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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우리의 계모임은 야유와 응원 혹은 드잡이

등록 2012-03-02 22:45수정 2012-04-18 10:58

지난달 6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국민과의 소통’ 행사 도중 최종주씨와 배강심(61)씨가 발언권을 달라며 항의하고 있다.  최우리 기자
지난달 6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국민과의 소통’ 행사 도중 최종주씨와 배강심(61)씨가 발언권을 달라며 항의하고 있다. 최우리 기자
[토요판] 르포
‘사법불신자’들의 재판 품앗이 현장
▶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다.” 미국 법학자 올리버 홈스 주니어의 말입니다. 그런데 자칭 사법피해자들도 똑같은 말을 하는군요. 여러번 재판에 나서다 보니 거의 법 전문가가 돼버렸습니다. 이들 말대로 법원이 정말 오만하고 권위적인지 재판을 참관해보는 건 어떨까요? 서로 물고 뜯고 얽힌 채 살아가는 우리 사회를 엿보는 재미는 덤입니다.

“모자 쓰신 분은 모자 벗고 핸드폰은 꺼주세요.” 출발은 여느 법정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이내 방청석 어딘가에서 터져나온 한마디에 무겁게 깔린 법정의 엄숙함도 한방에 날아가 버렸다. “탈모 있는 분은 어떡하죠?”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청원경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급히 직원 두 명이 충원됐다. 이들이 가슴에 단 노란 띠에는 ‘공정한 재판 위해 법정녹음 의무화’란 글귀가 쓰여 있었다.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달 9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 형사법정 406호. 이곳에선 최종주(65)씨의 도로교통법 위반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눈에 띄는 건 최씨가 변호인 없이 혼자 피고인석에 앉아 있다는 점이다. 황보영태(63), 김춘기(78), 이경국(52), 유미자(54)씨 등 방청석을 꿰찬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은 방청객이라기보다 적극적인 응원단에 가까워 보였다.

끝내 승복할 수 없다는 ‘속도초과 벌금 6만원’

이날 최씨를 법정에 세운 죄목은 ‘속도 위반’이었다. 최씨는 지난해 3월21일 영동고속도로 인천에서 강릉 방면 150.8㎞ 지점을 달리다 무인단속카메라에 찍혔다. 당시 속도는 101㎞. 제한 속도는 시속 80㎞였다. 최씨가 내세운 무죄 근거는 다음과 같다. 도로교통법 19조에는 고속도로의 경우 최고제한속도가 시속 100㎞이고 최저속도는 시속 50㎞인데 경찰청장이 판단해 시속 80㎞로 제한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이런 제한조처는 어디까지나 엄밀한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 경찰의 행동엔 허점도 많았다. 최씨가 도로공사와 강원지방경찰청한테서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받은 자료엔 같은 단속기의 설치시점이 일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표지판 설치 시기도 정보공개 청구를 한 이후였다. 최씨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다. 최씨는 즉결심판 결정에 불복해 벌금 6만원짜리 과태료 딱지를 들고 서울에서 원주까지 5번을 왕복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주변엔 최씨처럼 사법당국이 내린 결정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이들 중에는 억울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스스로를 ‘사법피해자’로 규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공기업 기술직으로 20여년간 일한 최씨 역시 그간 부동산 관련 소송 등 몇차례 민사소송에서 진 뒤 ‘사법피해자모임’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재미있는 건 사법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재판계’가 꾸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재판계란 일종의 재판 품앗이를 말한다. 사법당국의 결정에 불복해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돌아가며 방청객으로 나가 재판부에 항의하거나 피고를 응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날 법정에서도 재판부와 재판계 소속 방청객 사이엔 기싸움이 내내 계속됐다. 급기야 최씨가 준비한 서류를 확대할 스크린을 설치하는 대목에선 갈등이 폭발하기도 했다. “공개재판인데 왜 방청객은 못 보나요? 옆으로 화면 좀 돌려주시죠.” “좀 조용히 하세요!” 날선 대화는 몇 차례 더 오갔다. “재판장님, 제 생각인데요. 공정하고 진실을 다투는데 화기애애하면 왜 안 되나요?” “보실 수 있게 할 테니 조용히 하세요.” 10분 남짓 이어진 최씨의 변론 도중 방청객들은 “어머” “쳇, 웃긴다” 따위의 추임새로 최씨에게 힘을 보태기도 했다.

결국 이날 재판은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최씨가 자신과 통화한 이효경 강원지방경찰청 제7지구대 경위와 이석재 한국도로공사 직원을 증인으로 신청하자, 판사는 이를 기각했다. 차분하던 최씨는 “재판장님, 아니 그러면, 무인카메라로 단속됐으면 장비가 책임져야 하나요?”라고 묻자, 방청객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더 듣지 않겠습니다. 더 제출하실 자료나 증거 있습니까?” “재판장님,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다 순서가 있죠. 왜 증인신청을 안 받아줍니까? 재판장 기피신청합니다!”

저마다 한맺힌 사연 품고
“당신의 심판불복 응원합니다”
법정들을 돌기 시작했다

“왜 안돼?…어머… 쳇 웃기네”
“재판부 기피신청합니다.”
“사법파쇼예요” “세금 아깝다”
결국 문을 박차고 나가다

“사법피해자” 자처… 다소 황당해 보이는 주장도

최씨의 고함이 끝나기 무섭게 방청객들이 거칠게 일어섰다. “나와요. 나와!” 목소리가 큰 황보씨가 앞장섰다. 방청객의 동요에 긴장한 건 법원 직원들뿐, 법대 위의 판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향후 일정을 통보하고 빠르게 법정을 떠났다. “3월8일에 이어가겠습니다.” 방청객들 역시 “사법파쇼예요”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야” “세금이 아깝다”는 말을 쏟아내며 법정 문을 박차고 나섰다.

현재 다양한 ‘사법피해자’ 모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란 힘들다. 가장 많은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는 인터넷 카페 ‘좋은 사법 세상’의 회원은 2300여명. 이 가운데 활동이 가장 왕성한 30명 정도가 모여 ‘재판계’를 꾸리고 있다. 세상의 편견이나 사법당국의 눈초리에도 아랑곳 않고 집요하게 싸우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유미자씨는 2005년 6월 첫딸을 살인사건으로 잃었다. 유씨는 사건 정황상 성폭행 가능성이 무척 높았는데도 처음부터 치정살해로 몰아간 국가기관 모두를 아직도 증오하고 있다. 경찰과 검사의 수사가 잘못됐고, 잘못된 수사 결과를 판사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게 유씨의 확고한 믿음이다. 인터넷 카페 ‘짜고 치는 판결’(짜판)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춘기씨는 재판계가 열리는 날엔 늘 수의를 입는다. 왼쪽 가슴에 적힌 숫자 ‘2437’은 2005년 1월 인천구치소에 수감됐을 당시 수감번호였다. 김씨는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1980년대부터 조상땅을 찾을 목적으로 몇 번의 재판을 경험한 김씨는 무시당하거나, 진술한 내용이 아예 조서에서 빠져 있는 걸 보면서 가슴속에 사법 불신을 한껏 키웠다. 한용순(64)씨는 폭행 피해자인 아들 사건을 검사가 판사 출신 변호인과 짜고 ‘적당히’ 처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건 이후 중풍으로 왼쪽 다리가 불편해진 한씨에게 전관예우는 뿌리뽑아야 할 악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다소 황당해 보이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이날 재판이 끝난 뒤 “이건 엄청난 사건이야”라며 기자를 끌고 간 송기숙(73)씨는 “박정희 정부 시절 외환은행에 예치해뒀던 1조원이 2007년 7월 이후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송씨는 서울남부지법에서 기각, 고등법원에서 각하, 대법원에서 혐의없음 판결을 받았으나, 지난해 2월 헌법소원을 낸 상태다.

‘사법피해자’라고 해서 반드시 옳은 주장만을 펼친다고 보기는 어렵다. <부러진 화살>과 <법과 싸우는 사람들>을 쓴 서형 작가는 “만나봤던 사법피해자들은 모두 허점이 있었고 대부분 법률을 잘못 알고 있었다”며 “그들 중에는 사법피해자가 아닌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지나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다만, 서씨는 이들이 불만을 갖고 ‘잘못된’ 신념을 키우는 데 사법부의 권위적 태도가 크게 작용한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약자들을 위한 논리가 없어요. 음주운전은 했어도 신호 위반은 안 했는데 신호 위반까지 했다고 하니 억울한 거죠. 법률정보의 비대칭성이 억울함을 더 키우고 있어요.”

(위부터) 지난달 9일 최씨의 항소심 재판이 모두 끝난 뒤 찍은 단체사진. 6일 수의를 입은 김춘기씨. 6일 저녁 식당에 모인 사법피해자들이 사법개혁을 외치며 건배하고 있다.  최우리 기자
(위부터) 지난달 9일 최씨의 항소심 재판이 모두 끝난 뒤 찍은 단체사진. 6일 수의를 입은 김춘기씨. 6일 저녁 식당에 모인 사법피해자들이 사법개혁을 외치며 건배하고 있다. 최우리 기자
건배사 “대한민국 사법개혁을 위하여!”

같은 분노를 경험한 ‘약자’들은 기댈 곳이 서로밖에 없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미치기 마련이다. 앞선 지난달 6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이 마련한 ‘국민과의 소통’ 행사장, 4시간 가까이 이어진 토론회는 사법피해자들이 패널들에게 보내는 야유와 발언권을 달라는 요청이 뒤섞여 매우 소란스러웠다. 소란스러웠던 사람들은 서로를 쉽게 알아봤다. 로비에 남아 자신의 사건을 소개했다. 근처 한 한정식당으로 옮긴 20명의 ‘사법피해자’들은 된장찌개와 소주 4병, 맥주 1병을 앞에 두고 외쳤다. “대한민국의 사법개혁을 위하여!” 술잔이 한 순배 돌자 대표와 부대표, 총무가 정해졌다. 좋은 기사에 댓글도 많이 달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활용한 홍보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 오갔다. 이날 처음 만난 울산 출신의 김영란(54)씨와 부산에서 온 김진희(55)씨는 동향이라는 이유로 곧장 오빠, 동생이 됐다. 자신을 부정부패추방실천시민회 대표라고 밝힌 박흥식씨는 법률지원을 하고 사무실 무상 대여를 약속했다. 그러던 중 김춘기씨에게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그날 티브이에서 ‘국민과의 소통’ 행사 9시 뉴스를 본 지인이 보낸 것이다. “화끈한 모습 파이팅!” 동시에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핏대 세우며 싸운 싸움이 지상파 방송에서 소개됐다는 사실에 모두들 아이처럼 기뻐했다.

언제쯤 법의 무대에도 활짝 열린 ‘소통’의 날이 찾아올 수 있을까. 이날 행사를 지켜본 사법연수원생 신세희(26)씨는 이런 소회를 털어놨다. “이분들이 단지 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법으로 해결이 안 돼 이 자리까지 나온 것 같아요. 공정하게 심사해서 원고와 피고 측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판결이 나오도록 법원의 변화 의지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소통이 잘 안된 건 분명하네요.”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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