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이 연금개혁 논의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연금·노동·교육을 3대 개혁과제로 제시한 현 정부에서 주로 국민연금 중심으로 이뤄지던 연금개혁 논의 폭이 넓어지는 모양새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민간자문위원회는 최근 위원 4명을 추가해 ‘2기 활동’에 들어가면서 핵심 논의과제 중 하나에 퇴직연금을 포함했다. 김연명∙김용하 공동위원장은 지난 17일 향후 민간자문위에서 논의할 주요 과제를 연금특위에 보고했는데, 이들 과제 중에 ‘퇴직연금에 대한 분석’이 들어갔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민간자문위 1기 땐 퇴직연금을 의제로 올리긴 했으나 의미 있는 합의는 물론 구체적인 협의 과정조차 없었다.
김연명 민간자문위 공동위원장은 23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퇴직연금이 연금 개혁 논의의 공식 테이블에 올라 본격 논의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퇴직연금 관련 주요 논의 내용은 △퇴직연금 가입 및 수급 실태 △운용수익률 제고 방안 △노후소득보장 강화를 위한 여러 개혁방안 타당성 △제도화 장해요인 등으로 집약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물론 노동계∙학계 등의 퇴직연금 논의도 잇따라 이어진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지난 16일 전문가와 노동계 등이 참여한 내부 포럼을 열었다. 17일엔 한국노총∙민주노총이 참여연대와 함께 ‘퇴직연금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진단과 평가’ 좌담회를 개최했다.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함께 퇴직연금을 놓고 본격 논의를 벌인 것은 이례적이고 주목할 움직임이다. 양대 노총은 특히 그동안 퇴직연금을 두고 대체로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왔다. 또 이달 25일에는 한국연금학회가 2023춘계학술대회 기획주제 세션((한국연금개혁의 선택과 전망)에서 퇴직연금을 놓고 토론한다.
퇴직연금이 연금개혁 논의에서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떠오르는 배경은 자명하다. 우선, 국회 연금특위의 연금개혁 논의가 당초 ‘모수 개혁’(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의 세부 조정)에서 구조개혁(국민연금제도 구조 변경 및 제도의 기능과 역할 재정립)으로 확대된 게 표면적인 이유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퇴직연금이 국민연금과 비슷할 정도로 높은 보험료(급여의 8.3%·사용자 부담)와 296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적립금(2021년 말 현재)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노후소득보장 기능을 보완하는 본래의 목적에 걸맞은 기능을 여전히 못 하기 때문이다.
5월17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열린 ‘퇴직연금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진단과 평가’ 좌담회에 참석한 전문가와 노동계 인사들이 퇴직연금이 국민연금과 함께 국민의 노후 소득 보장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한국노총 제공
퇴직연금의 뿌리는 1961년 시행한 ‘사후보상적 후불임금’ 성격의 퇴직금이다. 그런데 퇴직금은 기업도산 등 여러 이유로 제때 지급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에 2005년 ‘근로자 퇴직급여보장법’을 제정해 도입한 게 퇴직연금제도다. 고용노동부는 “근로자들의 노후생활 보장을 위해 재직 기간에 사용자가 근로자의 퇴직급여(퇴직금)를 금융기관에 적립하고, 이 적립금을 사용자(확정급여·DB) 또는 근로자(확정 기여·DC)가 운용하다가 55살 이후에 연금 또는 일시금 형태로 받도록 한 제도”라고 설명한다.
정부는 퇴직연금 제도 도입으로 국내 연금체계도 국민연금·개인연금과 함께 다층 연금체계를 갖췄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실상은 퇴직연금 제도는 연금으로서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한다. 대다수 노동자는 이 제도를 과거처럼 일시금으로 받는 ‘퇴직금’으로 여기는 데다, 2020년 말 현재 가입 대상자의 절반인 664만여명(52.4%)만 가입한 탓이다.
우선 퇴직연금에 가입한 노동자 대부분은 이를 연금이 아닌 일시금으로 수령한다. 2020년 퇴직연금 통계를 보면, 전체 퇴직연금 계좌 중 연금으로 수령한 비중은 고작 3.3%에 불과했다. 96.7%가 일시금으로 받았다는 얘기다. 중도인출이 폭넓게 허용돼 많은 이들이 주택구매 등 자금으로 중도 해지하는 게 현실이다. 이는 사망 때까지 받는 국민연금과 달리 퇴직연금은 종신연금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료: 퇴직연금과 국민연금 수익률 비교(2011~2020년, 정창률 단국대 교수)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제한된 가입자도 문제다. 1년 미만 가입자, 주 15시간 미만 노동자, 특수형태근로자 등은 아예 퇴직연금에서 배제돼 있다. 전체 임금노동자 2045만명을 기준으로 보면 가입자가 30%에 미치지 못한다. 가입자도 대기업 노동자가 중심이다. 300인 이상 사업체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90.8%이지만, 5인 미만 사업체는 도입률이 10.6% 수준에 그친다.
막대한 적립금에 견줘 운용 수익률이 낮지만, 수수료가 높은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수익률 논란이 이어지는 국민연금에 견줘도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턱없이 낮다. 지난 2016∼2020년 기준, 국민연금 수익률이 6.6%인데 반해 퇴직연금 수익률은 3% 미만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연금 운용기관인 은행∙보험∙증권 등 금융기관이 챙겨가는 운용관리 수수료는 0.1%에 이른다. 금융감독원 공시를 보면, 2020년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가져간 수수료 총액은 1조773억원에 이른다. 전체 퇴직연금 수익 6조원(추정)의 18%에 이르는 규모다.
퇴직연금 전문가인 정창률 단국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제도 도입이 20년 넘도록 국민연금 못지않은 보험료를 내면서도 어느 노동자도 퇴직연금을 노후소득 보장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는 제도를 성공적이라고 하기 어렵다”며 “퇴직연금이 공적연금을 보완하는 제도로서 구실을 다하도록 중장기 방안에 대한 검토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퇴직연금 말고 2기 자문위에서 검토할 주요 연금개혁 과제는 △적립기금 고갈에 대비한 국민연금 재정방식 △지속가능한 노후소득보장을 위한 보험료율∙소득대체율 조정안 △국민연금기금 수익률 제고 방안 등이다. 모두 연금개혁의 뜨거운 쟁점이다.
이창곤 선임기자
g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