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일가족 살인 사건’ 유가족인 전아무개(33)씨가 지난 2월27일 경기 성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범죄 피해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남편에게 8년 동안 폭행을 당했다. 전치 29주 진단이 나오기도 했다. 남편은 의처증에 따른 집착이 강했다. 다른 사람과 밥 먹는 일까지 따져 묻고 때렸다. “사람답게 사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고 박아무개(53)씨는 말했다.
2019년 남편과의 고리를 끊기로 결심했다. 박씨의 반복된 피해 사실을 알고 있던 경찰관이 주선해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임시조치’를 받게 됐다. 남편에게 피해자의 △주거, 직장 등에서 100m 이내 접근 금지 △전기통신(전화·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한 접근 금지 명령이 나온다.
이 조치는 한시적일 뿐이었다. 남편이 받은 접근금지 기간은 겨우 2개월이었다. 연장해도 최장 6개월밖에 안 된다. 남편은 “뭐 하러 그런 걸 했느냐”고 비꼬았다. 보복이 두려웠던 박씨는 진단서 등을 모아 남편을 정식으로 고소했고, 남편은 경찰에 체포됐다.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박씨는 이혼을 원했지만, 구치소에 구금된 남편은 “합의로 나를 빼내어주면 이혼해주겠다”고 버텼다. 이틀에 한번꼴로 넉달 동안 구치소에 찾아갔고, 영치금까지 넣어주며 설득해 겨우 이혼에 합의했다.
박씨는 대신 남편에게 죄가 없다는 탄원서를 쓰며 엉엉 울어야 했다. 풀려난 남편은 한동안 이사 간 집으로 불쑥 찾아오거나 ‘잘 지내냐’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어두워지면 무조건 밖에 나가지 않아요. 남자만 보면 트라우마가 생겨요. 사람 냄새가 싫은 거예요.”
박씨는 인터뷰하는 2시간 동안 ‘접근금지’라는 단어만 21번을 쓰며 반복해서 호소했다. “두달 할 거면 왜 하나 싶어요. 외국에선 10년도 할 수 있더라고요. 접근금지를 10년 아니면 20년까지 늘려야 해요.”
<한겨레>와 심층 인터뷰한 범죄 피해자들은 대부분 보복 범죄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하지만 사법기관의 가해자 접근금지 처분은 대상 범죄가 한정적인데다, 기간도 짧다. 경찰의 신변보호 조치도 한계가 뚜렷하다. 가해자의 출소 등을 알려주는 법무부의 통지 제도는 피해자 신청이 있어야 가능하다.
전남편에게 8년 동안 폭행을 당한 박아무개(53)씨. 박씨는 인터뷰 내내 ‘접근금지’ 기간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반복해서 호소했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2017년 발생한 ‘용인 일가족 살인 사건’ 유가족인 전아무개(33)씨는 아예 접근금지 처분을 활용조차 할 수 없다. 접근금지 처분은 가정폭력, 아동학대, 스토킹 범죄에서만 활용이 가능하다. 전씨는 살인범 김성관의 공범 정아무개씨의 보복이 두렵다고 했다.
김성관은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징역 8년형을 받은 정씨는 2026년 출소한다. 정씨는 교도소에서도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탄원서를 여러번 제출했다고 한다. “정씨가 할머니도 때리는 등 성격이 이상하다고 해요. 출소해서 해코지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지난해 발생한 ‘부산 서면 돌려차기 살인미수’ 사건 피해자 민예진(가명·27)씨도 보복 범죄 공포에 떨고 있다. 살인미수 혐의 역시 접근금지 처분 대상이 아니다. 최근 가해 남성의 전 여자친구와 연락이 닿았는데, 가해 남성이 이 여성에게 ‘왜 연락을 끊었냐’며 욕설 섞인 협박 편지를 거듭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민등록번호까지 알기 때문에 출소하면 계속 쫓아올 거라고 해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 저도 안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5월 이혼한 전남편에게 흉기로 찔려 중상을 입은 이아무개(33)씨도 인터뷰 내내 불안감을 호소했다. 전남편은 살인미수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그 형을 다 살고 나와도 남편의 나이는 50대에 불과하다. “전남편은 반성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언제 출소해서 보복할지 몰라서 매일 창문을 꼭 잠그고 자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어요.”
이런 피해자들을 위해 경찰은 ‘신변보호 조치’를 한다. 주거지 순찰 강화와 임시숙소 제공, 신변 경호, 전문 보호시설 연계, 스마트워치 대여 등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2일 더불어민주당 오영환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지난해 피해자가 임시숙소를 제공받은 사례는 185건에 그쳤다. 임시숙소는 최대 5일밖에 머무를 수 없고, 가해자가 구속되지 않으면 기존 거처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임예윤 서울서부범죄피해자지원센터 사무처장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최대한 오랜 기간 안정적인 거처를 꾸려야 하는데, 고작 5일 비워두는 건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스마트워치 역시 실효성이 의심된다. 스마트워치 지급은 지난해 1만4208건으로 4년 전(5243건)에 견줘 2.7배 늘었다. 하지만 위치값의 오차범위가 50m 이내여서 건물이 밀집된 지역에선 피해자의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다. 2021년 11월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여성은 직전에 스마트워치로 경찰을 호출했지만,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신변 경호와 전문 보호시설 연계도 예산과 인력 부족 탓에 매년 10~20건 수준에 그칠 정도다.
법무부가 운영하는 ‘범죄 피해자에 대한 통지 제도’도 피해자 친화적이지 않다. 이 제도는 피해자에게 사건의 처분 결과, 공판의 일시·장소, 재판 결과, 가해자의 구속·석방 등 구금에 관한 사실, 출소 등의 상황을 통지해준다. 다만 피해자가 신청해야 한다. 제도의 존재조차 모르는 피해자가 다수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피해자가 신청하지 않아도 통지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며 “하지만 법무부는 관련 통계조차 제대로 집계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가정폭력 피해자인 정아무개(30)씨. 지난달 3일 서울 성동구에 있는 한국피해자지원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중학생 때부터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다고 말했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반복 폭행이나 보복 범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적 자립도 쉽지 않다. 정아무개(30)씨는 아버지에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매주 서너번 이상 맞았다”고 했다. 경찰에도 여러차례 신고했지만, 경찰은 “사이좋게 지내라”고 훈계하거나 아버지 말만 듣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집에서 ‘탈출’하려 해도 경제적 능력이 없었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가족이어서 범죄 피해자들을 돕는 경제적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범죄 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 업무처리 지침’(대검찰청 예규)을 보면, ‘경제적 지원의 실질적 수혜자가 가해자로 귀착될 우려가 없을 것’이라는 조항이 있다.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가 친족 관계’이면 범죄로 사망하거나 장해·중상해를 입을 경우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범죄피해구조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씨는 성인이 되고 한참 뒤인 26살이 되어서야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뒤 과외 등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었다.
이윤호 동국대 명예교수(경찰행정학)는 “외국에선 가해자에게 거듭 범행을 당할 가능성이 큰 피해자의 주거지를 옮겨주거나 이름, 직업 등을 바꿔주기도 한다”며 “보다 폭넓은 피해자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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