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2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행정법원에서 열린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청구’ 소송 선고 공판에서 승소 판결을 받은 뒤 기자들에게 1인시위 때 사용한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삼성 백혈병 고 황유미 아버지의 ‘4년 투쟁’
“오늘 패소한 다른 피해자 가족들도 산재가 맞아
억울한 사람들도 다함께 싸워 산재인정 받았으면”
“오늘 패소한 다른 피해자 가족들도 산재가 맞아
억울한 사람들도 다함께 싸워 산재인정 받았으면”
폭우가 쏟아지던 23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서울행정법원 203호 방청석 첫째 줄 맨 왼쪽에 앉은 황상기(56)씨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판사 입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백혈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판결문 낭독 소리가 황씨의 귀에 꽂혔다. 순간 눈앞엔 통증을 호소하던 딸 유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10억원을 쥐여 줄 테니 시민사회단체 사람들을 만나지 말라던 삼성 관계자, 딸의 병이 산업재해와는 상관없다며 마음대로 하라던 사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30년을 택시운전만 하던 아비는 딸에게 ‘네 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노라’고 약속했었다. 그는 이날 약속을 지켰다. 유미가 하늘나라로 떠난 지 4년 만이다.
황씨는 2007년 ‘삼성 백혈병’ 문제를 처음으로 공론화했다. 수많은 언론사와 시민사회단체를 찾아다니며 “딸이 산업재해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했다. 이날 오전에도 황씨는 백혈병으로 숨지거나 투병중인 삼성 노동자 가족들과 함께 이건희 회장이 일하는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을 찾아 1인시위를 했다. 삼성 직원들에 둘러싸인 채 ‘직업병을 인정하라’고 내지르던 그의 절규는 빗속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3남매 중 둘째였던 유미(사망 당시 23살)씨는 고교 졸업을 앞둔 2003년 10월 ‘빨리 돈 벌어 남동생을 뒷바라지하겠다’며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 입사했다. 반도체 원판을 화학물질 혼합물에 담갔다 빼는 작업을 하던 유미씨는 입사 2년도 되지 않아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황씨는 딸의 병을 산업재해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같은 라인에서 유미씨와 함께 일했던 이숙영씨도 2006년 백혈병으로 숨졌다. “유미의 병이 재발한 2006년, 삼성 직원이 병원으로 사표를 받으러 왔어요. 그때 백혈병을 산재로 인정해 달라고 했더니, 나보고 ‘아버님이 삼성을 이기려고 하십니까’라고 합디다.”
2007년 3월6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뒤 강원도 속초 집으로 향하던 유미씨는 아버지가 운전하던 택시 뒷좌석에서 숨졌다. 황씨는 같은 해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보험 유족급여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의뢰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역학조사가 실시됐다. 황씨는 이 역학조사가 두고두고 원망스럽다. “오늘 기각 판결을 받은 다른 분들도 산업재해 맞거든요. 역학조사가 너무 부실해 계속 말썽인 겁니다. 유해물질 일부에 대해서는 조사를 안 했고, 조사해 놓고도 영업비밀이라고 결과 발표를 안 하는 부분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조사결과를 믿을 수 없는 거예요.”
근로복지공단은 이러한 역학조사 등을 근거로 유미씨의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황씨 등 5명은 지난해 1월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7개월 동안 이어진 소송을 준비하느라 황씨는 한 달에 서너 번은 생업인 운전대를 놓아야 했다. 딸을 잃고 난 뒤 아내는 몸과 마음을 많이 다쳤다. 딸의 산업재해를 어렵사리 인정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열심히 일하다 병들고 죽어간 많은 이들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에 걸렸지만 용기가 없어서 나서지 못하는 이들이 꽤 있거든요. 이번 판결로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싸워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노동자 안전과 권리를 위한 노조가 생겨야지요. 그래야 우리 유미 같은 사람들이 안 나오거나 덜 나오지 않겠어요.”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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