직장 생활을 끝맺고 공장을 떠난다. 이대로 마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료들과 마지막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마지막 투쟁

2022년 10월13일 아침 9시, 윤정민(60)은 정년을 앞둔 또래 동료 5명과 정부과천청사 앞을 서성였다. 노란빛이 감돌기 시작한 나무들 사이로 펼침막을 묶어 투쟁 분위기를 연출해 내는 건 익숙한 일이다. ‘청년 노동자 현장 신입사원 채용!’ 조끼에 구호를 붙였다. 최소 30년 넘게 해온 나의 일, 배턴을 넘겨줄 청년을 찾는다. “우리야 다 나가 뿔면 그만이지요. 그래도 이 공장, 이 나라가 이대로 가면 안 되지 않겠습니꺼. 우리 이제 다 정년인데 회사가 청년은 안 뽑고 죄 하청만 주고 있습니더.” 윤정민이 사정을 일렀다.

회사는 1989년 이후 현장에서 일할 정규직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다. 회사의 정년은 만 60살이고 생산 정규직인 노동조합원 247명의 평균 연령은 57살이다. 정년을 맞은 노동자의 빈자리는 사내하청 노동자가 채웠다. 2020년 175명이었던 에스엔티(SNT)중공업의 사내하청 노동자는 2022년 255명이다.(고용형태공시)

“나이 예순에 방법이 없어 창피스럽게 노조 지회장”을 맡은 윤정민은 잠시 물러서서 물끄러미 함께 나이 든 동료들을 지켜본다. “저 사람들 무서워서 내 적당히 못 물러나는 깁니다.” 온갖 다른 사업장 집회 현장에 ‘청년 채용’이 적힌 조끼를 입고 앉아 있고, “나이 들어가, 잠은 없다”는 점을 무기로 아침 7시 창원대로에 줄지어 손팻말(피켓)을 들고 열성을 부린다.

곧 떠날 희끗한 노동자가 미래의 청년을 위한 외침에 진심을 담기까지, 만만찮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외주화, 자동화, 세계화, 효율화를 통해 눈부신 성장을 이룬 한국 산업 30년과 그 속에 줄어든 공장 노동자의 가치가 나란하다. 10월25일 창원에서 다시 만난 윤정민은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장 노동자의 정점

경남 창원 에스엔티중공업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감을 깎던 윤정민은 1988년 공장에 들어선 날을 기억했다. 지금이야 자동차 부품과 방산 정도만 사업 분야로 남겨둔 직원 500명 규모의 공장이지만, 1980년대 후반 통일중공업은 공작기계, 주물, 단조 공장까지 있는 거대한 공장이었다. “내가 처음 했던 일은 선반인데요. 요래 감이 있으면 꼬치로 꽂아 가지고 기계가 돌려요, 그러면 도구를 가지고 싹 깎아내는 깁니다.”

정규 근무 8시간, 잔업 3시간, 때로 철야를 해야 했다. 다만 빛났다. 손으로 하는 일 자체에 기대를 걸었다. “운전도 그렇잖아요. 하루 할 때보다 다음날 할 때 조금씩 늘잖습니꺼. 똑같습니다, 손기술이라는 것도.”

숙련이 늘어나는 만큼 임금과 복지 또한 나아질 것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건 ①경제 성장과 노동조합 덕분이다. 3저 호황과 민주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분위기가 물씬했다. 통일중공업 노조는 창원 지역 노동운동의 전설로 불릴 정도로 기세 높았다. 1988년 윤정민과 동료들의 임금은 26.6%(1988년 단체협약) 올랐다. 한국 제조업이 벌어들인 돈(부가가치)에서 노동자의 몫이 1987년 47%에서 1990년 52.3%까지 높아졌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다.

1987년 민주노조를 쟁취한 통일중공업(현 SNT중공업) 노동자들의 모습. ‘통일-S&amp;T 중공업 노조운동 30년사 끝나지 않은 저항’ 저자 김정호 제공.
1987년 민주노조를 쟁취한 통일중공업(현 SNT중공업) 노동자들의 모습. ‘통일-S&T 중공업 노조운동 30년사 끝나지 않은 저항’ 저자 김정호 제공.

그런 생산직 노동자의 정점에서 윤정민이 맞은 1990년 5월3일은 앞날을 예고하는 징조 같다. “그날 아침 비가 부슬부슬 왔어요.” 윤정민의 친구이자 동료, 이영일이 몸에 불을 붙인 채 공장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모포에 싸서 끌어안고 회사 앞 창원 병원으로 내달렸다. 살리지 못했다. 이영일이 남긴 대학 노트에는 ‘얼마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느냐가 문제인 것 같다’고 적혀 있었다.

고됐고, 빛났고, 비극적이었던 그 시절 이후 윤정민 같은 생산직 노동자의 자리는 줄어들었다. 1989년 전체 노동자 가운데 27.8%에 이르던 제조업 노동자 비중은 2021년 16%까지 감소했는데 이는 양적인 감소에만 그치지 않는다. 공장에서 노동자, 사람의 가치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상실한 공간

윤정민은 그 상실의 기억이 어린 공장의 풍경을 되짚었다. 우선 휑한 공장 자체. 1992~1993년, 3저 호황 이후 찾아온 불황 앞에 윤정민은 공장에서 1천여명이 해고되는 모습을 봤다. “우리가 완전 강성노조가 됐거든예. 그럼 어떻게 타협해 위기를 극복할까 이래 갔어야 하는데 회사는 빚을 내서 다른 지역에 하청 공장을 짓고 거기서 똑같은 걸 만들고 있는 겁니더. 노조는 노조대로 파업했고. 같이 망하는 쪽으로 간 거지요.” 사업부문이 폐쇄되고, 있던 일도 외주화되었다. 자본은 냉정했고 노동조합은 지키는 데 급급했다. 격렬한 노사 갈등 이후 기업은 노조와의 타협보다 ‘노동자 숙련에 덜 의존하는 공장’을 꾀했다.

이는 3저 호황 이후 한국 제조업을 주름잡은 ②‘신경영 운동’의 맥락에 닿아 있다. 통일중공업이 사업을 축소하고 외주화하는 방법으로 노동자의 숙련을 공장에서 제거해갔다면, 완성차·전자 등 대기업은 자동화를 택했다. 자동화에 투자할 수 있는 대기업과 이를 다루는 엔지니어 등 소수 전문 기술직이 제조업 성장을 주도해 나갔다. 평범한 생산직 노동자는 밀려났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는 1년여의 임금체불과 통일중공업의 최종 부도(1998년 11월)로 이어졌다. 공장 후문 옆 복도식 5층 건물인 사원아파트에 살았던 윤정민은 “완전 난민촌 같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아이들은 밥도 못 먹고 맨발로 뛰놀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길이 없구나’, 유서를 쓰고 한 동료는 목숨을 끊었다. 정규직 노동자들마저 정리해고로 무너졌다. 회사가 기존 노동자에게 업무 분야를 떼어주는 ‘소사장’ 형태로 ③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또한 가속화했다.

윤정민이 공장을 걷다가 우뚝 멈춰 서서 쓰다듬는 초록색 글리슨 기계(기어가공기계)도 빼놓을 수 없다. ④국제분업의 여파가 미쳤다. 2005년 윤정민은 이 기계에 쇠사슬로 목을 묶었다. 사진에 담긴 그의 모습은 러닝셔츠가 땀에 푹 젖은 채다. “중국에 있는 자회사에 이 기계를 반출하려고 했어요. 이게 사라진다는 건 우리도 사라진다는 거잖아요.”

떠남과 만남

이후에도 생산직 노동자인 윤정민과 동료들은 ‘유휴인력’이라고 불렸다. 사업 축소가 이어졌고, 자주 휴업했고, 희망퇴직 공고가 나붙었다. 퇴직한 동료들은 소사장 업체 소속으로 다시 공장에 돌아와 최저임금을 받았다. 당장 사라지는 ‘우리 조합원’을 지키고 정체된 임금을 인상해보려 윤정민은 싸웠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한때 4천여명이 복작이던 회사에 이제 500여명이 남았다. 회사의 매출액은 2010년의 절반 수준이다. 규모가 줄었지만 대개 흑자를 낸다. 자산을 매각했고 비용 또한 줄었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는 에스엔티중공업의 인건비가 지난 10년 연평균 4.9%씩 줄어든 것으로 집계하며 인플레이션 시기 인건비 구조가 좋은 기업으로 꼽기도 했다. 윤정민 또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아 기본급 월 200만원 안팎이고, 상여금과 수당을 더해도 근속 35년차에 연봉 5천만원 정도다.

윤정민은 스스로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일터를 만들어 버렸다”고 탄식했다. “노동조합이 기본적으로 조합원 이익을 위해서 있지만 회사나 산업의 미래에 노동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불평등이 왜 줄어야 하는지 그런 얘기를 더 해야 됐어요. 노조 말고 누가 자본에 그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꺼.”

만약 하청 노동자의 임금과 처우가 정규직과 같았다면 구태여 외주화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숙련이 중요한 일터였다면 노동자가 자동화와 세계화로 쉽게 대체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 손끝에서 나온 혁신이 강점인 공장이 됐을 것이며, 30년 넘게 해온 일이 ⑤‘기피 업무’가 되는 일 또한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해 10월22일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청년 신입 사원 채용을 요구하는 에스앤티(SNT)중공업 노동자들.
지난해 10월22일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청년 신입 사원 채용을 요구하는 에스앤티(SNT)중공업 노동자들.

“요즘 청년들이 공장에 잘 오려 하지 않는다”는 회사의 설명에, 윤정민은 “적절한 임금과 안정성, 공장의 비전이 있으면 청년들은 올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우리 공장과 내 일 또한 아직 성장과 혁신에 동참할 기회가 남았다는 생각을 그는 포기할 수 없다. 퇴사 이후 소사장 업체 소속으로 공장에 돌아온 김명우(가명·61)는 “그래도 내가 40년 다닌 회사가 좀 번듯했으면 좋겠어. 그런 자부심도 없는 건 한숨 나오는 일인 기라” 하고, 아직 공장에 남아 미래를 위한 투쟁을 벌이는 동료들을 에둘러 격려했다.

그렇게 청년을 고용하라고 외친 마지막 투쟁의 결과. ‘현장 신규채용은 2024년도에 25명 이상, 이후에는 회사의 물량 상황을 고려해 추후 논의한다’는 문구를 회사로부터 받아냈다. 그래도 25명, 구했다. “그나마 들어오면 예뻐 죽을 것 같다”는 네살 어린 쉰여섯 동료의 넉살에, 그날 공장에 없을 윤정민은 잠시 웃고 말았다.

창원/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첨단 인재’의 시대, 공장을 떠난 이들을 만난 이유

정부는 올해 경제정책방향에서 미래산업 중심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신성장 4.0 전략’(4.0)을 발표했다. 1.0은 농업, 2.0은 제조업, 3.0은 아이티(IT)산업이라고 했다. 4.0에 걸맞은 노동자는 ‘첨단 인재’라고 불렸다. 정부가 규정한 첨단 인재로 볼 수 있는 엔지니어, 개발자, 금융 전문가 등이 포함된 전문가 및 관련 종사자는 588만명(20.9%, 2022년 11월까지 월평균)이다.

여전히 첨단으로 여겨지지 않는 현장에서 ‘인재’ 아닌 ‘노동자’들이 일한다. 공장이나 건설현장 등에서 일하는 장치·기계 조작 및 조립, 단순 노무 종사자 등은 953만명(33.9%)이다. 상점·식당에서 일하는 서비스·판매 종사자는 594만명(21.1%)이다. 이들은 선진국에 이른 대한민국의 주역, 혁신의 주인공으로 불린 적이 없다. 왜 한국은 소수의 인재만이 아닌, 다수 노동자가 주인공인 성공에 이르지 못했는가. 생산과 혁신에 어떻게 더 많은 노동자를 포용할 것인가는 첨단의 시대, 불평등과 양극화에 직면한 세계 각국의 고민이기도 하다. 생산 과정에서 불평등이 확대되는 한 사후적인 복지만으로 불평등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2023년, 베이비부머는 정년을 맞고, 청년은 기피하는 일터가 된 공장은 그 경고이자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고졸 정도의 숙련으로 입사한 노동자가 △일하며 기술을 익혀 생산성 혁신의 바탕이 되고 △노동조합에서 자본과 정부를 견제하고 △중산층이 되어 내수 시장을 형성하고 △안정적인 납세자로 복지국가의 기반이 되는 꿈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가운데 섰던 공장에서조차 무너졌다. 2022년 11월까지 제조업 생산직에서 60살 이상은 한해 전보다 6만8천명(16%) 늘어났는데 20대는 오히려 2천명 감소했다. 공장들은 “청년이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경제활동인구조사 원자료) 그 빈자리를 정규직 정년 이후 계약직, 하청 업체 등으로 자리를 바꾼 노동자가 채운다.

누구에 의해 성장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 성장할 것인가. 4.0에 포함할 첨단 산업의 목록보다 앞서 던졌어야 할 질문을 공장에서 물러나는 베이비부머와 공장에서 달아나는 20대 특성화고 졸업생을 통해 뒤늦게나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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