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18일 오전 서울 신당역 화장실 들머리에 마련된 추모의 공간이 추모의 메시지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사진은 여성화장실 표시와 메시지를 다중노출기법으로 찍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ㄱ씨는 남편 ㄴ씨와 2년 전 이혼했다. 전남편은 이혼 뒤에도 ㄱ씨에게 동거를 요구하는 등 일방적으로 연락했다. ㄱ씨는 “이혼까지 했는데 왜 괴롭히냐. 더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전남편은 ㄱ씨가 일하는 가게 주변을 서성이거나, ‘살 물건이 있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등 ㄱ씨에게 5개월 동안 20여 차례 접근했다.
참지 못한 ㄱ씨는 전남편을 경찰에 신고했고,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대신 법원은 전남편 ㄴ씨에게 ㄱ씨 집과 직장 100m 이내 접근금지, ㄱ씨에게 연락금지라는 잠정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ㄴ씨는 법원 결정을 어기고 ㄱ씨 집을 침입했다. 접근금지·연락금지라는 잠정조치로는 ㄱ씨를 보호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던 셈이다.
20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5대 폭력 대응정책 쟁점과 향후 과제’를 주제로 개최한 양성평등정책포럼에서는 스토킹 범죄에 대한 법원의 소극적인 판단이 지적됐다.
먼저 한민경 경찰대학 교수는 법원이 스토킹 피해자와 가해자를 적극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스토킹 가해자가) 잠정조치를 이행하지 않거나 스토킹 범죄를 계속 이어가는 사례가 다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법원이 스토킹 가해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 유치장·구치소 유치도 결정되지 않는다”며 “스토킹 가해자와 피해자를 물리적·공간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지만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법원은 스토킹 처벌법에 따라 가해자에게 △유치장·구치소 유치 △피해자 주거 등으로부터 100m 이내 접근 금지 △피해자에게 연락 금지 등의 잠정조치를 할 수 있는데, 접근금지 같은 소극적 판단만 한다는 뜻이다.
실제 스토킹 피의자에 대한 법원의 유지창·구치소 유치 결정률은 절반에 못 미친다. 스토킹 처벌법(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2021년 10월21일부터 지난해 7월까지 법원이 유치 결정을 한 비율은 43.2%(486건 중 210건)다. 반면 가해자가 마음만 먹으면 피해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100m 이내 접근 및 연락 금지’에 해당하는 잠정조치 인용률은 84.7%(4932건 중 4177건)나 된다.
내년 1월12일부터 법원 판결 전 가해자에게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를 부착할 수 있도록 한 스토킹 처벌법 개정안이 시행된다. 한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가해자의 접근 금지 위반 여부는 확인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물리적·공간적으로 분리하는 조치가 아니라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재범 우려가 크고 강력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법원이 인지하지 못한다면 피해자 보호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핵심은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이 사건의 위험성을 (제대로) 볼 수 있는가, 경찰부터 검찰, 법원까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일관성 있는 대처를 할 수 있는가에 있다”며 “수사·사법기관의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법원행정처는 지난해
‘스토킹 방지법안’(스토킹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 국회 심사 과정에서 수사기관과 마찬가지로 재판기관도 스토킹 사건 담당자를 대상으로 스토킹 예방교육을 하도록 의무화한 규정에 대해 “재판의 공정성, 중립성, 독립성을 침해할 수 있다”며 반대한 바 있다. 이 때문에 법원을 스토킹 예방교육 실시 의무 기관으로 규정한 조항은 빠진 채 법안이 통과됐다.
오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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