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이주여성 배구단 유니버셜스타즈(아래)가 18일 경기도 안산 선부체육관에서 다른 안산 지역 여성 배구단 원픽과 친선경기를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파이팅 크게 외치고, 주눅 들지 말고, 할 수 있어!”
감독의 불호령에 선수들은 바짝 긴장한다. 평소 자애롭던 사령탑도 코트 위 승부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배구인’이다. 11-17까지 밀리던 팀은 연속 득점에 성공하며 16-17까지 상대를 따라잡는다. 든든히 받쳐주는 베테랑들과 점프력을 앞세워 득점을 노리는 두 대학생 콤비가 합작한 작품이다. 이대로라면 역전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상대가 매서운 서브로 코트를 폭격한다. 결국 먼저 21점을 내주며 1세트를 뺏긴다. 지난 18일 경기도 안산 선부체육관에서 열린 안산 이주여성 배구단 유니버셜스타즈의 친선경기 풍경이다.
유니버셜스타즈는 이날 다른 안산 지역 여성 배구단 원픽에 세트 스코어 0-3으로 완패했다. 패배는 언제나 쓰라리다. 하지만 타이 출신 순턴파닛 아피차(45)씨는 경기가 끝난 뒤 좌절하기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친선전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끊겼던 실전 경기를 다시 치를 수 있게 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3년 전 함께 맞췄던 유니폼을 이날에야 받아 본 아피차씨는 “오늘 우리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했다”면서도 “정말 오랜만에 배구 경기를 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만큼, 더 열심히 해야겠다”며 웃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모두를 괴롭혔지만, 이주민에게는 특히 가혹했다. 각 나라가 국경을 걸어 잠그며 하늘길이 막혔다. 누군가에겐 휴가철 국외 여행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바다 건너 한국 땅에 온 이주여성에겐 고향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각종 스포츠 활동도 멈췄다. 누군가에겐 야구장 직관 대신 티브이 중계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였지만, 아피차씨에겐 그 자체로 세상과의 단절처럼 느껴졌다. 그에겐 배구가 세상을 보는 창이고, 한국 사회와 자신을 잇는 다리였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아피차씨에게 이중, 삼중의 단절이었다.
유니버셜스타즈 순턴파닛 아피차(7번)씨가 18일 경기 안산 선부체육관에서 열린 원픽과의 친선경기에서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2016년 처음 배구단을 알게 됐을 때를 아피차씨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직장 동료 소개로 유니버셜스타즈를 알게 된 그는 뛸 듯이 기뻤다. 초등학생 때 배구를 시작해, 대학 시절에도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배구 사랑이 대단했던 그였다. 무엇보다 배구는 갈수록 좁아지던 아피차씨의 세계를 확장했다. 2004년 한국인 남편을 만난 그는 “결혼하고 바쁘게 사느라 세상이 어떻게 발전하고 돌아가는지 몰랐는데, 배구 덕분에 그런 부분을 알게 됐다”며 “같은 입장인 결혼 이민자를 만나서는 ‘아, 나만 있는 게 아니구나. 친구들이 있구나. 우리는 팀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안산에는 아피차씨처럼 스포츠에 참여하는 이주민이 유독 많다. 한때는 이주민 스포츠 동아리 수가 100개가 넘을 정도였다. 유니버셜스타즈 또한 2009년 창단해 벌써 15년째 코트를 누비고 있다. 팬데믹 발발 전인 2017년에는 지역 배구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동마다 여성 배구단이 있을 정도로 생활배구가 활성화되어 있고, 그 경쟁 또한 치열한 안산에서 대회 입상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스포츠 활동이 활발하다 보니, 인근 지역에 있는 다른 이주민도 소문을 듣고 안산에 있는 스포츠 동아리에 오려고 할 정도다.
물론 처음부터 일이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유니버셜스타즈 창단 초기부터 팀 지도를 맡아온 이소례 감독은 “처음에는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탓에 당황스러운 일도 많이 있었다”고 돌아봤다. 이 감독은 “초창기에 우리 팀에 피부색이 까만 친구가 있었는데, 친선전 때 상대 팀 선수가 그 친구와 악수를 하게 되자 놀라서 피하는 일도 생겼다”고 했다. 그는 또 “2013년에는 프로배구 올스타 선수들이 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이를 두고 일부 한국인 동호회 사이에서 ‘역차별’이라는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소례 유니버셜스타즈 감독(왼쪽)이 18일 경기도 안산 선부체육관에서 열린 원픽과의 친선경기에서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런 어려움에도 안산이 이주민 스포츠 천국으로 떠오른 건, 이소례 감독 같은 이들이 현장에서 꾸준히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편견 속에서도 상호 교류를 위해 선주민과 친선경기를 추진하는 등 둘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애써왔다. 지자체 역할도 컸다. 안산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외국인 정책을 본부급인 안산외국인주민지원본부가 맡는데, 이곳이 이주민 스포츠 허브 구실을 한다. 지원본부는 현재 배구단을 비롯해 케이팝댄스와 태권도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긴 시간 이주민 대상 스포츠를 육성해온 덕에, 안산에 사는 다른 선주민에게도 이주민과 함께 스포츠를 즐기는 건 익숙한 일이다. 이날 유니버셜스타즈와 맞붙었던 김예숙 원픽 회장은 “평소에도 외국인과 같이 운동을 많이 해서 크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며 “자주 이렇게 경기를 하며 서로 실력을 키워나가면 좋겠다”고 했다. 실제 원픽은 최근 “배구를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고등학교 1학년 이율리아(16)양을 영입했는데, 이양 역시 우즈베키스탄 배경을 가진 이주 청소년이다. 스포츠를 통한 자연스러운 공존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다만 이런 ‘안산형 모델’은 여전히 전국으로 확산하지 못하고 있다. 스포츠 역할을 메달 획득과 국위 선양에 한정하는 엘리트 체육 중심적 한국 사회 풍토 때문이다. 특히 이런 경향은 대한체육회로 스포츠 관련 업무가 몰리며 더욱 강해지고 있다. 실제 2010년 국민생활체육회는 전국에 약 130개 이주민 대상 생활체육교실을 열고 이를 중심 사업으로 삼았다. 하지만 2016년 국민생활체육회와 대한체육회가 통합한 뒤 해당 프로그램은 자취를 감췄다. 심지어 어떤 관련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그간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마저 모두 사라졌다. 현재 이 사업은 부산 등 몇몇 지역 체육회 차원에서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안산외국인주민지원본부가 운영하는 태권도 교실 출신 이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간 뒤 태권도 도장을 열고 한국 문화를 알린다. 현재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에 16개 도장이 운영 중이다. 사진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에 있는 태권도 도장 학생들. 안산외국인주민지원본부 제공
태권도 사범 출신으로 14년 동안 안산 지구촌 생활체육교실 프로그램을 전담해온 손희연 안산외국인주민지원본부 주무관은 이런 현실을 지적한다. 손 주무관은 “태권도 교실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에서 도장을 세워 한국 문화를 알리는 등 긍정적 측면이 많다. 하지만 엘리트 체육에 계신 분들은 ‘금메달을 따는 데 집중해야지 왜 그런 곳에 예산을 쓰느냐’고 말한다”고 했다. 여전히 엘리트 체육 일변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스포츠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한국보다 먼저 이주민 대상 스포츠가 대중화한 유럽 전문가들은 결국 사회적 차원에서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스포츠를 바라보는 철학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따라온다. 독일에서 공공 스포츠클럽과 사회 통합적 스포츠를 연구해온 크리스토프 브로이어 독일 쾰른 체육대 교수는 “지역 차원 접근은 실제 참가자들이 필요로 하는 걸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스포츠를 통한 사회 통합은) 결국 한 나라 정치 시스템과 문화에 달린 일”이라며 “국가 차원에서 전문성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고, 정교한 프로그램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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