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잃은 아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가 생각날 때마다 일기를 쓴다.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고 100일이 될 때까지, 참사 희생자 신애진(25)씨의 아빠 신정섭(53)씨는 에이포(A4)용지 247쪽 분량으로 194편(2022년10월31일∼2023년2월5일)의 기록을 남겼다. 씩씩하고 당찬 딸 애진은 원하던 컨설팅 회사에 들어간 지 약 한달 만에 이태원에서 삶을 마쳤다. “남은 건 아이에 대한 기억과 관계들뿐”이라며 아빠는 일기를 쓰며 딸과 함께 살아간다. <한겨레>는 신씨가 쓴 기록과 함께 지난 2일 이태원 시민분향소 앞에서 만난 애진의 부모 이야기를 담는다.
지난 2021년 9월 고 신애진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재한 사진. 제주 여행에서 아빠 신정섭씨와 바다를 배경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버지 신정섭씨 제공
2022년 10월31일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경찰·소방 인력 배치 부족이 사고의 원인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빨래를 개는 아내와 마주앉았다. 애진이의 마지막 빨래. 눈물이 솟아오른다. 투덜대는 애진이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귀털을 뽑아달라고 조르던 내 삶의 가장 큰 행복은 기억으로 박제되었다. 칠팔십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성장의 극점에 다다른 꽃다운 스물다섯, 스물네해에서 고작 열흘을 더 살다가 떠나는 애진이의 얼굴이 영정사진으로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11월6일 경찰 특별수사본부, 이임재 용산경찰서장·박희영 용산구청장 등 피의자 6명 입건
정신이 맑을 때, ‘그날’의 기억을 적어두고자 한다. 새벽 3시 정각에 벨이 울렸다. 애진이 집에 잘 왔냐고. 내가 출장 중이어서 확인해보고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바로 아내에게 전화해 애진이가 들어왔는지 물었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애진이가 이태원에서 실종이 되었다고. 바로 짐을 쌌다. (참사 다음날) 오후 2~3시쯤이었다. 용산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애진이를 찾았단다. 안양 샘병원이었다고. 아내는 쓰러져 통곡을 했고 나도 울었다. 어쩌지 못하여 그저 울었다.
엄마와 아빠는 어떻게 애진이가 안양에 있는 병원까지 가게 된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애진은 참사 현장에서 가까운 순천향병원으로 먼저 이송됐는데, 당시엔 신원이 특정되지 않아 이런 실마리를 알려줄 구급일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가족들은 사고 당시의 조각을 조금이라도 더 찾아보려고 백방으로 뛰었고, 지난달 31일 처음으로 행안부 유가족 지원단으로부터 도와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11월8일
애진이의 남동생에게 “너는 누나의 몫을, 누나의 삶을 대신해서 살 필요가 없다. 너는 그냥 네 삶을 살아라”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누나,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인 형제가 사라졌으니 둘째가 짊어질 삶의 무게도 2배 이상 늘었으리라.
애진의 남동생은 군복무 중 누나의 소식을 들었다. 아빠는 “부모인 우린 자식을 잃은 거지만, 둘째는 하나뿐인 형제를 잃은 거잖아요. 우리 아들은 아픔을 나눌 수 있는 형제가 없어졌으니 마음이 더 아픈거죠”라고 말했다. 최전방에 있는 동생은 누나가 그리울 때마다 새벽 철책 경계를 마친 동료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버틴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째인 5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 마련된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양소를 찾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1월 14일 <시민언론 민들레> 이태원 희생자 명단 무단공개
오전에 이태원에 다녀왔다. 어제까지 있었다는 분향소는 철거되고 지하철역 입구부터 도로 한차선을 막고 시민들이 놓아준 조화와 희생자의 사진들, 시민들의 메모가 빼곡히 붙어있었다. 애진이 사망신고. 10분 걸리는 그 시간동안 아내는 멍하니 서 있었다. 침대에 앉고서야 통곡을 했다. 아내는 희생자 명단이 공개되면서 <워싱턴포스트> 기사에 실린 애진이 사진이 나오는 것을 힘들어한다. 그녀는 애진이가 정치적으로 이용될까봐 걱정을 한다. 나쁜 댓글이 달릴까 두려워한다.
11월22일 유가족 30여명, 첫 공개 입장 발표 및 대정부 6대 요구사항 공개
아내의 분노는 이태원에 있었다. 진상도 밝히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려는 정부,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는 없는 언론, 정쟁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정치권. 아이들의 죽음이 놀러갔다가 죽은 거로 매도 당하는 게 참을 수 없다는 그녀의 말. 희생자 하나하나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꿈을 꾸었는지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들의 사라진 목숨이, 날아가 버린 꿈이 얼마나 소중하고 우리 사회가 잃은 게 뭔지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은가.
11월25일
유족으로서의 목표는 진상조사이다. 사고는 왜 일어났는가와 어떻게 대처하였는가이다. 특히 사건 전 예방 조치를 하지 않은 이유와 당시 의사결정체계는 무엇이고, 그 인력들은 다른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가. 사고 발생 이후 구조가 늦어진 것은 그다음 문제이고 재난 대응 매뉴얼과 연락체계, 통일된 지휘체계의 문제이다.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라는 말도 적합하지 않다. 오늘은 통제가 있고, 내일은 없을 거라고 어떻게 일반인이 알 수 있을까. 내가 태어나 사는 국가에 대한 기대이자 국가의 의무가 아닐까.
경찰 특수본 수사와 국회 국정조사가 종료됐지만 유족들이 알고자 하는 진실은 여전히 멀리 있었다. 신씨는 “국정조사에서도 대부분 사후 조처가 주로 조명됐는데, 가장 궁금한 건 아이들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취해졌어야 할 사전 조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이유다. 그에 대한 책임 소재를 윗선까지 가려내야 하는데, 이걸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독립적 조사기구의 필요성도 대두된 것”이라며 “진상규명이 돼야 시스템을 바꾸고 대안도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엄마 김남희(49)씨는 “국정조사 보고서를 보면, 용산구청의 종합상황실 운영은 너무 부실했고 종합적인 사전 계획도 없었다. 이런 계획을 세워 전파해야 할 사람들 모두 문제가 있는데, 정말 최소한의 관계자만 처벌을 받은 것 같았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 발생 100일을 하루 앞둔 4일 오후 거리 행진을 하던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와 유가족협의회가 서울광장에 기습적으로 분향소를 설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12월7일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시민대책회의) 출범
(4년 전 딸과 함께 갔던 여행지를 다시 찾아서-타이 치앙마이 대학교)
아내는 애진이가 사진 찍은 곳을 바로 찾아냈다. 애진이 대신 그녀가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근처 벤치에서 마냥 울었다. 4년 전의 애진이를 만나러 왔다. 그때 우리는 마냥 행복했고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를 부모로 만나 그 생이 이렇게 짧았던 게 아닌지, 그 생각에 미안하고 미안하다.
아빠와 애진은 어릴 때부터 단둘이 여러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타이 치앙마이도 그중 한 곳이다. 딸의 기억이 있는 곳에서 애진을 되찾기 위해 엄마와 함께 여행을 나섰다. “태국에 사원이 많잖아요. 눈만 뜨면 사원에 가서 애진이를 위해 기도하고, 걷고, 기도하길 반복했어요. 그러다가 애진이가 갔던 곳에 가보고…. 그렇게 지내다가 49재를 앞두고 돌아왔어요.” 엄마가 말했다.
12월13일
어떡하지, 생존한 고등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대. 네가 떠난 것도 견디기 힘든데,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견디기가 어렵네. 너와의 작별, 그게 전부였고 그게 미래였는데 남아있는 이 상흔을 남의 일로 두고 보기가 어렵네.
12월16일 참사 희생자 49재
어제 오후에 시민분향소에 갔어. 찬찬히 한명 한명 바라보았어. 그러다가 너를 보았어. 빛나게 예쁜 애진. 네 장례식 때 같이 있던 아이 얼굴도 있었어. 엄마가 말했어. 그때 구청인지 시청인지에서 나온 분들께 물어보았더니 아니라고, 모른다고 했다고. 그래, 엄마랑 같은 사고였으면 가서 인사라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이야기했고, 내가 그분들께 물어보았어. 아니라고, 자기들 알기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어. 그래서 인사드리는 걸 포기했지.
애진의 가족은 이태원 시민분향소에 가서야 참사 당시 같은 장례식장에 있었던 애진 또래의 여성이 또 다른 희생자였음을 알게 됐다. 애진과 이 여성은 발인일과 화장 장소도 겹쳤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장례식장에 온 구청 직원에게 같은 참사 희생자가 있는지 물었지만, “모르겠다”며 얼버무리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12월21일
간만에 술을 많이 먹었다. 애진이 남자친구를 만나 그랬다. 애진이랑 술 마시는 기분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그는 애진이를 잊어야 한다.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인생은 축제이다. 앞으로도 그는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녀석이 행복해야 우리 애진이 마음도 편하리라.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이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용산구 지하철 녹사평역 이태원 분향소 앞에서 대통령에게 보내는 성명을 발표한 뒤 희생자들을 기리며 159배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2월26일 전날(25일) 신자유연대, 유가족 성탄절 미사 방해
용산구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데 소리가 점점 커진다. 신자유연대의 공간은 넓어져서 한반도가 분할된 형국이었다. 확성기 앰프를 우리 쪽으로 설치하고 굉음을 내고 있었다. 아내의 눈물샘이 터졌고 나 역시 눈물이 날 뻔했다. 분노의 눈물이었다. 우리 애진이 마지막 미사인데, 그래서 꼭 보려고 왔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그쪽에서 틀어놓은 캐럴 소리에 미사의 소리는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당분간 캐럴송은 듣지 못할 것 같다.
유가족에게 시민분향소는 때로는 집보다 편한, 위안의 장소다. 애진씨 부모는 지난해 12월16일 희생자 49재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분향소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힘든 이야기를 다른 가족과 나눌 수 있고, 함께 있기만 해도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 분향소 바로 옆에서 보수단체는 ‘집회’ 명목으로 자리를 잡고 유족들의 추모 행동을 방해한다. “성탄절에 드린 미사를 애진이를 위한 마지막 연도미사로 생각했거든요.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을 수 없었어요.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도 사람이 해선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지금도 용서가 안 되는 날 중의 하나에요.” 엄마가 말했다.
12월27일
국정조사 참관을 하고 왔다. 속이 터진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김광호 서울경찰청장, 조수진 국민의힘 의원. 이들 이름은 기억하겠다. 이상민 장관은 자신의 책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떠넘기기다. 김광호 서울청장은 법적 책임을 모면하는 데 혈안이다. 조수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지키기에 열정을 쏟는다. 진상 규명은 안중에도 없다. 이런 국정조사가 의미가 있을까. 애진아, 아빠는 잘 모르겠다.
2023년 1월1일
애진아 너에게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몰라서 말을 할 수가 없네. 네가 이 시간 속에 있는지도 몰라서 새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빠, 올해는 씩씩해져 볼게. 애진아, 새해 인사는 하지 못해도 사랑한다는 말은 전할게.
1월5일
내 생일은 온통 눈물이다. 애진이가 그리워서 안타까워서 우는데, 그게 내 생일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생(生)이라는 낱말이 들어가서일까. 나의 삶이 애진이를 통하여 의미 있었기 때문일까. 눈물이 장마처럼 내린다.
1월엔 아빠, 2월엔 엄마의 생일이 있었다. 애진은 가족들 생일은 자신이 제일 먼저 축하해야 한다며 자정을 넘기기 직전 애교 섞인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부부는 더는 오지 않는 애진의 메시지에 눈물로 생일을 보냈다.
손제한 이태원 특별수사본부장이 지난달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이태원 사고 특별수사본부에서 수사 결과에 대한 브리핑에 앞서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1월13일 경찰 특수본, 이태원참사 수사결과 발표
마음이 쓸쓸한 이유에 대해 아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특수본의 수사 결과 발표 때문이구나. 기대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내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내 마음이 이러니 그녀의 마음은 또 어떨까. 상식이 상처받는 세상. 그래서 무엇이 상식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세상. 열패감으로 도배된 세상.
지난달 13일, 엄마와 아빠는 언론 보도로 특수본 수사 결과를 받아볼 수 있었다. 경찰은 사건 관계자 중 누구를 얼마나 조사했는지, 입건된 이들의 업무별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조사 대상에서 빠진 사람은 누구인지 등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답해줄 곳이 없었고, 여러 기사를 보며 사실의 조각을 짜 맞춰볼 뿐이었다.
1월14일 유가족협의회 및 시민대책회의, 10.29 이태원참사 3차 시민추모제 개최
작년 4.16(세월호 참사 8주기)에 쓴 내 글을 우연히 보다가 울고 있다.
‘세월호의 기억은 8년이 지나 들리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한다. 햇살 좋은 이 봄날, 고작 며칠을 반짝이고 꽃비로 내려앉는 너희들에게 삶은 살아내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말이 용기이고 생각이 의지라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내 삶이, 수십억살은 더 먹었을 이 햇살이 보듬어 준다’
애진이는 어디로 간 걸까, 순식간에 떠나버린 내 아이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애진의 가족은 몇 년 전 간 목포·진도 여행에서 인양된 세월호를 바라보기도 했다. 참사의 시간을 지나오며 엄마가 가장 많이 생각한 건 ‘세월호 엄마들’이었다. 부모로서, 세월호 집회도 참여하고 가족들의 슬픔에 공감한 그였다. “저희도 아이를 굉장히 늦게 찾았어요. 다음날 3시가 되어서 찾았는데, 아이를 못 찾을까봐 너무 불안했어요. 그래서 세월호 때가 생각이 많이 났고…당시엔 그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참사의 당사자가 되고 보니 다른 사람의 공감과 당사자가 느끼는건 정말 다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엄마의 눈시울은 또 한번 붉어졌다.
1월22일 전날(21일) 이상민 장관 분향소 기습 방문
아내, 둘째와 오전에 녹사평 분향소에 갔다. 우리 도착하기 30분전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다녀간 모양이다. 지원을 협의하러 왔다고 한다. 유가족의 자리에 서니 분향 오시는 분들을 한분한분 쳐다보게 되고 그분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위로받고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장관의 분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문상하는 느낌을 받는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은 지지 않고 분향만 하겠단다. 국정조사에서 위증을 하고 거짓말만 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던 자가 분향만 하겠단다. 권력자에게 인간다움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지한 씨 어머니인 조미은 씨가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출입문에 접근하던 중 경찰에게 저지당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월27일
어제(26일) 명동성당에서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위한 미사를 열어주셨다. 신부님이 강론에서 공감을 강조하셨다. 공감하지 않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냐고 말씀하셨다. 공감의 부재는 참사의 원인이자 참사가 그 민낯을 보여준 우리 사회의 얼굴이다.
2월5일 전날(4일) 이태원 참사 유족, 서울시청 광장 앞 분향소 설치
애진아, 우리가 작별한지 100일이 되었네. 아빠가 네 새 영정사진을 들었어. (서울)시청에서 우리는 멈추었고 분향소를 설치했어. 경찰들이 몰려왔어. 아빠가 맨 앞으로 달려가서 경찰을 몸으로 막았어. 네 영정사진을 들고. 네 사진이 손상될까 봐 높이 들고 소리쳤어. 그만 물러나가라고. 너희들도 다친다고. 그 경찰들도 애진이 또래였어. 그 날 이태원에는 보이지 않던 경찰이 왜 이리도 많을까. 애진아, 이제 겨우 100일이 지났는데 아빠는 이미 평생 흘린 눈물보다 수백배는 더 쏟았네.
지금은 준비를 마치고 아침 8시49분. 우리는 이제 100일 추모제를 위해 국회로 간다. 애진아, 너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이었구나. 너를 보낸지 100일이 되어서야 네 죽음의 다른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난 2021년 9월 고 신애진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재한 사진. 제주 여행에서 아빠 신정섭씨와 바다를 배경으로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아버지 신정섭씨 제공
참사가 발생한 뒤 100일을 지내오며, 아빠와 엄마는 애진을 위한 새 꿈을 갖기로 했다. ‘언덕 위의 보배’라는 애진이 이름을 딴 공익 목적의 벤처 투자 회사를 설립하는 구상도 그중 하나다. “아이는 없지만 애진이가 가족과 친구들과 맺었던 관계는 남아있잖아요. 관계는 기억을 통해 유지되니까, 그 속에서 애진이가 남아있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거예요. 애진이가 창업하는 사람들 도와주고, 같이 맞대는 일을 하고 싶어했으니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우린 아이와 함께 사는 거예요.”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도 덧붙였다. “제 욕심도 더해 봐요. 애진이가 새 인연을 만들 순 없지만 유지는 시켜주고 싶어요. 친구들이 애진이 이야기를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고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 한겨레는 유가족의 요청에 따라 이 기사의 댓글 창을 닫습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