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신상공개 확대 관련 법안을 추진 중인 가운데, 헌법재판소가 수사 단계에서의 성범죄자 신상 공개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이다. 유죄 확정 전 신상 공개가 피의자의 인격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텔레그램 ‘엔(n)번방’ 영상을 3천개 넘게 갖고 있던 ㄱ씨는 경찰이 2020년 7월 신상정보 공개를 결정하자 이에 불복해 소송을 냈다. ㄱ씨는 1심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2심을 맡은 서울고법 춘천재판부 행정1부(재판장 황승태)는 지난해 10월 직권으로 성폭력처벌법 제25조 1항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해당 조항은 ‘검사·사법경찰관은 성폭력 범죄 피의자가 죄를 범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고, 국민의 알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 방지 및 범죄 예방 등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얼굴, 성명 및 나이 등 피의자의 신상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헌법소원과 달리 위헌법률심판 제청은 법원이 헌법에 어긋날 수 있다고 먼저 판단한 것이기에 피의자 신상정보 공개 조항에 대한 헌재의 첫 판단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재판부는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며 성폭력 피의자에 대한 △무죄추정 원칙 위반 △공개 대상자와 신상 공개의 범위 △공개 기간과 방법 등을 문제로 꼽았다. 무죄추정 원칙 위반과 관련해 재판부는 “(이 법은)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 공개 대상자로 정함으로써 부정적인 이미지를 넘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유죄 판결의 확정 이전에 유죄의 낙인 효과까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공개 대상 범죄와 공개 대상자의 범위가 “매우 넓다”고 했다. 재판부는 “비교적 경미한 강제추행죄의 피의자도 공개 대상자가 될 수 있고 여론에 따라 비슷한 사안도 공개 여부가 달리 판단될 여지가 있다”고 했다.
신상 공개 정보의 범위도 재판부는 “‘등’이라는 용어가 사용돼 얼굴, 성명 및 나이 외 다른 신상정보, 예컨대 학력, 경력, 현재 직업, 주소도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공개 기간과 방법에 대한 아무런 규정이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유죄 확정 후 법원의 명령에 따라 공개하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조항과 비교해도 피의자 신상공개 제도가 지나치게 부실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절차 규정 없이 대상 정보(성범죄 피의자 신상)의 공개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사법경찰관의 결정에만 오롯이 맡겨 적법절차 원칙과 무죄추정 원칙, 과잉금지 원칙을 위반해 피의자의 인격권과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위헌 제청 이유를 밝혔다.
헌재의 결정은 정부 등이 현재 추진 중인 신상공개 확대 법률안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8일 정부와 여당은 중대범죄, 아동 대상 성범죄, ‘묻지마 폭력’ 범죄까지 신상공개를 하고, 수사 단계뿐만 아니라 기소 후까지 공개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ㄱ씨는 법원의 집행정지 결정 덕에 신상 공개는 피했지만, 엔번방 영상물 소지 등 혐의가 인정돼 2021년 징역 5년을 확정받았다.
이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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