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장군 홍범도’(한길사)를 쓴 이동순 시인의 모습. 한길사 제공
“흉상을 철거하려면 아예 녹여서 땅에 묻어버리거나 홍범도 장군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시기 바란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독하게 살다가 어렵게 귀국한 어른에 대해 이렇게 모욕을 주고 땅에 팽개치고 손상을 주는 일은 우리 후손들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40년간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행적을 연구해온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시인)가 육군사관학교(육사) 교정 안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려는 육사와 국방부 등의 주장을 향해 “얼토당토않고,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30일 문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나와 “온몸을 바쳐 전 가족까지 구국 활동에 바친 홍범도 장군을 왜 이렇게 난도질하고 매도하느냐”고 한탄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교수는 지난 3월 ‘민족운동가 홍범도’라는 평전을 출간한 바 있고, 최근엔
‘내가 돌아오지 말걸’이라는 홍범도 장군 관련 시를 발표했다.
국방부가 지난 28일 발표한 ‘육사의 홍범도 장군 흉상 관련 국방부 입장’을 보면, 국방부 등은 홍범도의 이력 가운데 △자유시 참변에 연루됐다는 의혹 △봉오동·청산리 전투 때 빨치산으로서 참가했다는 의혹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사실 등을 근거로 홍범도의 흉상 이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쟁점과 관련해 이 교수는 자신이 연구한 바를 밝히며 사실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자유시 참변 당시 홍 장군은 통곡”
먼저 자유시 참변에 연루됐다는 의혹과 관련해서 이 교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그 당시에는 홍범도 장군은 잠깐 무슨 회의에 참석한다고 이르쿠츠크로 떠났다”며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연관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자유시 참변이란,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한국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1920년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이를 피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위성국가인 극동공화국 내 자유시(자유라는 뜻의 ‘스노보드니’)에 집결해 통합부대를 결성하려 했다.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 들머리에서 29일 오후 육군사관학교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 교수에 따르면, 당시 자유시엔 1700명 가량이 독립군이 도착했고 총기를 휴대한 군인들이 진입하다 보니 자유시 시민들은 위협감을 느꼈다. 총기를 반납해달는 요청이 독립군에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 조직은 무기를 일단 반납하자는 이르쿠츠크파(고려혁명군)와 무기를 끝까지 반납할 수 없다는 상하이파(대한의용군)로 나뉘었다. 두 정파 간의 갈등 속에서 극동공화국 군대가 이르쿠츠파를 앞세워서 상하이파를 공격해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는 한국 무장독립전사상 비극적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수는 “(역사 기록을 보면)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 소식을 듣고 황급히 와보니 길가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고 어마어마한 동족상쟁이 발생해 통곡하면서 뒷수습을 했다”며 “당시 독립군 600명이 생포되는데, 홍 장군은 감옥에 갇힌 독립군들의 죄의 경중을 가리는 재판관을 스스로 자청해서 참석했고, 어떻게든 그 독립군들을 석방시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최종적으로 한 30명이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다 석방이 됐다”고 밝혔다.
‘홍 장군이 소련 정부에게 연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이력서에 자유시 참변 내용을 직접 기술했다’는 국방부 주장에 대해서도
“그 서류를 봤지만 그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홍범도 장군은 고려독립 의병대 38년, 28년 이런 식의 짧은 문장은 작성할 수 있어도 어떤 내용을 길게 무엇을 쓸 수 있는 문장 구사 능력이 없다.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잘라 말했다.
“국방부가 빨치산 개념 잘못 이해”
빨치산 의혹과 관련해서는 이 교수는 국방부가 빨치산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빨치산이라고 하는 것은 제정 러시아 정부의 군대와 싸우던 모든 볼셰비키 군대를 일컫는다”며 “우리가 지리산 빨치산이라고 말하는, 인민군들이 지리산 깊숙이 숨어들어서 끝까지 활동한 그 빨치산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말했다. 당시 홍범도 장군을 빨치산이라고 불렀던 것은 제국주의로 인해 고통을 받는 민중을 구출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항일유격대’와 비슷한 의미로 빨치산이라고 불렀다는 것이 이 교수의 설명이다.
29일 오후 대전시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 묘역을 찾은 대전시민들이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소련 공산당 입당은 독립운동 전략”
마지막으로 소련공산당 입당 관련해서도 이 교수는 홍범도 장군이 표면적으로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맞지만, 그 이유가 소련의 무력을 활용해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겠다는 복안 차원이었다고 풀이했다. 홍범도 장군의 평생소원은 대한독립이었고, 빼앗긴 주권을 찾기 위해 전략적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홍범도 장군은 공산주의자입니까, 아닙니까?”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공산주의가 아니다”고 명확하게 밝혔다.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장군은 포수 출신이었고, 레닌 관련 책을 읽고 그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홍 장군이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연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입당원서를 내야 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이 교수는 “홍 장군이 공산주의자로 활동한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내놓아 보라”며 “두 아들과 아내까지도 나라에 바친 구국 투혼을 기리기 위해 이전 대통령들이 서훈했는데, 흉상을 철거하느니 마느니 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했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