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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 죄송” 불구 “여론 무마용” 눈총
“지배구조 근본적 개선방안 안보여” 지적
“지배구조 근본적 개선방안 안보여” 지적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과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비자금 조성과 편법 경영권 승계 의혹을 스스로 해소한다는 뜻으로 1조원 상당의 사재를 사회에 헌납하기로 했다. 검찰 소환을 앞두고 국민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 사법당국의 ‘선처’를 받아내려는 조처로 풀이된다.
이전갑 현대·기아차그룹 부회장은 19일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사과문을 통해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시가 1조원 상당의 글로비스 주식을 사회복지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정 회장 부자가 보유하고 있는 글로비스 주식 2250만주(60%)의 값어치는 이날 주가 하락으로 8천억원(7998억원) 정도로 줄었다.
이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은 한국 자동차산업 중흥을 위해 기업경영에만 전념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으나 사회적 기대와 국민 여러분 뜻에 부응하지 못한 점에 대해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다는 뜻을 밝혔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투명하고 윤리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약속도 했다. 사외이사와 외부전문가로 구성된 윤리위원회를 설치하고, 이사회 및 감사위원회 기능을 실질적으로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경영권 승계 문제와 관련해 “정의선 사장은 경영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고 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다. 능력 있는 경영자로 성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정의선 사장의 경영권 승계 노력은 지속될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정 회장 부자의 검찰 소환이 임박한 시점에 대국민 사과문이 나온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이 때문에 사과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다. 김상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한성대 교수)은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작업 등 문제를 야기한 지배구조 자체에 대한 근본적 개선방안이 보이지 않는다”며 “결국 총수 일가 소환을 앞두고 사법당국의 선처를 구하기 위해 ‘법치주의’를 돈으로 흥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돈을 내서 여론을 무마하는 것은 전근대적 해결방법”이라며 “잘못된 것은 고치고 안 하겠다고 해야 하는 것이지, 이런 행위를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현대차는 대국민 사과문은 ‘그룹 임직원 일동’ 명의로 나왔다. 하지만 사전에 사과문 내용을 안 그룹 임직원은 거의 없다. 오후엔 현대차 계열사와 부품업체 등 50여개 노조 간부 1천여명이 서울 양재동 본사로 몰려와 항의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사과문을 ‘정 회장 부자와 일부 비리 경영진들이 사법처리를 피하려고 내놓은 미봉책’으로 규정하고, 납품업체 단가인하 중단과 구체적인 투명경영 방안 제시 등을 촉구했다. 현대차가 사과문에서 한 약속들이 이들의 요구와 오버랩됐다.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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