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없는축구회 소속 여자 고등학생팀 선수들과 코치가 지난달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국제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리그 경기 도중 작전 회의를 하고 있다. 오클랜드/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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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를 형용하는 말의 스펙트럼은 광대하다. 가장 극단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문장이 있다. 그는 2020년 <폭스 뉴스> 인터뷰에서 시카고, 볼티모어, 디트로이트에 오클랜드를 싸잡아 “
지옥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범죄율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대편에서는 흑인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 수상 시인인 앨리스 워커가 ‘러빙 오클랜드’(2016)라는 시를 썼다. 여기서 그는 오클랜드를 “도시 낙원”(Urban Paradise)이라고 불렀다.
워커의 시를 알려준 건 ‘국경없는축구회’(SWB)의 프로그램 매니저 예테 소(31)다. 지난달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국제고등학교 축구장에서 만난 그는 기자의 표정이 아리송해 보였는지 한 문장 더 인용하며 오클랜드의 아름다움에 대해 부연했다. “어느 코미디언이 오클랜드를 이렇게 표현했어요. ‘콘로’(머리카락을 옥수수처럼 땋아 붙인 흑인 문화의 헤어스타일)를 한 아시아인이 스페인어로 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도시라고. 정말이지 맞는 말이죠.”
오클랜드는 미국인들도 손에 꼽는 ‘샐러드볼’ 도시다. 2020년 기준 인구(약 42만명)의 28%가 백인, 27%가 히스패닉, 23%가 흑인, 16%가 아시아인이다. 전체 인구의 26.5%가 미국 바깥에서 태어난 이주민으로 미국 전체 평균(13.5%)의 두배에 근접한다. 물리적 규모가 비등한 인종별 세력도에 해묵은 빈부 격차가 얹히면서 이 시너지는 치안 문제를 야기하는 한편,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국경없는축구회 역시 그 산물 중 하나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이름을 가져온 이 조직은 2005년 발족한 비영리단체다. 새 정착지에 다다른 이주민 청소년 다수가 빠짐없이 맞닥뜨리는 곤혹, 고독과 무력감을 해소하고자 설립됐다. ‘더 나은 삶’을 좇아 기회의 땅을 찾아왔지만, 정작 아이들에게는 삶을 경작할 도구가 없다. 언어(영어)도, 돈도, 네트워크도 없다. 대부분 속절없이 방 안에 틀어박혀 시간을 견디곤 한다. 국경없는축구회는 그들을 일단 운동장에 불러 모으기로 했다. 2006년 오클랜드 공터에 첫 축구 캠프가 차려졌다.
첫날 20명 남짓한 학생들로 시작한 캠프는 17년이 흐른 현재, 오클랜드를 비롯한 미국 내 4개 도시와 니카라과, 우간다에 거점을 둔 국제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지난 한해 축구회 프로그램을 거쳐 간 청소년은 4324명에 이른다. 이들은 서로 다른 65개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47가지 모국어를 사용한다. 방학 기간 여름 캠프를 체험하기도 하고, 시즌 내내 팀원들과 방과후 훈련에 매진하며 주말 리그를 치르기도 한다. 비용은 전부 무료이고, 모든 장비와 교통편이 제공된다.
국경없는축구회 공동설립자이자 오클랜드 지부 대표인 벤 구차르디. 구차르디 대표는 대학 때까지 축구선수로 뛰다가 사회 활동가로 전향했다. 오클랜드/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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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축구회가 특별한 이유는 축구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조직은 축구를 창구 삼아 공동체에 두개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첫째는 축구-교육-지역사회의 고리다. ‘팀’(TEAM)이라고 이름 붙인 국경없는축구회의 정규 프로그램에는 축구 연습뿐 아니라 튜터링, 학교 숙제 지원, 영어 교육, 수학여행, 멘토링, 리더십 교육 등이 포함된다. 국경없는축구회 공동설립자이자 오클랜드 지부 대표인 벤 구차르디(39)는 지난달 16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축구와 학업 사이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다. 축구와 학업이 더 많이 연결될수록 학생들은 지역사회와도 더 폭넓게 교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오클랜드 지역 학교들의 고민 중 하나는 낮은 출석률과 졸업률이다. 이는 만성적인 현상으로
인종에 따른 격차가 크다. 오클랜드 지역 백인 학생의 고등학교 졸업률(2020년 기준)은 91%에 이르지만 흑인 학생은 77.97%, 히스패닉 학생은 51.57%까지 떨어진다. 반면 축구 프로그램을 통해 친구를 사귀고 세상과 만난 아이들은 개근할 확률이 높아지고, 졸업률도 높아진다는 것이 구차르디 대표의 설명이다. 국경없는축구회가
보고서를 통해 밝힌 프로그램 참여 학생의 고등학교 졸업률은 무려 95%다.
구차르디 대표는 축구팀에서 시작된 소속감이 학교에서의 소속감, 지역사회에서의 소속감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학생들이 소속감을 느끼고, 친구가 있다고 느끼길 바란다. 훈련하러 학교에 오면서 ‘오늘 하루 재밌게 지낼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느끼길 바란다. 그렇게 스스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투표, 봉사활동 등 사회활동 참여율도 높아진다. 이민자들을 고립시키고, ‘여기는 너희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미국인이 많지만, 저희는 그 반대를 원한다”고 했다.
국경없는축구회 졸업생 출신 코치 노로아 스와(왼쪽)가 가르치는 남자 중학생팀 선수들. 올 시즌 소속 리그에서 한 경기를 덜 치르고도 우승을 확정했다. 오클랜드/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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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학생-졸업생-코치의 고리다. 국경없는축구회 프로그램을 수료한 졸업생 중 상당수는 다시 자원봉사자나 코치가 되어 이곳으로 돌아온다. 지난해 기준 국경없는축구회 직원은 99명 중 32%가 프로그램
졸업생 출신이다.
오클랜드 지부로 한정하면 코치진의 42%가 졸업생 출신이다. 구차르디 대표는 이 숫자를 가장 큰 성취로 꼽으면서 “참여한 아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좋아하고, 다시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어 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프로그램 매니저 소는 그 상징적인 인물이다. 23년 전 타이의 난민 캠프에서 오클랜드로 건너온 버마(미얀마) 난민 출신 이주민으로, 2009년 고등학생 때 국경없는축구회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단체와 연을 맺었다. 이후 소는 대학에서 세미프로 축구선수로 활동하다가 국경없는축구회로 돌아왔고, 코치를 거쳐 매니저까지 승진했다. 그는 “오클랜드와 마찬가지로 국경없는축구회 역시 저의 고향”이라며 “커뮤니티를 위한 선행을 하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국경없는축구회 남자 중학생팀 연령대의 모든 선수가 지난달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국제고등학교 강당에 모여 시즌 졸업식을 치르고 있다. 오클랜드/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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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축구회 오클랜드 지부가 자리한 오클랜드 국제고등학교를 찾은 지난달 18일은 분주한 날이었다. 강당에서는 남자 중학생팀 선수들의 한 시즌을 정리하는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생 출신 코치 노로아 스와(타이)가 지도하는 팀의 17명 선수들이 수상을 위해 단상에 올랐다. 소속 리그에서 한 경기를 덜 치르고도 우승을 확정한 점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스와의 팀은 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엘살바도르 등 10개 이상의 국적을 가진 선수로 구성된, 국경없는축구회를 통틀어 가장 다국적인 팀이기도 했다. 코치들은 우승 사실과 더불어 이 다양성에 자부심을 가지도록 콕 집어 포상했다.
같은 시간 운동장에서는 여자 고등학생팀의 리그 우승팀을 가리는 마지막 플레이오프 경기가 열렸다. 보스턴 토박이 출신 코치 아시 그레이엄은 영어로 “헤론, 공을 무서워하면 안 되지!”라고 외친 뒤 다시 스페인어로 “프레시온!”(presión·압박)을 연발했다. 한 골 뒤진 하프타임에는 스페인어와 영어가 뒤섞인 작전 회의가 맹렬하게 벌어졌다. ‘베이 에어리어’(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일대를 부르는 지명)의 찬란한 햇살이 드리운 그들의 축구장 위에 국경선은 보이지 않았다.
오클랜드/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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