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 부속 동물병원 아임도그너 헌혈센터에서 열린 헌혈견 은퇴식에서 헌혈견들이 서로 인사하고 있는 모습. 윤연정 기자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 부속 동물병원 아임도그너 헌혈센터 2층에 10여 마리의 대형견들이 모였다. 대형견들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서로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래브라도 리트리버부터 삽살개까지 여러 품종의 강아지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며 냄새를 맡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함께한 보호자들은 큰 대형견들을 자리에 앉히느라 애를 먹는 눈치였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연한 모습이었다.
이들이 모인 건 헌혈센터에서 특별한 은퇴식이 열렸기 때문이다. 다른 반려견에게 헌혈을 해주던 만 8살의 헌혈영웅 13마리가 여러 마리의 생명을 구하고 은퇴를 맞았다. 이번에 은퇴하는 13마리의 대형견들은 평균 헌혈을 2.15회 정도 했다. 이날 은퇴식에서는 이들의 은퇴를 기념한 메달 전달식과 은퇴견 보호자 발언식, ‘노즈워크 챔피언 게임‘, ‘발자국 롤링 페이퍼’ 등의 일정이 진행됐다.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 부속 동물병원 아임도그너 헌혈센터에서 열린 현혈견 은퇴식에 참석한 진주(8)는 총 4번 헌혈을 하면서 이번에 은퇴하는 헌혈견 가운데 많은 소형견들을 구한 헌혈영웅이다. 윤연정 기자
항상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는 8살 래브라도리트리버 ‘진주’는 2020년부터 매년 꾸준히 참여해 올해 4번째 헌혈을 끝으로 은퇴하게 됐다. 평택에서 올라온 진주의 보호자 김시연(43)씨는 “원래 아이가 워낙 온순해 식탐이 있어도 싸우지 않고 양보해주고 물러나 주는 성격이라서 말로 표현은 못 하지만, 아이의 성품으로 봐서는 아픈 친구들을 보면 돕겠다고 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며 참여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이제는 퇴행성 관절염과 척추 디스크가 생기고 있는데, 좋은 일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조금 더 편하게 쉬면서 수영도 하고 조금 더 오래 같이 잘 살고 싶다”고 말했다.
헌혈견 은퇴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주도에서 배 타고 올라온 이수연(42)씨도 이번에 은퇴하는 32kg의 골든 리트리버 러키(8)를 쓰다듬으면서 “은퇴식에 막상 참여하니까 너무 뭉클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대형견들은 갑자기 죽는 경우도 있고 그래서 기회가 될 때면 추억을 많이 남기려고 하는데, 아이가 나중에 떠나더라도 정말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다는 거 평생 마음에 자랑스럽게 품을 것”이라며 “조금 더 많은 다른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데다가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아이가 피를 뽑고 온 날에는 보양식 겸 북엇국을 해주는데 정말 잘 먹는다”고 말했다. 헌혈하면 따로 금전적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료 건강검진과 동물병원 진료비 할인, 위급상황 시 수혈비용을 면제받는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 부속 동물병원 아임도그너 헌혈센터에서 열린 헌혈견 은퇴식에서 지난해부터 헌혈을 두 번 한 럭키(8)와 보호자 이수연(42)씨가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윤연정 기자
반려동물이 헌혈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여러 자격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먼저 25kg 이상의 대형견만 참여가 가능하고, 나이는 만 1살에서 8살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번 채혈할 때 320mL 혹은 400mL 정도 뽑는데, 이는 소형견 3~4마리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용량이다. 전염성질환을 앓은 이력이 없고, 매달 심장사상충과 구충예방약을 복용해야 참여할 수 있다.
최희재 건국대학교 부속동물병원 수의사는 “법적으로 따라야 하는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 참여 자격 조건은 기관마다 다르지만, 미국의 캘리포니아주법인 ‘애니멀 블러드뱅크 법안’이 제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어 저희는 이를 많이 참조하고 있다”며 “공혈견으로부터 받은 피보다 현헐센터에서 수혈하는 피의 혈구 수치가 훨씬 더 높게 나오고 혈액형도 더 정확하게 나온다”고 말했다.
반면 피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육되는 공혈견은 체중 기준이 13kg 이상에 불과하고 한달에 3번까지도 채혈하고 있어 몸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최 수의사는 “(이렇게 채혈된 피는) 수혈받는 동물한테도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채혈한 피는 사고를 당하거나, 빈혈이 있거나 응고 장애 등 조혈기능에 문제가 생겼을 때 활용된다.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건국대 부속 동물병원 아임도그너 헌혈센터에서 열린 헌혈견 은퇴식에서 은퇴견과 보호자, 내외빈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윤연정 기자
아임도그너 헌혈센터는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혈액 공급용으로만 길러지는 ‘공혈견’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됐다. 지난해 여름 건국대 부속 동물병원 산하에 개소한 아임도그너 헌혈센터는 아시아 최초 반려동물 헌혈센터다. 아임도그너 헌혈센터는 “1년여간 약 200마리의 헌혈견이 참여해 300여 마리의 생명을 살렸다”고 밝혔다. ‘아임도그너’의 ‘DOgNOR’는 개(Dog)와 기부자(Donor)의 합성어로 수혈이 필요한 개들을 위해 헌혈에 참여하는 헌혈견을 의미하며, 반려견 헌혈 캠페인 이름이기도 하다. 윤헌영 건국대 동물병원장은 “반려동물 헌혈에 동참해준 헌혈 영웅들의 발자취는 공혈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동물 권익과 동물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