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출연자로 활동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양은희(가명)씨 자매의 어머니 장무개씨가 13일 오전 서울 녹번동 집에서 첫째 딸의 영정 사진에 입을 맞추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엑스트라 쥐어짜는 드라마 왕국
보조출연자로 일하던 양씨 자매
고층 건물서 떨어져 잇따라 자살
“기획사 반장 등에게 성폭행 당해”
촬영장 성폭력 사고 잇따르는데도
예방교육은커녕 감독·기획사 방관
보조출연자로 일하던 양씨 자매
고층 건물서 떨어져 잇따라 자살
“기획사 반장 등에게 성폭행 당해”
촬영장 성폭력 사고 잇따르는데도
예방교육은커녕 감독·기획사 방관
2009년 8월28일 저녁 8시18분께, 한 여성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18층짜리 건물에서 떨어져 숨졌다. 한때 보조출연자로 일했던 양은희(가명·당시 34살)씨였다. 양씨는 유서를 남겼다. “날 단단히 갖고 놀았다. 더 이상 살아 뭐 하겠니.” 보조출연 기획사 반장 등 12명을 성폭행·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엿새 뒤인 9월3일 양씨의 여동생(당시 30살)도 경기도 안양시 한 건물의 화단에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동생도 유서를 남겼다. “언니가 보고 싶다. 언니의 억울함을 풀어달라.” 언니를 보조출연자 업계에 소개한 죄책감이 컸다. 뇌출혈로 투병해오던 양씨 아버지도 그해 11월3일 숨지면서 네 식구 중 어머니만 남겨졌다.
평범했던 30대 초반 자매에게 비극이 잉태된 건 2004년 여름, 양씨 자매가 보조출연자 일을 시작하면서다. 가수의 ‘백댄서’를 하던 동생이 대학원생인 언니에게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제안했고, 자매는 2004년 7월 드라마 촬영이 이뤄진 경남 하동으로 갔다. 정작 동생은 덥고 힘들다는 이유로 먼저 서울로 와버려 현장에는 언니만 남았다.
언니 양씨는 두달여 만에 정신과를 찾았다. ‘급성 스트레스 장애’ 진단이 나왔다. 양씨는 같은 해 11월 정신과 병원에 입원해서야 “기획사 반장들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어머니에게 털어놨다. 성병인 ‘클라미디아 감염증’ 양성 진단도 받았다. 당시 의료진은 최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양씨는 짧은 시기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아 장애가 생긴 특수 사례 환자로 기억한다. 성폭력에 의한 증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산부인과 진단으로 나와야 했다. 그러나 너무 늦어서 체액 등 결정적 증거가 없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어머니 장씨는 딸을 대신해 2004년 12월 성폭행과 강제추행 혐의로 ㅇ기획사 관계자 12명을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고소했다. 양씨는 기획사 반장 ㅇ씨 등 4명이 돌아가며 성폭행했다고 진술했다. 나머지 8명은 강제추행 혐의였다. 경찰에 제출된 녹취록을 보면, 당시 양씨가 속했던 기획사 지부장 ㅇ(48·여)씨는 어머니 장씨에게 “반장이 맘에 드는 애들 한명씩 (중략) 그런 식으로 해 먹는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기획사는 성폭행 혐의를 받는 반장 4명을 해고했다. 이 기획사 부사장이었던 ㅊ(40)씨는 “성폭행 혐의로 고소된 4명 중 3명은 성관계는 인정했지만 성폭행은 부인했다”고 전했다.
담당 의사의 정신과 치료 경과 노트를 보면, 양씨는 경찰 수사 과정에서 더욱 망가져갔다. “진술하고 난 뒤 사흘간 울었다. 진술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어서.”(2005년 5월17일) “진술이 반 정도 남았는데 피의자들 얼굴을 보니 힘들다. 가해자 목소리가 생각나고 차에 가두고 협박한 것이 떠올라 불안하고 악몽을 꾼다.”(11월21일)
결국 양씨는 2006년 7월25일 어머니의 반대에도 고소를 취하했다. 그 뒤로 양씨는 공인중개사 학원과 수공예 공방에 다니고 치킨집에서 일하는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되돌아오려 애썼지만, 고소 취하 3년여 만에 목숨을 끊고 말았다.
양씨 자매의 자살은 여태껏 방송계에서 논란 중인 사건이다. 극단적 사례 중 하나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 보조출연자들이 성폭력 공포에 노출돼 있다. 10년 경력의 보조출연자 ㄱ(54·여)씨는 “내 딸처럼 어린 친구들이 촬영하러 처음 나오면 ‘여기 오래 있지 마라. 그래야 시집간다’고 충고한다”고 전했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지난 4~6월 보조출연자 4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 101명 가운데 25명이 성희롱·추행 등 성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를 벌인 영진위의 양정철 정책연구원은 “여성의 25%가 성범죄를 경험했다는 것은 예상보다 높은 수치여서 놀랐다. 이 정도로 높을 줄 알았다면 성폭력 관련 조사 문항을 더 세분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촬영장에서 절대 ‘갑’인 반장에게 항의하기는 쉽지 않다. 10년 넘게 일해 온 보조출연자 ㄱ(30·여)씨는 특히 젊은 여성일수록 성폭력에 노출돼 있다고 털어놨다. “반장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중에 따로 술 마시러 가자. 우리 집에 가자’고 하는 경우가 있지만 다음에도 이 반장과 일해야 해서 적극적 대응하긴 어려워요. 한번은 병원 장면을 찍는 상황에서 반장이 ‘야하게 입고 와라’고 요구해서 해당 기획사에 이야기한 적도 있죠.”
촬영이 시작되고 주연배우 외에는 모두 숨을 죽여야 할 때 성추행이 이뤄지곤 한다. 기획사 반장은 촬영장에서 보조출연자들의 어깨를 잡고 있다가 연기해야 할 곳으로 밀어넣는다. “반장이 여성 보조출연자의 어깨를 잡고 있다가 훑어내리는 경우가 있지만 거기서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돼요. 자세를 교정한다고 허리를 만지면서 ‘야, 똑바로 해’라고 말하는 반장도 있는데 대다수 보조출연자들은 아무 말도 못 하죠.” 3개월간 보조출연자로 일하다 지난 8월께 그만둔 ㄱ(36·여)씨의 얘기다.
남녀가 분리돼 있지 않은 보조출연자 탈의실도 성폭력이 쉽게 이뤄질 수 있는 환경이다. 영진위 조사에서, 보조출연자 400명 가운데 남녀 구분이 된 탈의실을 경험한 경우는 17.9%에 그쳤다. 성희롱 예방 교육도 보조출연 업계에선 사실상 전무하다. 영진위 조사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 경험자는 4.99%에 불과했다.
그렇다 보니, 기획사 반장이나 제작진뿐 아니라 남성 보조출연자들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진위 조사에서 전체 30명의 성폭력 가해자 중 기획사 관리자 14명, 방송사 정규직 1명 등 절반이 ‘갑’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는데, 보조출연자인 가해자도 14명으로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여성 보조출연자들은, 보조출연자로서 ‘을’일 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는 셈이다.
감독과 기획사의 미온적 대처도 문제다. 지난 5월 말 케이블방송 <티브이엔>(tvn) 드라마 <몬스타> 촬영장에서 기획사 반장 차아무개씨가 여성 보조출연자 3명을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들 보조출연자는 “흡연을 제지하면서 가슴과 엉덩이를 만지고 얼굴에 입을 맞추라고 강요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상태에서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뒤에서 지켜봤다”고 진술했다. 피해자 가운데 2명은 고교생이었다.
이 드라마를 연출한 김아무개 피디는 이런 내용을 전해듣고도 한달 동안 차씨를 교체하지 않았다. 심지어 차씨를 교체하려 한 ㅎ기획사와 계약을 끊고 ㄱ기획사와 새로 계약을 맺었다. 차씨는 이후에도 ㄱ기획사의 ‘프리랜서 반장’으로 옮겨 현장에서 보조출연자를 관리했다. 한달여 뒤 한 피해 여성이 “보조출연이라는 이유로 (차 반장이) 우리에겐 사과를 하지 않고 방송 관계자들에게만 빌고 있다. 일을 계속 하다니 어이가 없다”며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김 피디는 그제야 차씨를 촬영에서 배제했다. 김 피디는 “사실관계가 명확해질 때까지 판단을 유보했을 뿐 묵인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차씨는 결국 피해자들에게 사과했고, 피해자들은 고소를 취하했다.
가해자가 형사 처벌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영진위 조사에서도 ‘고소 등 법적 대응’을 했다는 응답은 피해 사례 27건 중 1건에 그쳤다. 절반가량인 13건은 ‘일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그냥 넘어간’ 경우다. ‘관계자에게 시정을 요구’한 경우는 2건에 불과했고, 그나마 ‘영화인 신문고 등 노동조합에 알린’ 경우는 4건이었다.
성폭력을 당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억울한 상황은, ‘엑스트라 자매 자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양씨 자매 자살 사건 이후 이들이 일했던 기획사는 부도로 폐업했다. 성폭행 및 강제추행으로 고소됐던 12명 가운데 7명은 지금도 다른 기획사의 임원 또는 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보조출연자노조는 “지상파 방송 3사에 이들이 일하고 있는 기획사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를 촉구하는 공문을 여러차례 보냈지만 답이 없다”고 밝혔다. <한겨레>는 이들 7명과의 접촉을 여러차례 시도했다. 이들 중 5명은 강제추행 또는 성폭행 혐의를 부인했고, 나머지 2명은 취재를 거부했다.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