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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전세대출 사기 피해자 손들어준 법원…“금융사 책임”

등록 2023-04-24 08:00수정 2023-04-24 19:23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금융기관이 본인 확인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명의를 도용당한 이에게 대출을 해줬다면, 대출금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자기 명의로 대출 신청이 됐는지도 모르다가 난데없는 대출금 상환 요구를 받은 전세대출 사기 사건 피해자 중 1명의 2심 법원 판단인데, 다른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서울고등법원 제34-3민사부(재판장 권혁중)는 금융회사 오릭스캐피탈코리아(오릭스)와 계약을 맺은 대출모집인으로부터 명의를 도용당해 전세자금 2억원을 빚진 ㄱ(33)씨를 상대로 오릭스가 낸 대출금 반환 소송에서 1심을 뒤집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24일 밝혔다. 재판부는 “금융기관은 전세자금 대출 실행 이전에 고객에게 본인 여부, 대출계약의 중요사항 등을 직접 확인해야 하는데 오릭스는 대출모집인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전화해 ‘네’ ‘아니오’ 등 형식적인 확인을 구하거나 서류 심사만으로 대출을 승인했다”며 “금융실명법상 본인 확인 의무와 대출모집인을 사용할 때 지켜야 할 금융기관으로서의 주의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대출모집인이란 금융회사와 대출모집업무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대출 신청상담, 신청서 접수 및 전달 등 금융회사가 위탁한 업무를 수행하는 대출상담사와 대출모집법인을 뜻한다. 금융회사는 이들을 활용해 영업망이 크게 확장된는 효과를 얻는다. 금융위원회는 과잉·불건전 대출이 생겨나지 않도록 금융회사가 대출모집인에 대한 사전교육과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도록 하고, 대출 약정 시 본인 확인 절차를 엄격히 하도록 규정한다(대출모집인 모범규준).

■“전세 끝나면 아파트 살 수 있다” 유혹

“인생이 망해버렸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제가 받지도 않은 대출 때문에 집도, 돈도, 직장도, 여자친구도, 건강도 모두 잃었으니까요.”

30대 초반에 3억원 가까운 빚을 떠안게 된 ㄱ씨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2019년 대출모집인 일당에게 개인 정보 등을 제공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행동이지만 사회 초년생이라 정보에 어두웠고 큰 이득이 된다는 생각에 넘어갔어요.” ㄱ씨는 오릭스가 제기한 대여금 소송비용과 이자 등으로 이미 2천만원을 썼다.

대학을 졸업하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던 ㄱ씨는 고등학교 동창생을 통해 대출모집인을 만났다. 금융회사 직원이라고 소개한 대출모집인은 2억2천만원의 전세자금의 이자를 모두 본인들이 부담하겠다고 했다. ‘현재 미분양 상태인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건설회사와 제휴를 맺었다. 전세계약이 끝나면 아파트는 전세계약 만료일 당시 시장가의 70%로 매입이 가능하다. 차익 30% 중 10%를 우리에게 달라’는 게 그들의 요구였다.

집 겸 사무실 공간이 필요했던 ㄱ씨는 대출모집인의 말을 믿고 도장, 신분증, 통장 등을 넘겨 경기도의 한 아파트와 전세계약을 맺었다. 대출모집인은 전세자금을 ㄱ씨의 명의로 한 보험회사에서 빌렸다. 여기까지는 정상 대출이었다.

문제는 대출모집인이 전세자금 대출을 받은 게 ‘한 건’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일주일 뒤 ㄱ씨 이름으로 오릭스로부터 2억원가량을 또 대출받았다. 전세 계약서, 임대인 명의 확인서, 전세자금 대출 약정서 등 대출 서류는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오릭스는 위조 대출 서류에 적힌 휴대전화로 전화해 형식적인 본인 확인 절차 등만을 거친 뒤 ㄱ씨 명의 계좌에 2억원가량을 입금했다. 이들은 이 돈을 바로 빼돌렸다. ㄱ씨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

이들은 같은 수법으로 2018년 10월부터 2019년 8월까지 오릭스에서 16회에 걸쳐 34억원을, 2019년 10월부터 2020년 4월까지 신한캐피탈에서 57회에 걸쳐 119억여원을 받아 가로챘다. 대출모집인 일당은 사기죄, 사문서위조죄 등으로 기소돼 징역 2~3년형을 받았다.

■금융기관 승소 판결 뒤집은 2심

오릭스와 신한캐피탈은 명의를 도용당한 피해자들에게 일제히 민사소송을 걸었다. 대출모집인 일당과 공범으로 의심된다며 고소도 했다. 수사 결과 피해자들은 대출모집인과 공모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민사소송이 문제였다. 피해자 대부분은 형편이 어려워 소송에 대처하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게 자기 이름으로 발생한 대출 수억원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일부 피해자만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했다. 하지만 법원은 피해자에게 대출금 100%(2억여원)를 갚으라고 했다.(오릭스 사건) 금융회사의 책임을 인정한 경우에도 피해자 역시 책임이 있다며 15%(3천만원)를 갚으라고 판결했다.(신한캐피탈 사건)

ㄱ씨도 1심에서는 패소했다. 재판부는 “모집대출인이 ㄱ씨 명의의 휴대전화를 갖고 있으면서 허위로 대출 의사를 확인해줬다 하더라도 오릭스가 이러한 상황까지 예상할 수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ㄱ씨가 대출금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모두 갚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심이 이를 뒤집었다. 재판부는 “ㄱ씨는 전세보증금을 일시불로 지불하고 입주한 상태였다. 입주 일주일 후 전세자금 대출 신청이 접수됐는데, 이러한 방식은 매우 이례적일 뿐 아니라 불법·부당대출로 악용될 소지가 크다”며 “오릭스가 대출계약 체결 과정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했다면 이중대출이 이뤄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피해자 30여명을 대리한 임자운 변호사는 “피해자들을 상대로 제기한 대출금 반환소송에서 법원이 오릭스의 책임을 100% 물은 것은 처음”이라며 “금융회사의 책임을 상세히 들여다본 재판부의 태도가 다른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대출모집인을 이용해 추가 영업이익을 챙기면서 이로 인한 피해는 명의도용 피해자에게 다 묻겠다는 금융기관은 반성하고, 금융감독원 등 정부는 이를 엄격하게 감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승소 판결을 받은 ㄱ씨는 “저와 같은 피해자 중 1·2심 모두 패소해 개인회생이나 파산을 알아보는 다른 피해자에게 소식을 정했더니 크게 안도했다”며 “앞으로 금융기관에서 직접 본인을 확인하는 의무 장치가 마련돼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권지담 기자 gon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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