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⑤ 자기계발의 피로, 탈출 꿈꾸다
⑤ 자기계발의 피로, 탈출 꿈꾸다
대학생·백수·직장인…‘불안’은 똑같네
<한겨레> 심층 인터뷰에 응한 2030 36명 중 대다수는 경제적인 문제나 진로, 취업과 관련한 불안을 자기계발이나 스펙쌓기에 몰두하며 해소하려 했다. 그 또래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개중엔 아무리 노력해도 장밋빛 미래가 보이지 않자 자기계발이라는 ‘쳇바퀴’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 첫걸음은 자기 내면의 불안과 문제를 인정하고 밖으로 드러내면서 공감과 연대를 희망하는 것이다. 공감과 연대를 찾는 방법은 저마다 달랐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래 또는 윗세대와 소통을 시도하거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단체를 찾기도 한다.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 ‘이판사판’ 도전장을 내미는 이도 있다. 그런 ‘소수’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봤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모범생, 자기계발서를 버리다
자기계발서에 얽매인 삶
돌아온 건 자책과 우울
정치 참여로 불안 해소 “20대가 만드는 20대를 위한 휴먼라이브러리… 우리, 불안과 사이좋게 지내볼까?” 포털사이트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귀에 황혜지(22·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20대를 위한 ‘휴먼라이브러리’(사람책 도서관) 기획단을 모집한다는 글이었다. 휴먼라이브러리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 대신 생생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줄 사람을 만나는 ‘사람 도서관’이다. 황씨는 사람들을 만나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길이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엔지오(NGO) 활동가가 되고 싶지만, ‘돈 안 되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불안하다.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판단을 하고 싶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엔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황씨는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지역사회 생활협동공동체 ‘민중의 집’에서 20대 남녀 12명과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달 11일 서울 서초구 ‘서초창의허브’에서 열릴 예정인 휴먼라이브러리 기획단에 지원한 이들이었다. 한명씩 주뼛쭈뼛 일어나 자기소개를 해나갔다. 주위의 시선이 두려운 백수, 대학 입학이 늦어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생각하는 청년,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직장인, 희망만 말하는 청춘 이야기가 불편하다는 대학생 등이 한데 모였다. 모두 다른 얘기를 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은 한가지, 불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양하니까 불안 요인도 다 다를 줄 알았는데 모아놓고 보니 ‘경제적 어려움, 자괴감, 하면 된다는 식의 강요, 타인과의 소통, 비교’라는 다섯가지 카테고리로 정리가 되더군요.” 황혜지씨는 한때 심각한 슬럼프를 겪었다. 자신없고 못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 ‘범생이’인 황씨는, 부모와 세상이 원하는 길로 별다른 고민없이 쭉 나아갔다. 2009년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에 진학한 뒤에도 높은 학점이 자신감을 받쳐줬다. 그런데 이란어만 공부해서는 어릴 때부터 꿈꿔온 국제 엔지오(NGO) 활동가가 되는 데 제약이 있을 것 같았다. 2학년이 되면서 스페인어과로 전공을 바꿨다. 스페인어와 학교가 의무화하고 있는 이중전공에 의한 국제학 공부는 그가 꿈꾸던 삶의 지렛대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좌절이 시작됐다. 이란어는 배운 사람이 거의 없어 모든 학생의 출발선이 같았지만, 스페인어는 달랐다. 듣는 과목마다 재수강이 반복됐다. 외국어고 출신, 교포,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제학 수업은 100% 영어 강의였다. “외국에서 살다 온 애들과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제 책상은 외딴 섬 같았어요. 같은 학문을 한국어로 하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 안 되고 소외감이 느껴지니까 학문에 대한 흥미도 떨어졌어요.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2010년 8월, 우울함을 견디다 못한 황씨는 학교 내 심리상담실을 찾았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그곳을 찾고 있었다. 자신도 잘 몰랐던 자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공부 계획표를 꼼꼼히 짜는 게 적성에 맞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줄 없는 노트에 자유롭게 낙서를 하다 보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황씨는 그동안 자신의 존재감을 외부 평가를 통해서만 확인했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땐 성공법을 제시해주는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지금 몇 가지를 실천하고 있나 맞춰봤어요. 그런 책을 읽으면 성공에 한 걸음 다가서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요구하는 게 점점 너무 많아지는 거에요.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 그런 책에서 말하는 삶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여전히 주위의 평가와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지만, 더이상 자책만 하지는 않는다. “저는 저 자신이 매력있다고 생각해요. 건강하고 잘 웃잖아요. 그런데 사회적 잣대로 보면 왜 이렇게 모자란 인간이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도록 스스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싶어요.” 그가 선택한 불안 해소법은 참여다. 지난해엔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집회 현장에 용기를 내어 나가봤다. ‘1% 대 99%’ 중에서 99%의 어디쯤에 속할 것이라는 황씨가 처음 찾은 곳은 금융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아큐파이 서울(Occupy Seoul)’ 집회 현장이었다. 좌파나 우파를 떠나서 참여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몸으로 움직이는 대신 말만 많았던 건 아닐까 자신을 뒤돌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깃발과 구호는 여전히 낯설다고 한다. “정치에 대해 무심했어요. 그렇지만 사회변화를 이끌 수 있는 정당이 있다면 가입하고 싶어요. 정치권에 변화가 없더라도 무기력해지진 않을 겁니다. 꾸준히 활동하는 시민단체도 있잖아요. 뜻이 맞는 단체에 도움을 주고 싶기도 해요.” 알바생,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다
알바생 수당지급 거절한
커피점 상대로 진정 낼 때
‘청년유니온’이 든든한 벗 정당한 요구를 ‘욕심’으로 평가절하당하며 끙끙 앓다가, 연대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다. 서유란(24·여)씨에게 ‘청년유니온’은 지난 2년 동안 힘겹기만 했던 사회생활에서 처음 얻은 든든한 ‘내 편’이다. 그는 지난해 말 대형마트에 입점한 커피 전문점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14시간 내내 서서 일했다. 식대를 제외하고 일한 시간만큼 계산된 임금(시급 4500원)만 받았다. 8시간 이상 일할 때 주는 연장근무수당과 야간수당을 요구했지만 업주는 딱 잘라 거절했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어느날 인터넷을 뒤지다 아르바이트생 주휴수당(주 6일을 근무하면 하루를 쉬더라도 쉬는 날 하루치 몫으로 지급해야 하는 임금)을 떼먹는 커피 전문점을 고발하는 기사를 발견했다. 서씨 역시 주휴수당은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다. 자신보다 어린 ‘청년유니온’ 활동가를 만나 함께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냈다. 두 달간 받지 못한 각종 수당은 50만원에 달했다. “주스가 한잔에 6000원이에요. 그런데 정작 커피 전문점 알바생은 1시간을 일해도 주스 한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임금이 왜 오르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그만둬도 대체 인력이 너무 많으니까,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알바생들은 그냥 넘기죠. 알바생들이 힘을 합쳐 다 함께 파업해보자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하기도 했죠.” 그는 곧 청년유니온에 가입했다. 전문대에서 광고를 공부한 그는 졸업한 뒤 대학 편입을 준비했다. 2년간의 배움으로는 취직을 해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4년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했다. 부모님은 자영업을 하지만, 소득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학비 마련은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2010년 방송통신대에 편입하면서 알바 인생이 시작됐다. 카페 서빙, 학원 보조강사, 콜센터 상담원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부딪친 세상은 험난하기만 했다. 어느 카페에선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다가 “어린애가 돈 밝힌다”는 핀잔만 들었다. 공공기관에서 24시간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할 때는 성난 시민들의 화풀이를 받아줘야 했다. 회사에 부조리한 점을 지적하면 부조리는 그대로 남고, 서씨만 불만 많은 직원으로 손가락질당했다. 서씨는 요즘 오스트레일리아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보다 시급이 높은 해외로 나가 진로를 고민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어서다. 그는 전문대에서 공부했던 광고 일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불공정’ 세상을 부추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나 빈부격차가 있지만 노력하면 그 차이를 줄일 수 있어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는 거죠. 꽉 막힌 도로 위의 차 안에서 경치를 즐기는 사람을 보여주며 ‘내 이름은 긍정입니다’란 글귀를 내보내는 광고가 있어요. 비판하지 말고 긍정적으로만 살라는 얘기인데, 사회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불안한 고시생, 인터뷰어가 되다
주위 보면 비슷한 고민들…
소통 고리로 잡지 만들며
불안한 20대 서로 치유해 황혜지씨의 눈길을 잡아끈 ‘휴먼라이브러리’ 기획단 모집글을 쓴 사람은 웹진 <더힐(the heal)>의 현승인(26·남) 편집장이다. 대학생인 그는 지난해 3월 이 잡지를 창간했다. 제호에 담긴 ‘치유하다’란 뜻은 자신을 비롯한 20대 청춘들을 겨냥한 것이다. 현씨는 자신을 ‘뭐하나 특별하게 잘하는 게 없는 20대 청년’이라고 소개했다. 광주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현씨 역시 외환위기 여파로 가세가 기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10대 시절부터 랩을 했다. 음악이 좋았고,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군악대에 복무하면서 스스로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 돈을 많이 벌어 음악은 취미로 즐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제대한 뒤 공인회계사(CPA) 시험을 준비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솔깃했다. 2년을 투자했지만 실패했다. 딴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다른 사람들은 안녕한지 궁금해졌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불안에 휩싸인 사람은 저만이 아니더라고요. 서로 문제를 공유하지 않으니 나 혼자만 불안한 거 같은 초조함이 들고,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한테 돌리는 것 같아요. ‘왜 나는 못났을까?’라고.” 사람들 사이를 이어줄 ‘고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방위 문화인터뷰 웹진을 표방하는 <더힐>의 시작이었다. 지난 1년간의 웹진 활동을 통해 그는 불안을 완벽히 제거하는 건 힘들다는 것을 깨쳤다고 한다. 어차피 평생 안고 가야한다면, 불안과 사이좋게라도 지내고 싶다. 구체적인 방법은 자신도 잘 모른다고 했다. 다만,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공유하고, 앞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과 소통한다면 길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불안한 20대와 인생사를 들려줄 수 있는 이들을 이어주는 ‘휴먼라이브러리’ 행사 기획은 그래서 시작했다. 세상은 이미 ‘같은 고시생끼리도 서로 고민을 잘 나누지 않는’ 시대가 됐다. 그는 그런 각박함이 낯설지만, 그래서 ’휴먼라이브러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내 찌질함을 이야기하는 게 부끄럽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나 봐요. 이런 과정에서 또 배우는 거겠죠.” 현씨는 당장 내일의 걱정을 접어놓고 살다 보면 오히려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남들 다하는 토익 공부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서는 살길이 보이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쉽사리 권할 수 있는 삶은 아니다. 웹진 운영비는 단기 아르바이트나 음악 관련 글을 써서 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개인은 사람들 가운데 존재할 때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더힐>의 소갯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진 김정효 김태형 박종식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베트남-한국 16살이상 결혼못하는 법 추진
■ 검찰, 노정연씨 ‘금품수수 의혹’ 본격 수사
■ 새누리당 오늘 1차 공천자 발표
쇄신보다 ‘계파안배’ 조짐
“소통 커녕 불통 넘어 먹통”
■ “지난번엔 촉새가 나불거려서…” 박근혜의 ‘옐로카드 리더십’
■ ‘때벗기기’ 게임 개발한 여고생 “깽판쳐야…”
돌아온 건 자책과 우울
정치 참여로 불안 해소 “20대가 만드는 20대를 위한 휴먼라이브러리… 우리, 불안과 사이좋게 지내볼까?” 포털사이트에서 우연히 발견한 글귀에 황혜지(22·여)씨의 눈이 번쩍 뜨였다. 20대를 위한 ‘휴먼라이브러리’(사람책 도서관) 기획단을 모집한다는 글이었다. 휴먼라이브러리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 대신 생생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해줄 사람을 만나는 ‘사람 도서관’이다. 황씨는 사람들을 만나 터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길이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엔지오(NGO) 활동가가 되고 싶지만, ‘돈 안 되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불안하다.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판단을 하고 싶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엔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황씨는 지난달 2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의 지역사회 생활협동공동체 ‘민중의 집’에서 20대 남녀 12명과 자리를 함께했다. 다음달 11일 서울 서초구 ‘서초창의허브’에서 열릴 예정인 휴먼라이브러리 기획단에 지원한 이들이었다. 한명씩 주뼛쭈뼛 일어나 자기소개를 해나갔다. 주위의 시선이 두려운 백수, 대학 입학이 늦어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생각하는 청년,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직장인, 희망만 말하는 청춘 이야기가 불편하다는 대학생 등이 한데 모였다. 모두 다른 얘기를 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은 한가지, 불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양하니까 불안 요인도 다 다를 줄 알았는데 모아놓고 보니 ‘경제적 어려움, 자괴감, 하면 된다는 식의 강요, 타인과의 소통, 비교’라는 다섯가지 카테고리로 정리가 되더군요.” 황혜지씨는 한때 심각한 슬럼프를 겪었다. 자신없고 못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 ‘범생이’인 황씨는, 부모와 세상이 원하는 길로 별다른 고민없이 쭉 나아갔다. 2009년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에 진학한 뒤에도 높은 학점이 자신감을 받쳐줬다. 그런데 이란어만 공부해서는 어릴 때부터 꿈꿔온 국제 엔지오(NGO) 활동가가 되는 데 제약이 있을 것 같았다. 2학년이 되면서 스페인어과로 전공을 바꿨다. 스페인어와 학교가 의무화하고 있는 이중전공에 의한 국제학 공부는 그가 꿈꾸던 삶의 지렛대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좌절이 시작됐다. 이란어는 배운 사람이 거의 없어 모든 학생의 출발선이 같았지만, 스페인어는 달랐다. 듣는 과목마다 재수강이 반복됐다. 외국어고 출신, 교포,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과 경쟁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제학 수업은 100% 영어 강의였다. “외국에서 살다 온 애들과 강의실에 앉아 있으면 제 책상은 외딴 섬 같았어요. 같은 학문을 한국어로 하면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 안 되고 소외감이 느껴지니까 학문에 대한 흥미도 떨어졌어요. 자책도 많이 했습니다.” 2010년 8월, 우울함을 견디다 못한 황씨는 학교 내 심리상담실을 찾았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그곳을 찾고 있었다. 자신도 잘 몰랐던 자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공부 계획표를 꼼꼼히 짜는 게 적성에 맞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줄 없는 노트에 자유롭게 낙서를 하다 보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황씨는 그동안 자신의 존재감을 외부 평가를 통해서만 확인했다고 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땐 성공법을 제시해주는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지금 몇 가지를 실천하고 있나 맞춰봤어요. 그런 책을 읽으면 성공에 한 걸음 다가서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요구하는 게 점점 너무 많아지는 거에요.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 그런 책에서 말하는 삶이 정답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여전히 주위의 평가와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지만, 더이상 자책만 하지는 않는다. “저는 저 자신이 매력있다고 생각해요. 건강하고 잘 웃잖아요. 그런데 사회적 잣대로 보면 왜 이렇게 모자란 인간이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도록 스스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싶어요.” 그가 선택한 불안 해소법은 참여다. 지난해엔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집회 현장에 용기를 내어 나가봤다. ‘1% 대 99%’ 중에서 99%의 어디쯤에 속할 것이라는 황씨가 처음 찾은 곳은 금융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아큐파이 서울(Occupy Seoul)’ 집회 현장이었다. 좌파나 우파를 떠나서 참여자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몸으로 움직이는 대신 말만 많았던 건 아닐까 자신을 뒤돌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깃발과 구호는 여전히 낯설다고 한다. “정치에 대해 무심했어요. 그렇지만 사회변화를 이끌 수 있는 정당이 있다면 가입하고 싶어요. 정치권에 변화가 없더라도 무기력해지진 않을 겁니다. 꾸준히 활동하는 시민단체도 있잖아요. 뜻이 맞는 단체에 도움을 주고 싶기도 해요.” 알바생,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다
커피점 상대로 진정 낼 때
‘청년유니온’이 든든한 벗 정당한 요구를 ‘욕심’으로 평가절하당하며 끙끙 앓다가, 연대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이도 있다. 서유란(24·여)씨에게 ‘청년유니온’은 지난 2년 동안 힘겹기만 했던 사회생활에서 처음 얻은 든든한 ‘내 편’이다. 그는 지난해 말 대형마트에 입점한 커피 전문점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14시간 내내 서서 일했다. 식대를 제외하고 일한 시간만큼 계산된 임금(시급 4500원)만 받았다. 8시간 이상 일할 때 주는 연장근무수당과 야간수당을 요구했지만 업주는 딱 잘라 거절했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다. 어느날 인터넷을 뒤지다 아르바이트생 주휴수당(주 6일을 근무하면 하루를 쉬더라도 쉬는 날 하루치 몫으로 지급해야 하는 임금)을 떼먹는 커피 전문점을 고발하는 기사를 발견했다. 서씨 역시 주휴수당은 구경조차 한 적이 없었다. 자신보다 어린 ‘청년유니온’ 활동가를 만나 함께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냈다. 두 달간 받지 못한 각종 수당은 50만원에 달했다. “주스가 한잔에 6000원이에요. 그런데 정작 커피 전문점 알바생은 1시간을 일해도 주스 한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임금이 왜 오르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그만둬도 대체 인력이 너무 많으니까,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알바생들은 그냥 넘기죠. 알바생들이 힘을 합쳐 다 함께 파업해보자는 이야기를 농담처럼 하기도 했죠.” 그는 곧 청년유니온에 가입했다. 전문대에서 광고를 공부한 그는 졸업한 뒤 대학 편입을 준비했다. 2년간의 배움으로는 취직을 해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4년제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했다. 부모님은 자영업을 하지만, 소득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학비 마련은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2010년 방송통신대에 편입하면서 알바 인생이 시작됐다. 카페 서빙, 학원 보조강사, 콜센터 상담원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부딪친 세상은 험난하기만 했다. 어느 카페에선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다가 “어린애가 돈 밝힌다”는 핀잔만 들었다. 공공기관에서 24시간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할 때는 성난 시민들의 화풀이를 받아줘야 했다. 회사에 부조리한 점을 지적하면 부조리는 그대로 남고, 서씨만 불만 많은 직원으로 손가락질당했다. 서씨는 요즘 오스트레일리아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보다 시급이 높은 해외로 나가 진로를 고민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어서다. 그는 전문대에서 공부했던 광고 일은 더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불공정’ 세상을 부추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느 사회에나 빈부격차가 있지만 노력하면 그 차이를 줄일 수 있어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는 거죠. 꽉 막힌 도로 위의 차 안에서 경치를 즐기는 사람을 보여주며 ‘내 이름은 긍정입니다’란 글귀를 내보내는 광고가 있어요. 비판하지 말고 긍정적으로만 살라는 얘기인데, 사회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요.” 불안한 고시생, 인터뷰어가 되다
소통 고리로 잡지 만들며
불안한 20대 서로 치유해 황혜지씨의 눈길을 잡아끈 ‘휴먼라이브러리’ 기획단 모집글을 쓴 사람은 웹진 <더힐(the heal)>의 현승인(26·남) 편집장이다. 대학생인 그는 지난해 3월 이 잡지를 창간했다. 제호에 담긴 ‘치유하다’란 뜻은 자신을 비롯한 20대 청춘들을 겨냥한 것이다. 현씨는 자신을 ‘뭐하나 특별하게 잘하는 게 없는 20대 청년’이라고 소개했다. 광주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현씨 역시 외환위기 여파로 가세가 기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10대 시절부터 랩을 했다. 음악이 좋았고,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러다 군악대에 복무하면서 스스로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 돈을 많이 벌어 음악은 취미로 즐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제대한 뒤 공인회계사(CPA) 시험을 준비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솔깃했다. 2년을 투자했지만 실패했다. 딴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다른 사람들은 안녕한지 궁금해졌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불안에 휩싸인 사람은 저만이 아니더라고요. 서로 문제를 공유하지 않으니 나 혼자만 불안한 거 같은 초조함이 들고,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한테 돌리는 것 같아요. ‘왜 나는 못났을까?’라고.” 사람들 사이를 이어줄 ‘고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방위 문화인터뷰 웹진을 표방하는 <더힐>의 시작이었다. 지난 1년간의 웹진 활동을 통해 그는 불안을 완벽히 제거하는 건 힘들다는 것을 깨쳤다고 한다. 어차피 평생 안고 가야한다면, 불안과 사이좋게라도 지내고 싶다. 구체적인 방법은 자신도 잘 모른다고 했다. 다만,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공유하고, 앞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과 소통한다면 길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불안한 20대와 인생사를 들려줄 수 있는 이들을 이어주는 ‘휴먼라이브러리’ 행사 기획은 그래서 시작했다. 세상은 이미 ‘같은 고시생끼리도 서로 고민을 잘 나누지 않는’ 시대가 됐다. 그는 그런 각박함이 낯설지만, 그래서 ’휴먼라이브러리’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내 찌질함을 이야기하는 게 부끄럽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나 봐요. 이런 과정에서 또 배우는 거겠죠.” 현씨는 당장 내일의 걱정을 접어놓고 살다 보면 오히려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남들 다하는 토익 공부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서는 살길이 보이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쉽사리 권할 수 있는 삶은 아니다. 웹진 운영비는 단기 아르바이트나 음악 관련 글을 써서 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개인은 사람들 가운데 존재할 때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더힐>의 소갯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진 김정효 김태형 박종식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베트남-한국 16살이상 결혼못하는 법 추진
■ 검찰, 노정연씨 ‘금품수수 의혹’ 본격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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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신보다 ‘계파안배’ 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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