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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엄마 아빠, 한국서 돌아와요”
가슴 뚫린 조선족 아이들

등록 2011-11-03 20:29수정 2011-11-03 22:45

학교 수업이 끝난 오후·저녁 시간에도 유하조중 학생들은 교실에서 특별활동을 한다. 돌봐줄 어른이 없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위한 일이다. 유하/이정아 기자  <A href="mailto:leej@hani.co.kr">leej@hani.co.kr</A>
학교 수업이 끝난 오후·저녁 시간에도 유하조중 학생들은 교실에서 특별활동을 한다. 돌봐줄 어른이 없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위한 일이다. 유하/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조선족 대이주 100년 〈1부〉뿌리] ① 마지막 학교
1910년 8월29일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병탄했다. 조선의 농민들은 가을걷이가 끝난 겨울과 이듬해인 1911년을 거치면서 조선 땅을 떠났다. 먼저 떠난 사람들은 조-중 국경 근처 연변에, 나중에 떠난 사람들은 더 멀리 흑룡강 근처에 터를 잡았다. 그들은 독립운동, 해방, 국공내전, 한국전쟁, 문화혁명, 개혁·개방 등을 온몸으로 겪었다. 중국 동북3성(길림성·흑룡강성·요령성)에 밀집했던 조선족 190만명은 격변의 현대사 속에서 북한, 한국, 일본, 미국, 그리고 중국 연해·내륙의 대도시로 다시 길을 떠났다. 50만명은 한국, 10만명은 미국·일본·유럽, 50만명은 중국 연해·내륙 도시로 갔다. 학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사에 유례없는 거대한 ‘디아스포라’(이주·이산)다. 지난 7월부터 넉달에 걸쳐 중국 길림성 유하, 중국 산동성 청도, 한국 서울, 일본 도쿄, 미국 뉴욕 등을 현장취재했다. 학교, 마을, 식당, 교회, 인력사무소, 노동현장 등을 찾아다니며 90여명의 조선족을 심층 인터뷰했다. 일부 지역에선 집단 설문조사를 실시했고, 관련 단행본·연구논문·학위논문 등 4500여쪽의 자료도 검토했다. 조선족은 중국 땅에서 지내는 한반도 출신 종족집단을 일컫는 중국 정부의 공식 명칭이자 국내 학자들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민족 개념이다. 조선족들도 스스로를 조선족이라 부른다. 2부 8회에 걸쳐 연재될 이번 기사에선 ‘재중동포’가 아닌 ‘조선족’의 이름으로 그들을 살펴본다.

백두산 자락 해발 2500m에서 문득 한줄기 샘이 솟는다. 차가운 샘은 중력이 이끄는 서쪽 낮은 곳으로 흐른다. 압록강이다. 강을 품은 산이 처음으로 평지를 만난다. 북한 만포시다. 여기서 강은 벌판을 가르느라 조용히 숨죽인다. 수심은 얕고 강폭은 좁다. 몇번의 자맥질이면 강 건너 중국 집안시에 가닿는다.

100년 전, 그들은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더듬어 강으로 왔다. 여기서 집안시를 지나 70여㎞를 북으로 달리면 통화시다. 60여㎞를 더 가면 유하현이다. 국경 도시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아 한갓진 농촌이다. 은밀한 투쟁을 모의하기에 맞춤한 자리다.

1910년 말과 1911년 초, 이회영·이시영·이상룡·이동녕 등 40여명은 가산을 툴툴 털고 한반도를 떠나 유하현에 도착했다. 그들은 유하현에 사상 최초의 조선독립운동 기지인 신흥강습소(훗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청천·이범석·김산 등 3500여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그들은 군사학교와 연계한 교육기관도 세웠다. 1912년 설립한 은양학교다. 졸업생은 신흥무관학교로 진학해 독립군이 됐다. 일제, 한족 토비, 중국 국민당 등에 의해 수차례 폐교됐으나, 학교는 이름을 바꾸고 터를 옮기며 질기게 다시 문을 열었다. 중국 길림성 유하현 유하조선족완전중학교(이하 유하조중)는 그렇게 99년을 보냈다. 내년이면 개교 100돌이다. 조선족 교육기관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100년전 독립운동 위해서 세운
길림성 유하현 완전중학교는
조선족 이주로 학생들이 줄면서
유일하게 남은 학교다.


100년의 역사가 아니어도 유하조중은 조선족의 표상이다. “우리가 마지막 학교예요.” 조선어문을 가르치는 김경수 교사가 말했다. 90년대 초, 유하현의 조선족 중학교는 26곳이었다. 이후 모두 통폐합됐다. 2005년부터 유하조중만 버티고 있다.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지난 7월 유하조중 초중과정(중학교)을 졸업한 학생은 50여명이다. 9월 새학기에 초중 3학년(중학교 3학년)이 된 학생은 40여명, 2학년은 30여명이고, 올가을 입학한 1학년 신입생은 30명에 조금 못 미친다. 김 교사가 유하조중에 처음 부임한 1997년, 신입생은 160여명이었다. 갈수록 신입생이 줄고 있다.

아이들에게 벌어지는 일은 부모와 관련 깊다. <한겨레>가 이 학교 초중 2학년 27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부모와 함께 사는 학생은 5명(새부모 포함)뿐이었다. 혼자 사는 학생은 3명이었다. 나머지는 조부모 또는 편부·편모와 살고 있다. 27명 학생의 부모 54명 가운데 36명이 돈 벌러 고향을 떠났다. 3년 이상 유하를 떠나 있는 경우가 17명이었다. (그래프 참조)

부모들은 자식 때문에 고향을 떠난다. 자식의 교육·결혼 비용을 대려면 목돈이 필요하다. 아이들 생각은 조금 다르다. “글짓기를 하면, 학생들이 ‘돈 필요 없어요. 돌아오세요’라고 씁니다.” 김경수 교사가 말했다. 부모 떠난 유하에서 학교는 문을 닫고, 학교 없는 유하에서 부모는 객지로 떠난다. 일련의 사건이 맞물려 사태를 키운다.

2학년생 부모 54명 중 36명이
돈벌이 하러 한국으로 떠났다.
아이들은 혼자 살거나
편부모 슬하에 산다.

채문실도 몇년 전, 엄마한테 말했다. “이젠 중국에 돌아와요.” 문실이 초중 1학년 때였다. “조금만 더 있다 갈게.” 전화기 너머 한국에서 엄마가 말했다. 문실은 이제 고중(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엄마는 여전히 한국에 있다.

문실이 6살 때 아빠가, 10살 때 엄마가 한국에 갔다. 지난 5년 동안, 문실은 남동생과 지냈다. 다른 어른은 함께 살지 않았다. 아빠 형제 8남매, 엄마 형제 3남매 모두 한국에 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는 중국 들어올 짬이 없다. 식당일을 하는 엄마는 반년마다 와서 한달쯤 머물다 돌아간다.

문실 앞에서 엄마는 오른쪽 어깨와 팔이 아프다고 말했다. 문실도 아팠다. 자주 열이 나고 머리가 아팠다. 최근엔 초중에 다니는 남동생의 결석이 잦아졌다. 동생은 복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것이 마음의 병인지 몸의 병인지는 확실치 않다.

초중 2학년 김영철(가명)은 근심을 스스로 털어냈다. 소학교(초등학교) 입학 뒤로 줄곧 기숙사에서 지낸 영철의 기억 속에 엄마 얼굴은 없다. 소학교 때, 사진첩을 뒤졌다. “어머니 모양 보고파서 찾아봤는데, 없었어요. 한 장도.” 작고 마른 영철이 작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부터 나 혼자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지요.”

영철의 엄마는 탈북자였다. 결혼적령기 조선족 여성이 줄면서, 조선족 남성과 탈북 여성이 결혼하는 일이 생겼다. 영철이 4살 때, 탈북자 엄마는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 엄마가 붙잡힌 뒤, 아빠도 한국으로 떠났다. 아빠는 3년에 한 번 중국에 온다. 중국에 오면 아빠는 술을 많이 마신다.

지난 8월, 유하조중 초중 과정을 졸업한 리남의 가족 구성은 조금 복잡하다. 리남이 5살 때 친부모는 이혼했다. 중국 청도(칭다오)와 한국 수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아빠는 지난해 초, 재혼했다. 훗엄마(새엄마)에겐 리남 또래의 두 아들이 있다. 아빠와 훗엄마는 지금 한국에 있다. 훗엄마의 두 아들은 그쪽 할아버지가 돌본다. 리남은 기숙사에서 지낸다. 부모 없는 사춘기를 리남은 묵묵히 잘 견디고 있다. 반에서 1, 2등을 다툰다.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다.

격변의 현대사 속 다시
디아스포라를 겪는 조선족.
마음의 병을 앓는 아이들은 말한다.
“돈 필요 없어요, 집으로 돌아오세요.”

김경수 교사는 지난해 졸업한 어느 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상담을 하는데, ‘엄마를 죽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부모는 이혼했다. 엄마는 한국에서 재혼했다. 집 떠난 아빠는 행방불명됐다. 혼자 지낸 소녀의 분노는 졸업 무렵에야 잦아들었다. 글짓기 시간에 “더이상 미워하지 않겠다”고 썼다. 그러나 사춘기를 뒤흔든 슬픔은 평생 동안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부모 가운데 한 분이라도 집에 남아야 해요.” 원태옥 교사는 학부모 회의가 있을 때마다 말한다. 부부가 동시에 한국에 가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당부다. “부모가 떠나면 아이들 정서와 성적은 물론 생활의 각 방면에 두루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원 교사는 말했다. 유하조중 학생 600여명(초중 120여명, 고중 480여명) 가운데 400여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조선족 학교가 줄면서 근거리 통학이 불가능해진 탓도 있지만, 돌봐줄 어른이 없어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많은 조선족이 유하현을 떠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0년 이상 타지에 살면서도 유하의 호구(주민등록)를 유지하는 조선족이 많다. 5년 전 인구조사에서 유하현 전체 인구 38만명 가운데 조선족은 2만7천명이었다. 올해 자료를 보면, 조선족은 2만3천명이다.

유하조중 학생들이 민족전통의 장구춤 연습을 하고 있다. 재정이 넉넉치 않아, 유하조중 교사들이 폐품을 모아 직접 장구 수십여개를 만들었다. 유하/이정아 기자
유하조중 학생들이 민족전통의 장구춤 연습을 하고 있다. 재정이 넉넉치 않아, 유하조중 교사들이 폐품을 모아 직접 장구 수십여개를 만들었다. 유하/이정아 기자
유하현 영풍촌의 정문철 서기는 “실제 조선족은 그보다 훨씬 적다”고 말했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조선족 2만3천명은 대략 6천여가구에 해당한다. 가구마다 1명씩 아이가 있다면, 6천여명의 조선족 학생이 있어야 한다. “유하현 소·중학교 다 합해도 조선족 학생은 1천명도 안 돼요. 나머지 5천명은 어디 갔겠냐고. 조선족 학교가 조선족의 전부인데, 왜 문 닫았겠냐고.”

정 서기는 “사회·문화·가족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한국 바람’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말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이 가련하고, 이런 말하는 내 마음이 가련하지요.”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 학교가 1990~99년 사이에 49.38% 감소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더 많은 학교가 사라졌겠지만, 중국 동북 3성을 아우르는 정확한 수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숫자보다 체험이 때로는 더 강력하다. 류복련 유하조중 교장은 1997년 이 학교에 왔다. 1980년부터 유하현 일대 조선족 소·중학교에서 가르쳤다. “이제 보니 내가 일했던 학교는 다 없어졌네요.” 교사 초년 시절을 회고하던 류 교장이 씁쓸하게 말했다. 지난봄, 류 교장은 옛 조선족 소학교 자리에 가봤다. “황폐하여 마음이 아팠지요.” 목재공장이 들어선 곳에 학교의 흔적은 없었다.

유하조중마저 같은 운명에 처할까봐, 교사들은 결단을 내렸다. 1997년부터 고중 과정에 한족 학생을 받아들였다. 초중 과정은 의무교육이지만, 고중부터는 학비를 낸다. 학생이 늘면 정부 지원금도 늘어난다. 고중을 한족에 개방하면서 학교 경영에 조금 숨통이 트였다. “그래도 초중 과정이 우리 학교의 핵심이지요.” 류 교장이 말했다. 초중 과정에는 조선족만 입학시키고 있다. 마지막 학교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다. “악전고투하고 있어요.” 김경수 교사가 말했다. 유하/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유하조중에 도움 주실 분은 qingxiu123@hanmail.net(김경수 교사)으로 문의해 주세요. 2회 ‘손님의 일생’에서 중국 조선족 마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조선족 이주사
조선족 이주사
조선족 대이주 100년·유하조선족중학교 100년 (※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동북 조선족 절반 고향 떠나 디아스포라

조선족 이주는 일거에 대인구가 이동하는 ‘용수철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1910년 무렵, 중국 동북 지역 조선족은 20여만명이었다. 30여년 뒤, 그 인구는 210만여명으로 폭증했다. 해방 직후, 100만여명이 한꺼번에 한반도로 돌아왔다. 한동안 잠잠했던 대이주는 1990년대 이후 20여년 동안 동북 지역 조선족 190만명 가운데 100만명이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재현됐다.

20세기 초반 중국 동북 지역에 이주한 조선족 대다수는 굶주림을 벗어나려는 농민들이었다. 1990년대 이후 폭발적 이주에도 경제적 동기가 작용했다. 중국 개혁·개방으로 도농간 빈부격차가 벌어졌다. 한족 농민들은 중국 연해·내륙 도시에서 기회를 모색한 반면, 조선족은 같은 핏줄인 한국에 주목했다. 조선족은 오랫동안 거대한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집단거주하면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했다. 최근 조선족 대이주는 그 기반을 잠식하고 있다.

<관련기사>
■ 우리 길림성 조선족은 이제 없어지나요?
■ 100년전 독립운동 위해 세운 유하조중…교사와 학생들로 살펴보는 ‘조선족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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