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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하청은 정해진 계급 같아” 청년에게 ‘숙련공’ 사다리는 없다

등록 2023-01-17 10:00수정 2023-02-07 16:33

[2023, 공장을 떠나다] ③-2 최예린의 아득한 미래
첨단 산업 속 불안정 노동
학점은행제·자격증·퇴사…
각자도생할 방법 찾지만
‘평범한 노동자’론 비전 못찾아
최예린씨가 지난해 12월28일 오전 경기 안산 반월공단을 바라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최예린씨가 지난해 12월28일 오전 경기 안산 반월공단을 바라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이야기

2020년 반월·시화 공단에 있는 도금 공장에 입사한 예린은 장갑 등 기본적인 안전 장비를 받지 못했다. 손톱에 구멍이 났다. 월 160만원을 벌었다. 예린과 친구들이 주로 맡은 업무는 기계를 보조하는 단순·반복·장시간 노동이었다. 예린과 친구들은 공장을 떠나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하기로 했다.

2021년 10월29일 최예린(21)이 시화공단의 도금 공장을 떠나던 날, 사과와 격려는 소박했다. 폭언과 애원을 오가며 퇴사를 막았던 부장은 “말이 심했다. 잘 지내”라고 했다. 동료들은 “잘 선택했다.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다. 공장을 떠난 예린과 또래 친구들은 미래의 노동자로서 다짐하고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하지만, 자주 외롭고 불안하다.

첫번째 미래: 첨단의 끝단

강수린(가명·21)이 다니는 소규모 하청 공장은 전기 자동차 배터리를, 검사하는 기계의, 부속품을 만든다. 차세대 먹거리라는 전기차 배터리 산업 언저리에서 그는 퇴사를 다짐했다. “2024년 1월에 나갈 거예요. 그때 청년내일채움공제(2년 이상 일하면 1200만원 주는 제도)가 끝나요.”

수린은 ‘미래’ 산업의 성장 가능성과 찬란함 뒤편 하청 공장에서 훼손되는 사람의 가치에 실망했다. “부품을 깎는 기계가 절삭유를 뿜어내는데 거기 발암물질이 있다는 것을 네이버 검색으로 알게 됐어요.” 위험을 알리지도, 안전 장비를 주지도 않는 공장에 더는 머물 수 없었다.

산업의 고도화에도 여전히 필요한 사람의 역할은 주로 소규모 하청 업체에 맡겨진다. 대기업 공장 노동자가 정년을 맞아 사라져가면서 그 흐름은 가팔라졌다. 2009~2022년 300인 이상 제조 기업의 노동자 수(사업체 노동력 조사)가 5만명 늘어나는 동안 5~30인 미만 기업의 노동자 수는 31만3천명 증가했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는 “한국 제조업의 장점은 설계 기술보다 제조 기술에 있고 그곳이 보통 수준의 노동자가 참여하는 영역인데, 이를 외주화하면서 산업적 토대 또한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두번째 미래: 나 홀로 사다리

미래의 산업 속에 오롯한 노동자로 서기 위해 예린이 다짐한 것은 “혼자서 방법을 찾는 것”이다. 대기환경 측정 업체로 이직한 그는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사 학위를 따기로 했다. 화학공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일을 더 잘하고 많이 해도 학력에 따라 급여 차이가 커요. 고졸은 2800만원이라면 대졸은 3천만원 이상으로 시작해요.” 고졸 학력, 소규모 하청은 2020년대 공장에서 출발점이 아니라 굳어진 계급에 가까웠다.

특정 기술이 평생의 노동을 보장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대학 학위 공부는 산업 변화에 맞춘 새 기술을 습득할 밑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이를 ‘일반 숙련’이라고 부른다. 다만 일반 숙련이든, 특정한 기술이든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공장에서 숙련의 기회를 얻지 못한 예린은 공부 앞에서도 ‘혼자’와 ‘운’에 기댔다. “학점은행제는 대학을 알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됐어요. 민간에서 위탁하는 학점은행제 플래너가 있는데 괜찮은 플래너를 만나면 할인가를 제시해줘요. 저는 운 좋게 절반 정도 할인받아 두 과목에 15만원이에요. 여덟 과목 들으면서 60만원 낸 적도 있어요.” 예린이 운이 좋아 할인받은 수업료는 물론, “낮에 일해서 낸다.”

이승윤 중앙대 교수는 “대기업의 일자리는 갈수록 경력직을 선호하며 숙련을 알아서 키워 오라는 식이고, 정부의 훈련 프로그램만으로 노동자가 저숙련을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며 “숙련 형성이 시장과 사적 영역에만 맡겨져 자원이 없는 청년을 누락시킨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인적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고, 무엇보다 청년 내부의 불평등 문제를 심화한다”고 말했다.

세번째 미래: 유예하는 미래

김승민(21)은 2021년 4월, 넉달 만에 스마트폰 기판을 만드는 공장을 떠났다. 기계 7대의 뒤처리를 감당하는 일에서 비전을 못 찾은 건 수린·예린과 매한가지다. “운 나쁘게 시간을 허비했다”고 승민은 말했다. 전자과를 전공한 고등학교 시절까지 더하면 3년여의 세월이 무의미해졌다. 승민은 “다시는 실패해선 안 된다”고 다짐한다. 그동안 전공·경험과 무관한 대학교 방사선학과에 들어간 이유다. “방사선사가 되면 안정적일 것 같았어요. 근데 내가 이상해서 공장을 너무 일찍 나와버린 건 아닌지, 방사선사 시험 합격률은 60%라고 하는데 시험에 떨어지면 이 시간도 허비하는 건 아닌지 계속 불안해요. 첫 직장부터 갈피를 못 잡아서 그래요.”

불안의 배경에는 내 노동의 미래가 내 삶의 미래와 연결돼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또한 사회의 미래와 연결된다.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튕겨져 나와 부유하는 청년이 많아질수록 오직 개인의 노력으로 한 칸이라도 더 위로 올라가는 것이 꿈이 되고, 그럴수록 각자도생과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구조화된다”고 말했다. 사람의 가치가 배제된다면, 함께 저항할 힘 또한 약해진다.

‘당신의 미래’라는 화두에 예린은 잠시 숨을 골랐다. “미래는 두려운데요, 일단 지금 먹고살 것들을 위주로 생각해요.” 미래를 기약하는 첨단의 수사로 가득한 세상에서 늘 “잘 해내고 싶은” 의지가 충만했던 평범한 노동자 예린은 ‘현재’로 생각을 애써 돌렸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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