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직전인 1980년 5월15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에 참여한 광주지역 대학생과 교수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행진하고 있다. 태극기를 든 이들 가운데 제일 앞줄에서 오른쪽 끝에 선 이가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 정경자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시민 곁 못지켜 부끄러움 간직”
수배 전력 투쟁 끝 임용됐지만
교사 한계 느끼고 기념사업회로
수배 전력 투쟁 끝 임용됐지만
교사 한계 느끼고 기념사업회로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
(17) 정경자 정경자(52). ‘5월 광주’를 생각할 때마다 그가 떠올리는 단어는 ‘부끄러움’이다. 그는 1980년 5월20일 가는 비가 추적거리던 나주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학생 지도부는 흩어지고, 시내는 계엄군에 장악되고, 정말 그대로 끝나는 줄 알았어요. 시민들이 그렇게 떨쳐 일어날 줄 알았다면 광주를 떠나진 않았을 텐데….” 당시 나주역은 검거 사슬을 피해 서울로 향하는 젊은이들로 넘쳤다. 택시 트렁크에 숨어온 전남대 의대생들도 있었다. “그때 그들과 서울에 가면 각자 위치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자’고 약속했는데 벌써 30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네요.” 5·18 당시 그는 전남대 총학생회 섭외부 차장이었다. 직함은 차장이지만 실제 임무는 여학생을 전담하는 조직 총책이었다. 5월18일 아침까지 그는 계엄군과 시민들의 충돌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점심께 아는 후배가 그의 자취방으로 찾아와 그날 아침 전남대 정문에서 벌어진 참상을 전해줬다. 상황을 알아보려고 시내로 나섰다. 그런데 한 복학생 선배가 택시를 타고 지나치며 “경자야, 빨리 피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그때만 해도 학생 운동권들은 일 터지면 몸을 피하는 게 배어 있었다”며 “광주 시민들과 함께 거리를 지키지 못한 게 평생을 두고 부끄러움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그가 숨은 곳은 경기도 수원과 서울 구로동 일대의 양서협동조합 식구들의 집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양서협동조합은 좋은 책을 나눠 읽을 수 있도록 협동서점을 만들어 운영하자는 운동으로 78년 4월 부산에서 시작됐다. 조합은 출범 뒤 자연스럽게 민주화운동 세력이 결집하는 공간으로 변했다. 5월21일 밤 수원양서조합의 한 조합원 집에서 조합 식구들과 대학생들이 모였다. 그는 눈물로 광주의 상황을 전했다. “제 얘길 쭉 듣더니 자기들끼리 회의를 해보겠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결국 저에게 인사를 안 하고 가시더라구요.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그땐 엄혹한 시대였으니까….” 거처를 옮겨 광주의 상황을 고발하는 전단을 인쇄할 작업실을 찾았다. 수원 지역 활동가들이 “아는 인쇄소를 찾았지만 이미 경찰이 다녀간 뒤다. 지금은 피할 때다”라고 설득했다.
그해 6월 계엄사령부에서 발표한 ‘광주 관련 수배자 68명’에 포함돼 쫓겨다니던 그는 이듬해 2월 자수해 곧 훈방됐다. “이후 패배감 속에서 80년대를 부유하듯 살았다.” 일을 한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고, 책임을 지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배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상처가 아물었다.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탄압 사태 등을 보며 조금씩 사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전남대 교육학과에 복학해 91년 졸업했다. 그러나 5·18 이후 수배됐던 전력 탓에 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모아 99년 ‘전국 교원미임용자 원상회복 추진위원회’(전미추)를 만들어 끈질기게 싸웠다. 결국 2002년 초 서울 한 중학교의 도덕교사로 부임했다. 그가 교사가 된 이유는 단 하나 ‘자라나는 세대에게 광주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해마다 5월이 되면 5·18과 관련한 계기수업도 진행하고 글짓기 대회도 기획했다. 그러나 교사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한계는 명확했다. “광주와 달리 서울에서는 5·18에 대해 제대로 아는 아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5·18의 정신과 성과가 결국 광주만의 것으로 좁혀드는 게 아닐까?” 그는 2005년 평생의 꿈이었던 교사직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이후 4년째 5·18민중항쟁 서울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을 맡아 꾸리고 있다. 목표는 여전히 단 하나, ‘5·18의 정신과 성과’를 전국화하는 일이다. ‘5월 광주에서는 왜 시민들이 한데 뭉쳐 싸웠을까요?’ 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5·18은 일부 운동권이나 부상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관련 특별법과 보상법 등으로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됐다지만, ‘80년 5월 광주·전남 지역’만을 대상으로 국한하면서 ‘5·18’을 축소시키고, 전체 민주화운동사와도 분리시키는 폐단을 낳고 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조차 부르지 못한 30돌 반쪽 기념식 사태에서 보듯, 역사에서 ‘5·18’을 지우려는 세력에 맞서 ‘5월 정신’을 지켜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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