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2월1일 구정대공세 기간 중 당시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현 호찌민) 거리에서 남베트남 치안국장 응우옌응옥로안이 체포돼 온 베트콩 용의자를 리볼버 권총으로 즉결처형하기 직전 모습이다. 이 사진은 세계로 타전돼 대대적인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를 촬영했던 AP통신 기자 에디 애덤스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AP 연합뉴스
전시에 재판 없는 즉결처분은 정말 가능한가?
최근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이 “전시에는 재판 없이 죽일 수 있다”는 말을 아무 거리낌없이 이어가고 있다. 10일 영천유족회원들과의 면담, 13일 국정감사, 17일 전체위원회에서 잇따라 즉결처분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김 위원장은 18일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18일 오후 국회 한 행사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김 위원장은 전시 즉결처분의 법적 근거를 묻자 “계엄법에 있다”고 답했다. “몇조 몇항이냐”고 재차 묻자 “계엄법을 다 읽어보라”고만 했다. “전 세계의 모든 계엄령은 전쟁이 발생하면 비상조치령과 계엄령이 발동되고, 계엄령이 발동되면 곧 군 지휘관이 사법권을 행사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가법령센터 누리집에 나오는
1949년 11월24일 시행된 계엄법 법령에 김 위원장이 말하는 조항은 없다. 당시 계엄법 제16조는 “비상계엄지역 내에 있어서는 군법회의에서 이를 재판하고, 계엄사령관은 당해 관할법원으로 하여금 이를 재판케 할 수 있다”면서 내란·외환의 죄를 비롯해 살인 및 방화죄 등을 열거하고 있다. 전시 계엄 하에서도 계엄법은 군법회의 재판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17일 제64차 전체위원회에서 “즉결처분이 곧 재판”이라고 말했다. 또 “계엄법에 다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즉결처분 조항은 군대 내에 국한해 육군본부 훈령으로 만들어졌다가 폐기된 적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총참모장 소장 정일권은 육본 훈령 제12호로 “명령 없이 전장 이탈할 시의 즉결처분권을 분대장급 이상에게 1950년 7월26일 0시부터 부여한다”고 하달했다. 훈령이란 상급부대의 지휘명령이다. 그러나 이 훈령은 1948년 7월5일 공포된 국방경비법과 1948년 11월30일 공포된 국군조직법, 그리고 앞에서 인용했던 1949년 시행된 계엄법 어디에도 근거가 없었다. 이처럼 헌법과 법률에 뿌리가 없는 즉결처분 훈령은 결국 1951년 7월10일 육본훈령 제191호에 의해 취소되었다. 게다가 이는 애초부터 민간인에게 적용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
1기 진실화해위는 2008년 10월 육본 훈령이 만들어지기 직전인 1950년 7월17일 작전명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적법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전장에서 총살당한 고 윤태현 소령(1919년생) 사건에 대해 “반인륜적 인권유린행위이며 위헌, 위법하다”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진실화해위는 윤태현 소령 총살 직후 만들어졌던 즉결처분 훈령에 대해서도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윤태현 소령은 상해임시정부 예하 광복군 출신으로 1948년 육사 7기(특별)를 거쳐 소위 임관한 뒤 1950년 4월 소령으로 진급해 한국전쟁기에 육군 8사단 21연대 1대대장으로 영주·풍기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연대본부 작전계획대로 제 위치를 사수하지 않고 여러 차례 뒤로 물러났다”는 이유로 1950년 7월17일 팬티 바람으로 구덩이 앞에서 헌병 2~3명에 의해 총살형을 당했다. 총살형은 일본군 소위 출신인 21연대장 김용배 중령(1923~2006)이 명령을 내린 결과였다.
1기 진실화해위는 김용배 중령이 윤태현 소령을 총살한 실제 이유에 대해 진실규명 보고서에서 “명령 불복종이 아니라 입대 전 출신 및 활동으로 인한 갈등, 개인감정 등이라는 의혹과 관련 서류도 사후에 조작 내지 폐기됐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확인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김용배 중령은 이후 승승장구해 1965년 4월부터 1966년 9월까지 제17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2008년 9월 대법원 2부는 한국전쟁 당시 적을 앞에 두고 도망쳤다는 누명을 쓴 채 즉결처분당한 허지홍(당시 28·육사 5기) 대위의 유족들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8월경에는 육군 8사단 16연대 김아무개 연대장이 대대장인 허지홍 대위를 즉결처분하고 그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허 대위가 육군 제1군단 고등군법회의에서 적을 앞에 두고 도망쳤다는 죄로 사형판결을 선고받은 것처럼 판결문을 위조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 사건 피해자 허 대위 유족에 대해서는 2008년 국가배상 판결이 내려졌다.
이 밖에도 즉결처분은 오남용된 사례가 많다. 육사 8기생들이 펴낸 ‘노병들의 증언’이라는 회고록에 따르면,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한 육사 8기생들은 한국전쟁 초반기에 소대장(중위)을 지냈는데 1345명의 동기생 중 전사하거나 실종된 사람이 419명이라고 한다. 희생자 중엔 적군이 아닌 상관에 의해 즉결처분된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가령 8사단 10연대 1대대 소속 김천만 중위는 1950년 7월4일경 원주와 제천 중간지점에서 인민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명령 없이 후퇴했다”는 이유로 연대장 고아무개 중령으로부터 즉결처분 선고를 받자 소지하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태윤기 변호사(1918~2012)는 1999년 10월 월간조선 기고에서 “즉결처분권은 사적 제재, 개인적 살인행위이며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면서도 “부하들을 지휘관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는 것보다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에게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전장 이탈을 하면 총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주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경고성 목적이 강했다”고 썼다. 그러나 실제 전쟁 시기엔 이러한 경고성 목적보다는 사적 제재로 과도하게 활용됐던 사례가 많았다.
어쨌든 육본의 즉결처분 훈령은 법률적 근거가 없어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1년 만에 사라졌고, 반인륜적 인권유린이었다는 오명만 남겼다. 한데 이에 대한 진실규명과 피해 복구를 지휘해야 할 위치에 있는 기관의 위원장이라는 자가 한술 더 떠 “전시 (적대세력에 가담한)민간인에 대한 즉결처분이 가능했다”면서 ‘학살의 사령관’ 같은 발언을 일삼고 있다.
18일 김광동 위원장은 한겨레와 만난 자리에서 “왜 가짜뉴스를 유포하느냐”는 지적에 대해 “(자신에 대해)모욕을 한다”며 “계엄법에 다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책임 있게 처신해야 할 고위 공직자가 대놓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모습이 놀랍고 섬뜩할 따름이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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