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아빠의 감옥’서 20여년…잃어버린 꿈 어떡하죠?

등록 2011-05-22 20:41수정 2011-12-28 22:56

아빠의 상습적인 가정폭력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지난 3월 집을 나와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는 서진씨 자매와 엄마.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사진촬영을 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아빠의 상습적인 가정폭력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지난 3월 집을 나와 쉼터에서 생활하고 있는 서진씨 자매와 엄마. 피해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사진촬영을 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가정폭력 탈출 서진씨 네모녀
군인출신 아빠 상습폭력·칼부림
고교 안보내고 ‘공부 감옥’ 학대
지친 심신, 홀로서기 ‘버거운 꿈’
6개월 뒤면 쉼터에서도 나가야
바보의나눔-한겨레 공동 캠페인 <근로빈곤층과 희망 나누기>

열쇠를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불 꺼진 거실에 형광등을 손에 든 아빠가 서 있다. 현관에 들어서려던 서진(가명·21)씨가 멈칫한다. “어딜 싸돌아다녀. ××야!” 아빠가 욕설을 내뱉으며 형광등을 깼다. 깨진 형광등이 서진씨의 배를 향했다.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깼다. 꿈이다. 옆에서 자고 있는 동생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서진씨는 동생들이 깨지 않게 소리 죽여 울었다.

“쉼터에 오고 나서도 아빠 꿈을 꿔요. 살면서 다시는 아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 서진씨는 지난 3월 엄마와 두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아빠의 오랜 폭력에 무기력해진 엄마와 태어나서부터 아빠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두 동생은 말없이 짐을 챙겼다. “아빠에게서 멀어지자”는 단 하나의 목표로 살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가정폭력 피해여성 쉼터에 정착했다.

서진씨 엄마(45)는 22년 전 남편을 처음 만났다. 4살 연상인 남편은 당시 군인이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장교로 복무중인 남편은 듬직해 보였다. 1년6개월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함이 들어오던 날 만취해 술병을 깨는 남편의 모습을 처음 봤다. 결혼 뒤 얼굴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달라질 거라 믿고 딸 셋을 낳았다. 남편은 생후 4개월 된 딸이 약을 잘 받아먹지 않는다며 목을 졸랐다. 폭력은 갈수록 도를 더했다. 가족에게 칼을 휘둘러 집안의 칼을 모두 숨겨야 했다.

서진씨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언어폭력이나 신체 폭력이 아니다. 아빠가 만든 ‘공부 감옥’이었다. 서진씨와 동생 미진(가명·16)이는 모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내가 공부 가르쳐주면 되니까 돈 들여가며 학교 안 다녀도 돼.” 아빠의 말에 누구도 맞서지 못했다. 둘 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집에서 아빠가 원하는 방식대로 공부를 해야 했다. 아빠는 나날이 진도를 검사하고 한밤중에도 내키는 대로 시험을 본 뒤 딸들을 때렸다. 미진이는 아빠가 낸 문제를 풀다가 기절하기도 했다.

서진씨 아빠는 대위로 제대를 한 뒤 동네 보습학원에서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쳤다. 집에서도 과외 교습을 했다. 문제를 못 풀면 “목을 잘라버리겠다”며 욕설을 해대는 서진씨 아빠를 학생들은 따르지 않았다. 결국 아빠는 서진씨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동네 보습학원을 그만뒀다. 과외 교습을 받던 학생들도 다 떠나고 1명만 남았다. 한 달 수입은 과외교습으로 받은 20만원이 전부였다. 아빠는 딸들에게 “왜 친구들을 과외 학생으로 소개해주지 않느냐”며 욕설을 퍼부었고 아내에게는 “가정 경제가 어려우니 몸을 팔라”고까지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집은 서진씨의 ‘공부 감옥’이 됐다. 아침·점심·저녁 세끼 밥상을 차려 아빠와 함께 밥을 먹은 뒤, 방에 들어가 아빠가 정한 진도에 맞춰 공부를 해야 했다. 아빠가 부르면 거실로 나가 시험을 보고 욕설을 듣거나 맞았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한 적은 있느냐는 질문에 서진씨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1년에… 두 번쯤 있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친구를 못 만나는 건 그래도 참을 만했는데 아빠 곁에서 공부해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서진씨는 눈물을 흘렸다.

아빠는 딸에게 의대에 가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화가가 꿈이었던 서진씨는 그 꿈을 비밀처럼 가슴에만 품어야 했다. 의대에 갈 점수가 나올 때까지 서진씨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봐야 했다.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취득한 이후 내리 몇 년 동안 계속 수능시험을 쳤다. 점수는 좋지 않았고 아빠의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세 자매 가운데 유일하게 학교에 다니고 있는 초등학생 수진(가명·12)이는 “그동안 언니들이 너무 불쌍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수진이는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 때면 늘 엄마나 언니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는 오늘 어때?” “괜찮아”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수진이는 큰 목소리로 “다녀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집에 들어섰다. 서진씨 엄마는 “거짓으로 밝은 척하는 막내를 보며 모두 마음에 병이 들어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쉼터에서는 앞으로 6개월 정도 더 살 수 있다. 오랜 폭력으로 몸과 마음에 병이 든 엄마는 보험설계사 일을 하고 있지만 벌이는 거의 없다. 오랜 시간 무기력했던 아이들은 자신만의 미래를 꿈꿔보는 일조차 버겁다. 지난 2개월 동안 쉼터에서 심리 상담을 받고 나서야 어렴풋이 꿈을 꾼다. 엄마의 꿈은 이혼과 보금자리 마련, 서진씨의 꿈은 그림을 그리며 사는 것이다. 길게 운 엄마와 세 딸은 꿈을 말하며 비로소 눈물을 닦았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희망을 나눠요

060-700-1225 전화하거나
기업은행 계좌로 송금 가능

 ‘아빠의 감옥’을 탈출한 서진씨 자매와 엄마가 자립할 수 있을까요? 오랜 시간 폭력에 시달려온 모녀에게 후원의 손길을 보내주세요. <한겨레>는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과 공동으로 ‘근로빈곤층과 희망나누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뜻을 잇기 위해 설립된 전문모금법인 바보의 나눔(이사장 염수정)이 모금 창구입니다. 사연의 주인공을 도우려면 자동응답전화(ARS·한통화 5000원) 060-700-1225로 전화를 하시거나, 자동응답전화 번호와 숫자가 같은 후원계좌 060-700-1225(기업은행·예금주 바보의 나눔)로 직접 송금하시면 됩니다. 지원이 필요한 근로빈곤층 가정은바보의 나눔으로 전화(02-727-2503~8)를 하시거나 전자우편(babonanum@catholic.or.kr, sun21@hani.co.kr)으로 신청할 수 있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