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 등이 연 기자회견에서 대구 지역 신탁주택 전세사기 피해자인 정태운 씨가 ‘신탁회사로부터 명도소송을 당했고 재판선고를 앞두고 있다며 강제퇴거 위기에놓였다’며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한 뒤 생각에 잠겨있다. 연합뉴스
“명도소송 결과로 15년 일해 마련한 집에서 내쫓기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도 이 집에서 살고, 죽어도 이 집에서 죽고 싶습니다.”
전세 사기 피해자 정태운(31)씨는 1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신탁 전세사기’ 대책을 요구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정씨는 2021년 8월 대구시 북구 84㎡(약 25평) 규모의 빌라에 대해 건물주인 ㅎ사와 보증금 1억원(월 35만원)을 주고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ㅎ사의 세금이 체납됐고, 지난 5월에는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정씨에게 집의 공매(압류자산 처분)를 알려왔다. 이때만해도 정씨는 보증금을 받을 수 있다고 안심했다. 하지만 갑자기 신협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매절차가 중단됐다.
문제는 정씨의 건물이 ‘신탁 건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신탁 건물은 건물 소유자에 담보대출을 해준 금융기관(이 경우 신협)이 근저당권을 설정하지 않고 담보재산 소유권을 신탁회사(KB부동산신탁)에 맡겨둔 경우다. 다시 말해 소유권은 ㅎ사가 아닌 신탁사인 KB부동산신탁에 있다는 뜻이다.
정씨는 계약 당시 ㅎ사로부터 관련 안내를 받지 못했고, 신탁 건물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정씨는 계약 권한이 없던 ㅎ사와 임대차 계약을 한 셈이었고, 정씨의 임대차 계약은 신탁회사에 대해서는 무효인 계약이었다. 이에 신협은 무권리자인 정씨에게 퇴거를 요청했다. 하지만 정씨는 퇴거에 응하지 않았고 신탁사가 지난 8월 세입자를 상대로 주택 인도 소송을 제기했다. 오는 17일 법원 판단에 따라 정씨는 집에서 쫓겨나게 될 수도 있다. 정씨를 포함해 ㅎ사와의 계약으로 피해를 본 총 17명이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들은 지난 6월부터 시행된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 특별법’으로도 보호되지 않는다. 애초에 무효인 임대차 계약으로 간주 돼 ‘임차인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경매와 공매 유예 대상에서도 벗어난다. 신탁 주택 문제는 정부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인 셈이다. 정씨는 “악랄한 기업(신탁사)이 특별법에 작은 구멍을 찾아서 그 구멍으로 피해자를 밀어 넣고 있다”며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태근 변호사는 신탁건물 사기에 대한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고 봤다. 주택세입자 법률지원센터 ‘세입자 114’ 운영위원장인 김 변호사는 “신탁사는 그간 집주인이 임대료를 받고 관리비를 받아 운영해 온 형태를 사실상 방치했다. 그런데 갑자기 ‘신탁회사의 사전 승낙’이 없었다는 이유로 세입자들에게 인도소송을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신탁회사도 사실상 전세 사기의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김 변호사는 “신탁원부 전세 계약은 신탁회사의 사전 승낙을 얻어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다. 이 규정을 근거로 신탁회사는 세입자들에게 자기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탁 전세사기의 구조”라며 “물론 대부분의 세입자들은 신탁원부라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고 지적했다.
곽진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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