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인문사회계열 최초의 조선족 출신 강광문 교수
[한겨레in] 조선족 대이주 100년<2부>④ 민족의 미래
강광문(38·사진) 교수는 서울대 인문사회계열 최초의 조선족 출신 교수다. 경북에 뿌리를 둔 그의 조상은 일제때 중국 요령성에 건너가 길림성 매하구에 정착했다. 민족학교를 다닌 그는 중국 명문인 베이징대를 졸업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은 뒤, 올해 초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가 거친 동아시아 3국은 오늘의 조선족을 주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조선족의 미래를 ‘1인칭’ 화법으로 재구성했다.
디아스포라의 꿈 ‘초국적 민족공동체’
지도를 펼쳐 손가락 끝으로 이어본다. 경북 영천, 대구, 서울 지나 평양으로, 신의주 거쳐 중국 심양(선양)까지. 짚어가는 손가락조차 현기증 난다. 아득한 그 길을 어찌 왔을까. “기차 타고 왔지.” 할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어른들 손에 끌려 만주로 향하던 12살 소녀는 차창밖 고국 풍경 대신 거대한 기차만 마음에 담았을 것이다.
소녀는 만주에서 처녀로 자라 동족의 남자와 결혼했다. 먹을거리가 무궁무진하다 해서 고향을 떠났지만, 부부는 영 살기가 어려웠다. 길림성과 요령성의 넓은 땅을 옮겨 다니며 번번이 새로 땅을 갈았다. “손을 움직이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할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배우는 일이 가장 중요해.” 할아버지도 나에게 말했다. 땅에 이마를 박고 살아온 그들은 나더러 땅을 떠나라 하였다.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하였다.
나는 기차 타고 고향을 떠났다. 베이징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일본 도쿄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3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임용됐다. 심양, 베이징, 도쿄를 거쳐 서울까지. 아득한 그 길 위에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으나 모든 곳에 속하였다. 나는 긴장하고 갈등하는 동북아시아에서 평생을 유랑하고 대를 이어 떠돌았다. 민족·국가의 경계에 서성이느라 민족·국가의 속박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살아 계셨다면 할머니는 말했을 것이다. “우리 손자 장하구나.” 2005년 1월10일 저녁 8시41분, 할머니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길림성의 동생이 도쿄의 나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했다. 나는 통곡했다. 그가 고국을 떠나고 그 손자가 고국에 돌아오기까지 70여년이 걸렸다. 돌아와 앉아 있으니 그 시절이 사무친다.
나, 강광문은 서울법대 최초 조선족 교수다.
경북 출신 조부모는 일제때 중국 길림성에 건너가
역사의 격랑 속에 민족교육을 했다. 할머니의 고향은 경북 영천,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이역만리에 와서도 조선족은 피의 뿌리를 찾아 백년가약을 맺었다. 경북 출신 부부는 여덟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 아버지와 그 형제의 고향은 모두 다르다. 그것은 난리의 세월이었다. 1950년대 ‘대약진 운동’과 뒤이은 대기근, 60년대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살아남으려고 거듭 정처를 옮겼다. 그 시절을 겪은 조선족은 옛일을 입에 담지 않는다. 직접 겪지 않으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손자인 나에게 과거 대신 미래를 말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설교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난리 없는 땅에서 손자가 살 수 있기를 할아버지는 간절히 기대했다. 젊었을 때 할아버지는 국민당과 맞서 싸운 ‘중국해방전쟁’에 참여했다. 나중에 중국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이념이 먼저였고, 민족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할아버지는 문화혁명 때 알게 됐다. 중국 정부는 북한·남한과 다른 ‘중국인 조선족’의 정체성을 할아버지에게 부여했다. 민족의식 강했던 수많은 조선족이 공산당으로부터 ‘투쟁’(공개비판)을 받았다. 지방 말단 공무원이던 외할아버지도 투쟁의 위협을 피해 멀리 흑룡강성으로 이사 갔다. “우리의 조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조선족 학생들이 공부하는 중국어 교재의 첫머리에 지금도 적혀 있다. 할머니는 중국을 조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중국에 감읍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이만큼 잘사는구나.” 할머니는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건국 직후 중국은 조선족 모두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일제·한족토비·국민당, 심지어 조선의 지주들도 그렇게 하진 못했다. 나중에 토지를 국유화했지만, 80년대 이후엔 다시 토지를 분배했다. 중국은 ‘남의 나라’지만, 고향 떠난 이민족에게 살길을 열어준 ‘고마운 나라’이기도 했다. 조선족이 중국을 좋아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땅에 대한 감사다. 그런 사연을 모르는 어떤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공산당 편이라고 몰아붙인다. 역사를 모르니 함부로 험담이 나오는 것이다. 할아버지·할머니 세대는 중국 정부가 제공한 땅을 기반으로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조선족은 한족보다 더 열심히 농사지어 더 많은 소출을 올렸다. 그 돈으로 연변대학을 짓고, 한글로 적힌 민족신문을 발행했다. 일제강점기에 국외로 이주하기는 미국·일본의 동포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치·교육·언론에서 두루 민족공동체를 일군 것은 조선족뿐이다.
나는 높은 교육열 덕에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도쿄대서 박사를 받고 한국에 왔다.
70년만에 조부모가 떠난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 열기 속에 자랐다. 길림성 매하구 조선족 제11중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관심사는 오직 공부였다. 우리는 반복되는 시험에 매달렸다. 선생님들은 ‘경쟁의 냉혹함’, ‘인생의 실패’를 거론하며 어린 우리를 닦달했다. 이미 그때부터 우리는 한족과 묘한 경쟁을 치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아야 했다. 모든 민족학교는 어느 한족학교보다 교육열이 높았다. 우리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모두 배웠다. 치우침 없이 모든 언어를 익힐 때까지 선생님들은 가혹할 정도로 우리를 밀어붙였다. 그들은 우리가 특정 언어에 국한되어 자라길 바라지 않았다.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어린 조선족의 운명을 그들은 예감했을 것이다. 조선족은 어떤 환란에도 굴하지 않는다. 우리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다가오는 시절을 잘 이겨내야 했다. 우리의 ‘초국적 정체성’은 도도한 ‘민족적 자긍심’ 위에 형성됐다. 동북아에서 평생을 유랑하고 대를 이어 떠돌았다.
조선족은 100년간 진행된 민족분산을
이제 새 공동체로 진화시키고 싶다. 입시지옥을 견뎌낸 나는 베이징대에 입학했다. 그제야 나는 동북에 집거한 조선족의 한계를 보았다. 조선족 대학생은 대체로 무지했다. 오직 대학 입학이 목적이었을 뿐, 대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 부모의 수준을 넘어서는 질문이었다. 세계는 동북은 물론 중국보다 넓었다. 그 무렵 고향에선 수상한 일들이 시작됐다. 민족학교는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빠르게 망가졌다. 학생이 부족하여 문 닫는 학교가 생겼다. 살아남은 학교의 위상과 수준도 급격히 추락했다. 조선족이 새로 진출한 대도시에는 민족학교가 없거나, 있더라도 사립학교뿐이었다. 공립 민족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민족 정체성에 대한 회의도 확산됐다. 요즘 젊은 조선족 부모들은 중국 주류사회에서 잘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뭣하러 조선족 정체성을 고집하느냐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주류에 대한 열등감이다. 조선족은 중국 현대사의 모든 국면마다 유난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외할아버지는 항일전쟁에 참여했고, 할아버지는 국공내전에 가담했고, 작은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전선에 나갔다. 심지어 산아제한까지 조선족은 한족보다 열성으로 나섰고, 조선족 인구 자체가 줄었다. 그 바탕에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열등감이 있다. 소수는 변화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으면 절멸할 것이다. 이제 조선족 젊은 부모들은 열등감에서 자식들을 해방시키려 한다. 중국 소수민족에 머물지 않고 세계 무대에서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는 꿈을 꾼다. 중국은 그 무대를 향하는 바탕이 된다. 중국의 위상이 커지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커다란 변화를 온몸으로 헤쳐온 조선족에게 ‘G2 시대’는 예삿일이 아니다. ‘복합적 코리아 공동체’를 형성해
조선족을 통해 우리민족이 국경·국적을 넘어
동북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선족 대이주 때문에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민족공동체가 급격히 유실되고 있다. 그 결과, 선조들이 개척한 동북3성의 터전을 잃을 수 있고, 조선족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꿀 기회가 남아 있다. 조선족이 세계 곳곳에 진출하여 작지만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만들고, 느슨하지만 지구적인 유대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지난 100여년 동안 진행된 한민족의 분산을 거대하고도 새로운 공동체로 진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 거주 한국인은 80만~90만명이다. 일본에도 재일동포 사회가 있다. 이주 조선족이 한국인·재일동포 등과 어울려 ‘복합적 코리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그 꿈은 남북문제까지 이어진다. 북한이 문을 열면 길림성 연변에 한국인과 북한인이 모여들 것이다. 젊은 조선족들도 중국 동북지역에 다시 몰려올 것이다. 연변은 중국 연해·내륙 대도시를 앞지르는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가 될 것이다. 조선족은 국경·국적으로 규정되는 근대국가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흔든다. 국적이 왜 당연한 것이냐는 물음을 조선족들이 이미 던지고 있다. 민족국가의 고정관념을 조선족을 통해 무너뜨릴 수 있다. 조선족은 국경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면서, 각 나라에 있는 우리 동포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족을 통해 우리 민족은 동북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이미 늦어 버린, 가망없는 꿈일 수 있다. 지금 동북엔 사람이 없다. 조선족 디아스포라(대이주)가 갈등하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까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그 책무의 일부가 한국인들에게도 있다. 나는 지금 책을 쓴다. 30대 조선족의 한국 정착기다. 연말에 출판될 예정이다. 한국인들이 우리를 통해 새 미래를 보았으면 좋겠다. 땅을 찾아 사방천지를 유랑하고,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다시 이역만리를 떠돈 우리는 조선족이다. <끝> 글·사진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관련기사]
■ 조선족 뒷받침, 통일·외교에도 도움
경북 출신 조부모는 일제때 중국 길림성에 건너가
역사의 격랑 속에 민족교육을 했다. 할머니의 고향은 경북 영천,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이역만리에 와서도 조선족은 피의 뿌리를 찾아 백년가약을 맺었다. 경북 출신 부부는 여덟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 아버지와 그 형제의 고향은 모두 다르다. 그것은 난리의 세월이었다. 1950년대 ‘대약진 운동’과 뒤이은 대기근, 60년대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살아남으려고 거듭 정처를 옮겼다. 그 시절을 겪은 조선족은 옛일을 입에 담지 않는다. 직접 겪지 않으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손자인 나에게 과거 대신 미래를 말했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설교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난리 없는 땅에서 손자가 살 수 있기를 할아버지는 간절히 기대했다. 젊었을 때 할아버지는 국민당과 맞서 싸운 ‘중국해방전쟁’에 참여했다. 나중에 중국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이념이 먼저였고, 민족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할아버지는 문화혁명 때 알게 됐다. 중국 정부는 북한·남한과 다른 ‘중국인 조선족’의 정체성을 할아버지에게 부여했다. 민족의식 강했던 수많은 조선족이 공산당으로부터 ‘투쟁’(공개비판)을 받았다. 지방 말단 공무원이던 외할아버지도 투쟁의 위협을 피해 멀리 흑룡강성으로 이사 갔다. “우리의 조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조선족 학생들이 공부하는 중국어 교재의 첫머리에 지금도 적혀 있다. 할머니는 중국을 조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중국에 감읍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이만큼 잘사는구나.” 할머니는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건국 직후 중국은 조선족 모두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일제·한족토비·국민당, 심지어 조선의 지주들도 그렇게 하진 못했다. 나중에 토지를 국유화했지만, 80년대 이후엔 다시 토지를 분배했다. 중국은 ‘남의 나라’지만, 고향 떠난 이민족에게 살길을 열어준 ‘고마운 나라’이기도 했다. 조선족이 중국을 좋아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땅에 대한 감사다. 그런 사연을 모르는 어떤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공산당 편이라고 몰아붙인다. 역사를 모르니 함부로 험담이 나오는 것이다. 할아버지·할머니 세대는 중국 정부가 제공한 땅을 기반으로 민족교육을 시작했다. 조선족은 한족보다 더 열심히 농사지어 더 많은 소출을 올렸다. 그 돈으로 연변대학을 짓고, 한글로 적힌 민족신문을 발행했다. 일제강점기에 국외로 이주하기는 미국·일본의 동포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치·교육·언론에서 두루 민족공동체를 일군 것은 조선족뿐이다.
‘복합적 코리아 공동체’를 형성해 조선족을 통해 우리민족이 국경·국적을 넘어 동북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도쿄대서 박사를 받고 한국에 왔다.
70년만에 조부모가 떠난 고국에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 열기 속에 자랐다. 길림성 매하구 조선족 제11중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관심사는 오직 공부였다. 우리는 반복되는 시험에 매달렸다. 선생님들은 ‘경쟁의 냉혹함’, ‘인생의 실패’를 거론하며 어린 우리를 닦달했다. 이미 그때부터 우리는 한족과 묘한 경쟁을 치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아야 했다. 모든 민족학교는 어느 한족학교보다 교육열이 높았다. 우리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를 모두 배웠다. 치우침 없이 모든 언어를 익힐 때까지 선생님들은 가혹할 정도로 우리를 밀어붙였다. 그들은 우리가 특정 언어에 국한되어 자라길 바라지 않았다.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어린 조선족의 운명을 그들은 예감했을 것이다. 조선족은 어떤 환란에도 굴하지 않는다. 우리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다가오는 시절을 잘 이겨내야 했다. 우리의 ‘초국적 정체성’은 도도한 ‘민족적 자긍심’ 위에 형성됐다. 동북아에서 평생을 유랑하고 대를 이어 떠돌았다.
조선족은 100년간 진행된 민족분산을
이제 새 공동체로 진화시키고 싶다. 입시지옥을 견뎌낸 나는 베이징대에 입학했다. 그제야 나는 동북에 집거한 조선족의 한계를 보았다. 조선족 대학생은 대체로 무지했다. 오직 대학 입학이 목적이었을 뿐, 대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 부모의 수준을 넘어서는 질문이었다. 세계는 동북은 물론 중국보다 넓었다. 그 무렵 고향에선 수상한 일들이 시작됐다. 민족학교는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빠르게 망가졌다. 학생이 부족하여 문 닫는 학교가 생겼다. 살아남은 학교의 위상과 수준도 급격히 추락했다. 조선족이 새로 진출한 대도시에는 민족학교가 없거나, 있더라도 사립학교뿐이었다. 공립 민족학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다. 민족 정체성에 대한 회의도 확산됐다. 요즘 젊은 조선족 부모들은 중국 주류사회에서 잘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뭣하러 조선족 정체성을 고집하느냐는 생각이 팽배하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주류에 대한 열등감이다. 조선족은 중국 현대사의 모든 국면마다 유난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외할아버지는 항일전쟁에 참여했고, 할아버지는 국공내전에 가담했고, 작은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전선에 나갔다. 심지어 산아제한까지 조선족은 한족보다 열성으로 나섰고, 조선족 인구 자체가 줄었다. 그 바탕에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열등감이 있다. 소수는 변화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으면 절멸할 것이다. 이제 조선족 젊은 부모들은 열등감에서 자식들을 해방시키려 한다. 중국 소수민족에 머물지 않고 세계 무대에서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하는 꿈을 꾼다. 중국은 그 무대를 향하는 바탕이 된다. 중국의 위상이 커지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커다란 변화를 온몸으로 헤쳐온 조선족에게 ‘G2 시대’는 예삿일이 아니다. ‘복합적 코리아 공동체’를 형성해
조선족을 통해 우리민족이 국경·국적을 넘어
동북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선족 대이주 때문에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민족공동체가 급격히 유실되고 있다. 그 결과, 선조들이 개척한 동북3성의 터전을 잃을 수 있고, 조선족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긍정의 에너지로 바꿀 기회가 남아 있다. 조선족이 세계 곳곳에 진출하여 작지만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만들고, 느슨하지만 지구적인 유대관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지난 100여년 동안 진행된 한민족의 분산을 거대하고도 새로운 공동체로 진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 거주 한국인은 80만~90만명이다. 일본에도 재일동포 사회가 있다. 이주 조선족이 한국인·재일동포 등과 어울려 ‘복합적 코리아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그 꿈은 남북문제까지 이어진다. 북한이 문을 열면 길림성 연변에 한국인과 북한인이 모여들 것이다. 젊은 조선족들도 중국 동북지역에 다시 몰려올 것이다. 연변은 중국 연해·내륙 대도시를 앞지르는 동북아시아의 중심도시가 될 것이다. 조선족은 국경·국적으로 규정되는 근대국가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흔든다. 국적이 왜 당연한 것이냐는 물음을 조선족들이 이미 던지고 있다. 민족국가의 고정관념을 조선족을 통해 무너뜨릴 수 있다. 조선족은 국경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면서, 각 나라에 있는 우리 동포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족을 통해 우리 민족은 동북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이미 늦어 버린, 가망없는 꿈일 수 있다. 지금 동북엔 사람이 없다. 조선족 디아스포라(대이주)가 갈등하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까지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그 책무의 일부가 한국인들에게도 있다. 나는 지금 책을 쓴다. 30대 조선족의 한국 정착기다. 연말에 출판될 예정이다. 한국인들이 우리를 통해 새 미래를 보았으면 좋겠다. 땅을 찾아 사방천지를 유랑하고,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다시 이역만리를 떠돈 우리는 조선족이다. <끝> 글·사진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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