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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옥중수기 원본 찾았다” 78년 한바탕 소란 있었지만…

등록 2011-05-23 21:37수정 2011-06-15 21:01

‘안응칠 역사’ 진본 논란 왜? 
안중근 의사의 옥중수기 <안응칠 역사>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3권의 필사본이 발견됐다. 이 가운데 1978년 2월 재일 사학자 김정명 교수가 나가사키에서 입수한 ‘사카이 경시 소장본’만 순한문체이다. 김 교수는 이 한문의 필체가 안 의사의 친필이라고 주장해 한때 ‘진본 논란’을 빚었다. 최 원장은 글씨만 한자일 뿐 내용이나 서술방식은 69년 자신이 발견한 일어본과 같은 필사본이라고 판단했다. 그 예로 안 의사의 고향 ‘수양산’의 ‘양’(揚→陽)자를 틀린 점, 부친을 일본식인 ‘私父’로 표현한 점을 꼽는다.(왼쪽 사진) ‘나가사키본’ 발견 소식과 함께 최 원장의 감수 의견을 토대로 친필원본은 아니라고 보도한 <조선일보> 78년 2월14일치 사회면 기사.(오른쪽)
‘안응칠 역사’ 진본 논란 왜? 안중근 의사의 옥중수기 <안응칠 역사>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3권의 필사본이 발견됐다. 이 가운데 1978년 2월 재일 사학자 김정명 교수가 나가사키에서 입수한 ‘사카이 경시 소장본’만 순한문체이다. 김 교수는 이 한문의 필체가 안 의사의 친필이라고 주장해 한때 ‘진본 논란’을 빚었다. 최 원장은 글씨만 한자일 뿐 내용이나 서술방식은 69년 자신이 발견한 일어본과 같은 필사본이라고 판단했다. 그 예로 안 의사의 고향 ‘수양산’의 ‘양’(揚→陽)자를 틀린 점, 부친을 일본식인 ‘私父’로 표현한 점을 꼽는다.(왼쪽 사진) ‘나가사키본’ 발견 소식과 함께 최 원장의 감수 의견을 토대로 친필원본은 아니라고 보도한 <조선일보> 78년 2월14일치 사회면 기사.(오른쪽)
최서면의안중근을 찾아서 ③
안중근을 찾아서
안중근을 찾아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순국 101돌이 지났지만 아직 학계에서 공인된 ‘안중근 전기’나 ‘평전’은 없는 실정이다. 2010년 순국 100돌을 맞아 조광 고려대 교수(한국사학과)가 발표한 조사 자료를 보면, 안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책은 모두 237종, 학술논문은 224편이 나와 있다. 성인용 단행본 93종 가운데 48종이 전기이고, 위인전을 비롯한 어린이용이 144종으로 더 많다.

최서면(83)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언젠가 후세대들이 ‘전기 간행위원회’를 꾸리게 됐을 때 자신이 수집해온 사료와 연구 성과들이 조금이나마 밑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3월26일 안 의사 순국 101돌을 맞아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안중근 문집>을 보면, 1969년 최 원장이 처음 발견한 일어 필사본 말고도 <안응칠 역사> 2종이 더 나와 있다.

“78년 2월이었을 거야. 마침 서울에 와 있었는데 조선일보사로부터 ‘안중근 자서전’ 한문 원본을 입수했다는 연락이 왔어. 편집국으로 들어서니 신문사 수뇌부(선우휘·송지영·신동호)들과 당시 <조선일보> 주일특파원인 허문도(훗날 문화공보부 장관) 기자가 다른 언론사들 몰래 책을 통째로 들고 왔다면서 입수 경위를 설명했어. 그게 바로 ‘나가사키본’으로 불리는 한문필사본이야. ‘나가사키현에서 금융업을 하는 와타나베 쇼시로란 사람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그는 의거 당시 안 의사를 취조한 조선통감부의 사카이 경시의 가족들이 고미술상에 팔아넘긴 것을 구입했다고 했다. 사카이가 귀국할 때 고향 나가사키로 가져온 것을 그의 사후에 가족들이 내놓았다는 것이다. <나가사키신문>에서 이 기사를 보고 재일 사학자인 김정명 교수(아오모리대)가 입수를 해서 주일 한국대사관에 기증했고, 이를 건네받은 대사관에서 주일 특파원들을 불러모아 공개를 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의 감정을 토대로 ‘친필 진본’이라고 발표를 했던 거야.”

그렇지만 지금도 ‘안응칠 역사’ 친필 원본은 나오지 않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때 내가 한 첫마디는 “원본이라고 하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였어. ‘대특종’의 기대로 들떠 있는 기자들 앞에서 직설적으로 “아니다”라고 말할 수가 없었거든.”


재일 사학자 김정명 교수
당시 통감부 경시가 소장한
‘순한문 나가사키본’ 입수

“안응칠 친필맞다” 주장 불구
필사본에 있는 내용도 빠져
진본 일본까진 안보냈을 것
뤼순검찰청서 보관 가능성도

원본이 아니라고 판단한 근거들은 여러가지였다.

“우선 표지를 넘겨 첫페이지 첫줄부터 이상한 게 눈에 띄었어. ‘일천팔백칠십년 9월16일 대한국,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하생…’이라고 시작하는데 수양산의 ‘볕 양(陽)’을 ‘오를 양(揚)’으로 잘못 써놓았다. 자기 고향 이름을 잘못 쓸 리가 없잖아? 앞서 나온 ‘안응칠 역사’에서 안 의사 스스로는 어릴 때 글공부보다는 활쏘기·말타기 같은 놀이를 좋아했다고 써놓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겸양의 표현이야. 미조부치 검사와 사카이 경시의 취조 기록이나 공판 기록을 보면, 집안에 마련된 서당에서 학문을 수학했고 10살 무렵에 이미 사서삼경과 자치통감, 만국역사 등을 읽었다고 밝혀놓았거든. 그런 정도의 한문 실력인데 실수로라도 잘못 쓰기는 어렵다고 봤어.

둘째로, 부친 안태훈의 이름 밑에 ‘사부’(私父)라고 적혀 있어. 이는 남에게 설명할 때 쓰는 일본식 표현이고, 자서전이라면 ‘오부’(吾父) 또는 ‘아부’(我父)가 맞는 어법이거든.

또 부친의 이력을 밝히는 문장 중에 ‘박영효씨가 준수한 청년 70명을 선정해 외국으로 유학시키려 했는데, 아버지도 거기에 뽑혔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씨’라는 호칭도 어긋나는 어법이야. 부친과 친구 사이인 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존칭을 붙여야 맞지 않겠냐는 거지.

그 바로 다음 문장이 ‘오호’(嗚呼·훗날 국역본에서는 슬프다)라는 탄식어로 시작하는데, ‘호오’라고 두 글자를 뒤바꿔 써놓았어. 누군가 옮겨 적으면서 잘못 쓴 흔적이 아닌가 싶어.

또 전체적으로 문장과 단어 사이사이에 ‘반점’(쉼표)이 계속 나왔어. 순한문으로 글을 쓸 때는 점을 찍지 않는 건데 말이야. 일어 번역본에도 쉼표는 없거든.

무엇보다 끄트머리에 ‘이하략’(以下略)이라는 줄임 표시가 나와. 상식적으로 자서전을 쓰면서 본인 스스로 생략을 할 이유는 없지 않겠어? 훗날 전문이 나와서 확인해봤더니 4000자 정도가 생략된 것이었어. ‘이하략’ 다음에는 안 의사가 세례를 받았던 홍석구(요셉 빌렘) 신부가 뤼순형무소까지 찾아와 고해성사를 받아준 것에 고마움을 전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어.”

하얼빈 의거 당시 구리하라 귀순형무소장이 안중근 의사 순국 1주일 전 한성의 조선통감부 사카이 경사에게 보낸 편지.
하얼빈 의거 당시 구리하라 귀순형무소장이 안중근 의사 순국 1주일 전 한성의 조선통감부 사카이 경사에게 보낸 편지.

그런데 김정명 교수는 그 이후 최근까지 한국과 일본의 언론매체를 통해 ‘나가사키본’이 진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지난 85년 3월29일치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김 교수는 진본의 증거로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자서전을 쓴 종이가 거친 갱지로 당시 뤼순 지역의 수감자들이 쓰던 것과 같다는 점과, 일본 경찰청 과학경찰연구소에 의뢰한 필적감정 결과 안 의사의 유일한 친필로 확인된 엽서(1906년 안 의사가 상하이에서 홍 신부한테 보낸 엽서)의 글씨와 자서전의 서체가 같은 사람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즉각 반론을 펴지도 않았고 필적감정의 신뢰성을 따져보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는, 나가사키본이 발견된 바로 이듬해 김 교수 본인이 찾아낸 또다른 <안응칠 역사> 일어 필사본을 통해서 이미 결론이 났다고 봤기 때문이야.”

79년 9월 김 교수가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발견한 <시치조 기요미 문서>(시치조는 의거 당시 뤼순헌병학교 교관) 중 ‘안중근 전기 및 논설’에 함께 묶여 있었던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원고도 처음으로 확인됐다.

“역시 일어로 번역된 필사본이었는데 유일하게 전문이 다 나와 있었어. ‘모리야 에이후 소장본’이나 ‘나가사키본’에서 똑같이 ‘이하략’으로 생략됐던 내용이 확인된 거지. 60년대 중반 안중근의사기념관 이사였던 고 황수영 동국대 총장이 일본 유학중인 제자로부터 입수한 기록을 공개했는데, 의거 당시 구리하라 사다키치 뤼순형무소장이 안 의사 순국 1주일 전에 한성에 있는 통감부의 사카이 경시에게 보낸 편지였어. ‘안중근 전기는 탈고되었으므로 복사해 보내드린다. 동양평화론은 서론만 완성한 상태여서 사형 집행을 15일간 연기해줄 것을 신청했으나 허가되지 않을 듯하다’는 내용이야. 애초에 사카이한테 보낸 건 복사본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거지. 황 총장이 이 편지를 통해서 ‘안응칠 역사’의 존재 사실을 처음 알고 나서 스에마쓰 교수에게 구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했어.”

구리하라의 편지는 2009년 10월26일부터 이듬해 1월2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의거순국 100돌 기념 유묵전-독립을 넘어 평화로’에서 원본이 처음 공개됐다. 원본은 국내의 한 소장자가 보관해온 것으로, 일본 국회도서관에는 사본이 남아 있다.

“그때 안중근숭모회에서 노산이 직접 김정명 교수와 면담을 해서 그 편지를 보여줬다고 했어. 그런 다음 ‘나가사키본은 친필 진본이 아니다’라고 공식 발표까지 했어. 그런데 김 교수는 일본으로 돌아간 뒤 한 주간지에 ‘그런 편지 본 적도 없다.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고 2005년에 펴낸 책에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어.”

이런 논란을 자연스럽게 정리해줄 <안응칠 역사> 진본은 찾을 가능성이 없는 것인가.

“내가 기대하는 마지막 단서는 바로 판결문이야. 일제는 형무소를 언제나 고등검찰청이 있는 지역에 설치했는데, 실권자는 소장보다 청장이었지. 의거 당시 관동도독부의 검찰청과 형무소도 뤼순에 함께 있었잖아. 또 조선통감부나 이후 총독부에서는 본국인 일본에 보고를 할 때 반드시 원본이 아닌 필사본을 보내는 관행이 있었어. 운송 도중에 분실될 것을 우려한 거지.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안응칠 소회’와 함께 나왔던 ‘이토 히로부미 죄악’도 말이야, 원래 안 의사가 연필로 쓴 원문에는 15가지 죄목 가운데 첫번째가 ‘황후(명성황후) 폐하를 시살한 일’인데, 본국에 보고한 필사본에는 ‘명치천황 폐하의 부친 태황제(효명천황) 폐하를 시살한 대역부도한 일’이 맨 먼저 적혀 있어. 일제는 언제나 조선보다 일본을 먼저 언급하는 관례를 지켰기 때문이지. 그런 정황으로 따져볼 때 안 의사 관련 모든 기록의 원본도 뤼순검찰청에서 보관해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안 의사가 영하의 냉골 감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사후에 빛을 볼 것’을 소망하며 쓴 투쟁기이니만큼 언젠가, 어디선가는 반드시 진본이 나올 것이라고 나는 믿고 기다리고 있어. 옥중수기 진본이 있는 곳에 어쩌면 안 의사 유해를 찾을 수 있는 단서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말이야.”

구술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도움말/안중근연구모임 장규식(중앙대) 장석흥(국민대) 최기영(서강대) 한시준(단국대) 한철호(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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