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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그리스와 제주는 왜 비극의 근·현대사를 품었나

등록 2013-02-08 15:10수정 2013-03-03 18:02

아테네 중심부에 있는 신타그마 광장에서 바라본 그리스 국회의사당의 전경이다. 신타그마 광장은 1944년 12월3일의 사건을 알고 있을까.
아테네 중심부에 있는 신타그마 광장에서 바라본 그리스 국회의사당의 전경이다. 신타그마 광장은 1944년 12월3일의 사건을 알고 있을까.
[그리스에서 제주를 보다]
① 신타그마 광장에서 제주 3·1사건을 생각한다

▷ 관련기사 (제목을 누르면 기사로 이동합니다)
① 신타그마 광장에서 제주 3·1사건을 생각한다
② 칼라브리타 학살과 북촌리 학살
③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4·3’ 수형인들
④ 신화의 나라, 저항의 나라

⑤ 저항과 비극의 서사, 스코페프티리오
⑥ 그리스의 홀로코스트 ‘유대인 절멸’
⑦ 기아의 어머니와 절대권력의 무상
⑧ 전쟁기념관과 쓰여지지 않는 역사
⑨ 그리스의 위기…문화와 경제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몇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로 대표되는 ‘신화의 나라’, 파란 지붕에 하얀 벽체의 건물이 아름답게 들어선 산토리니섬, 그리고 지난 1~2년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그리스 경제 위기다. 현재의 그리스는 외신을 타고 나오는 경찰과 시위대의 격렬한 싸움, 정부의 재정긴축안에 항의하는 시위 모습이 주류를 이룬다.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 억압받고 고통받았던 긴 과거, 내전과 반공극우독재정권으로 점철됐던 비극의 근·현대사, 점령 시기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르고 있다는 경제 위기. 신화 속에 살아 숨쉬는 영광은 짧았고,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20세기 중반 그리스와 한국은 너무나 닮았다. 제국주의 침탈 이후 유사한 역사적 경로를 걸어왔다. 그리스는 독일의 침탈을, 한국은 일본의 침탈을 경험했으며, 이런 경험은 해방 이후 두 나라에서 정치·사회적 갈등의 심화와 확대를 가져왔다.

1944년 10월 해방을 맞은 그리스와 1945년 8월 해방된 한국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상황’에 노출돼 있었으며, 양국은 외세의 개입에 전면적으로 휘말렸다.

냉전체제 형성기의 그리스와 남한에서는 국가 건설 과정에서 좌·우익 세력이 충돌했고 미국의 적극 개입으로 반공·우익정권이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와 남한, 특히 제주도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그리스는 1941년 4월 나치 독일에 점령된 뒤 독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 불가리아 등 3개국의 분할 점령통치에 놓였다. 점령통치는 가혹했고, 이에 맞선 그리스인들의 민족해방투쟁은 치열했다. 점령 시기인 1943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좌·우파 사이의 무력충돌은 내전의 기원이 됐다. 내전은 1946년 3월부터 1949년 10월까지 꼭짓점을 찍었다. 그리스 내전으로 희생된 이는 10만~15만여명으로 추정되고, 강제로 흩어져야 했던 주민은 70만여명에 이른다. 마을 2000여곳이 점령 시기 독일군의 대게릴라전으로 초토화됐다. 1940년대의 그리스는 전쟁과 점령, 내전과 학살로 점철됐다. 재건과 발전은 힘들었고, 심리적 상처는 너무나도 깊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0월31일 4·3 사건 발생 55년 만에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는 자리에서 ‘국제적 냉전’이 몰고 온 사건이라고 언급한 바 있듯이, 제주 4·3도 냉전체제 형성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스 내전 때는 좌·우파가 치열한 무력투쟁을 전개했다면, 제주에서는 군·경이 일방적으로 벌인 진압전투였다. 미국은 제주 4·3의 발발부터 사실상 끝난 1949년까지 거의 모든 사건의 전개과정을 기록하고 보고했다.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도 제주도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국의 관점에서 그리스가 소련의 지중해 진출을 막고 중동으로 가는 사활적 이해가 걸린 전략적 요충지였듯이, 1945년 10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제주도에 왔던 미군은 “지도를 대충 보더라도 제주도가 지정학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인식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보좌관들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라고 빗댔다. 그는 “우리가 지금 충분히 강력하면, 우리가 그리스에서 했던 것과 같이 그들(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선다면, 그들은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 내전에 미국이 개입한 시기와 거의 비슷한 무렵, 제주도를 비롯한 남한은 좌·우익의 대립이 뜨거웠던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였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자 제주도를 ‘동양의 그리스’로 비유하고 주목했다. 외신도 1948년 5·10선거를 전후한 시점의 제주 4·3 사건과 그리스 내전의 전개과정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관심을 표명했다.

제주 4·3을 20년 넘게 취재해온 기자는, 2012년 8월 그리스 내전의 기억을 드러내주는 현장을 밟았다.

그리스의 유서깊은 호텔 그랜드 브레타뉴. 호텔 바로 맞은 편이 신타그마 광장이다.
그리스의 유서깊은 호텔 그랜드 브레타뉴. 호텔 바로 맞은 편이 신타그마 광장이다.

■ 그리스 경제 위기의 그늘을 보다 푸른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광장 양쪽 옆으로 도열해 있다. 그 아래 긴 의자에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쉬고 있다. 광장 분수대에서는 비둘기들이 앞다퉈 물을 마시고 있다. 이곳이 아테네의 중심지 신타그마(헌법) 광장이다. 1843년 최초의 헌법 공포를 기념해 조성한 광장은 수많은 집회와 기념행사로 열기가 뜨겁다.

근대 그리스 국가 건설의 주역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이름을 딴 국제공항에서 버스(X95)를 타고 50분가량 지나면 만나는 종점에 광장이 있다. 관청과 가게, 호텔들이 몰려 있는 이곳은 전세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여기저기 웃통을 벗고 골판지를 깐 채 그늘을 찾아 누워 있는 노숙인들의 무기력한 모습이 확 눈에 들어온다. 신타그마 광장만이 아니라 번화가의 길가에도, 거리의 뒷골목에도 노숙인들이 보였다. 말로만 듣던 그리스 경제의 그늘을 직접 확인하는 듯하다.

‘무명용사의 묘’는 광장 위 도로 건너쪽에 있다. 그 뒤로는 신문·방송에서 보던 그리스 국회의사당이 서 있다. 무명용사의 묘 앞에서 벌어지는 의식 장면은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다.

광장 한쪽의 그랜드 브레타뉴 호텔. 이 하얀색 호텔은 점령과 내전 시기 연구서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신타그마 광장과 함께 그리스의 근·현대사를 그 자리에서 지켜봐온 산 증인이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본부가 있었고, 1944년 12월3일의 봉기 이후 아테네 시가전이 벌어졌을 때는 정부 각료들의 피난처였다던가. 이 광장을 흔들었던 그날의 잿빛 총성은 어디로 갔을까.

■ 신타그마 광장 1944년 12월3일 일요일, 비무장 시위대를 겨냥한 경찰의 발포는 그리스 사회를 뒤흔들어놓았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시민들이 아테네 근교에서 걷거나 트럭이나 승용차를 타고서 신타그마 광장으로 향했다. 아테네에서 꽤 멀리 떨어진 피래우스에서도 모여들었다. 좌파가 조직한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2차 대전 때의 추축국, 특히 독일과 맞서 싸운 저항단체(민족인민해방군)를 해산하고 새로운 군대로 대치하려는 정부의 발표에 항의하러 삶터를 나섰다.

경찰은 모든 도로를 봉쇄했다. 바리케이드를 이용해 광장으로 연결된 도로들을 차단했다. 그러나 파네피스티우 거리와 신그루 거리 등 신타그마 광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물결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어마어마한 시위대 숫자만으로도 그들을 압도했으니!

오전 10시30분께, 시위대가 협력자 처벌과 민족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깃발을 흔들면서 무명용사의 묘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어 시위대의 한 행렬이 신타그마 광장으로 들이닥쳤다. 시위대와 경찰청 사이에는 20여명의 겁에 질린 경찰관들이 있었다. 경찰이 설정한 경계선 가까이 시위대가 행진했다. 경찰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다. 갑자기 한 남자가 경찰청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조금 뒤 공황상태에 빠진 경찰들이 잇따라 사격했다. 이 사건은 그리스 현대사의 비극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30여분에 걸친 사격이 끝나자 시위대 가운데 20여명 안팎의 시민들이 스러졌다(사망자 숫자는 12~28명으로 다양하다). 이날의 사건은 기나긴 내전의 신호탄이었다.

다음날 좌파인 민족해방전선과, 이들의 군사조직이면서 점령 시기 그리스 무장저항투쟁의 주체세력인 민족인민해방군은 총파업을 선언하고 사실상의 전투에 들어갔다. 망명에서 막 돌아온 그리스 정부로서는 이들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영국군은 탱크와 공군기를 지원해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을 압박했다.

수세에 몰린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은 정전협정을 요청했다. 아테네 전투에서만 민족인민해방군 2000~3000명이 죽었고, 7540여명의 전투원과 지지자들이 체포됐다는 것이 영국군 집계다. 이듬해인 1945년 2월12일 아테네 근교에서 체결된 바르키자 협정은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의 사실상의 항복이었다. 이 협정 뒤 민족인민해방군은 무장해제됐으며, 정부와 우익단체들의 백색테러가 전개됐다.

이들이 스러진 곳은 어디쯤일까. 광장을 찬찬히 살펴봤다. 정부 각료와 외교사절들은 저 그랜드 브레타뉴 호텔 창가에서 혼란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신타그마 광장 계단을 오르면 국회의사당이 나타난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행해지는 의장대격인 그리스의 에브조네스가 치르는 교대의식을 보기 위해 전세계 관광객들이 찾는다.
신타그마 광장 계단을 오르면 국회의사당이 나타난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행해지는 의장대격인 그리스의 에브조네스가 치르는 교대의식을 보기 위해 전세계 관광객들이 찾는다.
■ 그리스와 제주의 닮은 꼴 역사 이 혼란의 정체는 무엇인가. 신타그마 광장의 계단에 서서 당시를 떠올렸다. 구걸하는 행인과 노숙인들, 단체의 주장을 알리는 이들, 넘쳐나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그날의 혼란과 겹쳐졌다. 광장이 낯선 기자의 청각은 이미 그들의 함성으로 혼란스럽다. 아테네에서 일어난 전투 당시의 사진을 보니, 광장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신타그마 광장을 중심으로 일어난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 이 사건의 장면부터 한반도의 결절된 섬 제주도의 4·3은 너무나 닮았지 않은가. 그날의 뜨거웠던 열기가 아스팔트를 뚫고 숨막히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날도 그랬으리라. 아니, 그날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총탄을 피해 흩어졌으리라.

1947년 3월1일 제주시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열린 제27주년 3·1절 기념대회에도, 경찰의 참가 방해를 피해 제주도 곳곳에서 제도민 2만5000~3만여명이 모였다. 관덕정 광장을 지나 평화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향해 경찰서 앞에 경계를 서던 경찰이 발포했다. 이날의 발포로 시위행렬을 구경하던 초등학생부터 젖먹이 안은 부녀자까지 6명이 희생됐다. 제주도민들은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당시 미군정 경찰은 대량검거로 대응하면서 제주 4·3 사건으로 발전해나갔다.

1948년 5월 주한미군사령부나 서울의 외신 특파원들은 그리스와 남한·제주도 사태의 유사한 전개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서울에 있던 <유피(UP)통신> 서울 특파원 제임스 로퍼는 이를 간파했다. “조선은 희랍사태의 완전한 재연이다. 그리스와 한국은 지리적으로만 봐도 너무나 근사하다. 두 나라는 다 산악이 많은 반도이다. 희랍반도는 공산주의자가 지배하고 있는 ‘발칸’에 연결되어 있으며, 조선은 역시 역사적으로 소란의 온상지이며 현재 공산군이 세력을 펴고 있는 만주에 연결되어 있다.… 미국 당국은 경찰이 특히 소란한 제주도에서 수인(囚人)을 구타함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경찰은 관인(寬仁)을 약속하고 있으나 그들이 복종함은 곤란시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경찰에 대한 증오감을 선동시키기가 용이하다. 이는 희랍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희랍에는 거야(拒野)하고 난폭한 경찰부대가 있었다. 아테네에서는 1944년 12월3일에 경찰이 좌익 시위군중에 발포했다.… 조선 미국점령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희랍과 조선간의 사태 상사(相似)에 놀래고 있는데 아직 좌익과 점령부대간 사격전은 없다.”

서울에 있던 이 특파원은 그리스 사태에서 남한의 상황을, 제주도의 상황을 봤을까. 새삼 그의 안목이 놀랍다.

1944년 12월3일 아테네에서 민족해방전선의 시위에 참가한 비무장 시위대들이 신타그마 광장에서 숨지거나 다쳐서 쓰러져 있다. 일부 시위 참가자들이 달아나는 모습도 보인다. 이 사건은 ‘12월 봉기’의 신호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1944년 12월3일 아테네에서 민족해방전선의 시위에 참가한 비무장 시위대들이 신타그마 광장에서 숨지거나 다쳐서 쓰러져 있다. 일부 시위 참가자들이 달아나는 모습도 보인다. 이 사건은 ‘12월 봉기’의 신호였다. 출처: 위키피디아
■ 무명용사의 묘, 한국전쟁을 이야기하다 1940년대 3년의 시차를 두고 머나먼 땅에서 어떻게 이렇게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을까.

관덕정 광장이 각종 행사와 축제의 장소가 되듯이, 신타그마 광장도 각종 행사가 열리고 국내외 관광객들이 하루종일 붐비는 만남의 장소가 됐다. 신타그마 광장의 계단을 올라 무명용사의 묘 앞으로 갔다. 에브조네스(의장대)가 총을 들고 차렷 자세로 뜨거운 태양 아래 미동도 하지 않는다. 무명용사의 묘에는 점령 시기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매일 의장대의 의식이 치러진다.

묘에 새겨진 ‘KOPIA’(한국)라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KOPIA’라는 단어 앞에는 뭐라고 쓴 것이지요?” 옆에 있던 의장대 지휘관에게 물었다. 발칸전쟁 등 전쟁이 일어난 장소라고 한다. 국내외 전쟁터에서 죽어간 자국의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것이다. 이 지휘관은 에브조네스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했다. “한국전쟁 때 그리스의 에브조네스가 갔어요. 과거 특수부대였지요. 많은 군인들이 한국에서 희생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특수부대가 아니라 보시는 바와 같이 의장대나 마찬가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스는 한국전쟁에 파병한 유엔 참전국이다. 내전이 사실상 끝나던 즈음, 산악전과 게릴라전 경험이 풍부한 그리스 병사들이 낯선 땅 한국에 파병됐다. 그리스 주재 미합동군사고문단장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참전했고, 그가 데리고 있던 미군 참모는 그리스에서의 빨치산 토벌 경험으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부대에 배치돼 토벌을 지원했다.

의장대원들은 어느 동화에나 나올법한 우스꽝스런 신발을 신고, 텔레비전의 느린 화면처럼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관광객들이 사진 찍으려고 몰려들었다. 전세계 의장대 가운데 이들만큼 관광객의 카메라 세례를 받는 이들이 또 있을까. 관광대국 그리스의 관광종사원인 듯하다. 젊은 의장대원들은 그리스 내전을 알고 있을까.

① 신타그마 광장에서 제주 3·1사건을 생각한다
② 칼라브리타 학살과 북촌리 학살
③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4·3’ 수형인들
④ 신화의 나라, 저항의 나라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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