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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이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등록 2014-05-09 19:31수정 2014-06-13 10:22

[토요판] 최병건의 자학의 거울
(4) 외상의 극복
혼란과 무력감, 그리고 분출할 곳 없는 분노가 또다시 우리를 집어삼켰습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에게 또 한번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해야 하는지, 아무 말도 않는 것이 나을지, 저 또한 깜박이는 커서만 바라보며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었습니다. 이미 무성한 말잔치에 쓸데없는 소리를 보태는 것은 아닐지, 자칫 누군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외상을 이야기하면서 이 일에 대해 침묵하는 것 또한 옳은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상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 사건에 대해, 그리고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사건을 겪으면서 느꼈던 혼란과 무력감, 그리고 공포. 그 후에 찾아오는 수치심과 죄책감, 우울, 분노. 그 모든 것이 충분히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외상에 대한 이야기는 하는 사람에게나 듣는 사람에게나 무척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상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고통을 직면할 수 있는 마음도 준비되어 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알게 돼서 모르는 역설, 그것이 외상

외상을 겪으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이제껏 알고 믿었던 세상의 의미와 삶의 가치가 산산조각 나고, 혼란으로 가득한 생경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한번 그 세상을 경험하면 다시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박하사탕>의 영호는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절규하지만, 그가 돌아갈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원래의 세상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외상은 새로운 것을 ‘알아버리는’ 경험입니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끔찍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몰라야 할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갑자기 뭐가 뭔지 모를 혼란에 빠집니다. 알게 돼서 모르게 되는 역설. 그것이 외상입니다.

세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고 꼭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원래의 시각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새로운 정보는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줍니다. 완전히 생소한 정보는 이해보다는 혼란을 초래합니다. 이 혼란에 대처하는 손쉬운 방법은 그 정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면 이 방법도 나쁠 것 없습니다. 사실, 세상의 무수한 정보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걸러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한 정보도 곧잘 무시합니다. 마음속 선입견이 어떤 정보는 처음부터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티브이의 정치 토론에서 토론자가 상대의 의견에 설득되는 장면을 보신 적은 한 번도 없을 것입니다. 상대가 어떤 정보를 제시하든 토론자들은 시종일관 자기 얘기만 합니다. 선입견으로 가득한 마음에 새로운 정보가 더해져 봤자 쇠귀에 경 읽기밖에는 안 됩니다.

앞글에서 설명한 해리는 새로운 정보를 무시하는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외상적 경험을 마음의 한 부분에 격리하는 것이 해리입니다. 그렇게 되면 외상의 일차적 고통은 줄지만 인격의 분열이라는 큰 대가가 따릅니다. 고통은 줄지만 혼란은 줄지 않습니다. 해리는 새로운 정보를 배척해서 원래의 세상을 지키려는 시도이지만,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원래의 세상은 이미 깨졌기 때문입니다. 외상에 관한 한, 무시는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해결책은 이야기뿐입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외상의 극복을 돕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가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상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내는 주관적 세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있는 그대로의 세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몸에 있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가시영역의 색만 보고 가청영역의 소리만 듣습니다. 적외선, 자외선이 있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 우리의 세상과는 무관합니다. 초음파로 지도를 그리는 박쥐의 세상과 눈을 통해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학습도 세상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중세 유럽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달린 세상이었습니다. 조선시대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세상이었고 1970년대에 우리는 공산당이 없어지면 세계평화가 찾아온다고 배웠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지금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각자의 경험에 의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내가 아는 엄마는 내 엄마이고 내가 아는 고통은 내가 겪어본 고통입니다.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다는 걸 들어서 상상할 수 있지만,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것이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운이 좋아서, 우리 대부분은 엄마에게 학대받지 않고 자라고, 고문 같은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지도 않습니다.

감각과 학습도 경험이라고 본다면, 우리의 세상은 결국 우리의 경험으로 구성됩니다. 우리 경험의 한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이 무엇인지,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나는 누구인지 압니다. 아니, 안다고 느낍니다. 경험 안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차근차근 만들어 갑니다.

외상이 궁극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외상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 의미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이야기가 외상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깨져버린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어도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들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외상이 파괴한 삶의 의미를 대신할 새로운 의미가 생긴다면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집니다. 그 의미는 외상의 피해자와 전문가 사이의 오랜 이야기를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삶의 의미는 각자의 몫입니다. 누구도 의미를 만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전문가의 역할 또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것입니다.

희생자뿐 아니라 삶의 의미도
함께 잃어버린 세월호 유가족들
위로와 격려는 별 도움 못됩니다
그분들이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함께 세워줄 이들이 필요합니다

책임자들을 엄벌해야겠지만
무력감 피하려는 한국인 타령은
외상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일 뿐
이제 집요하게 이야기를 합시다
외상에 대해, 이 사회에 대해

자기 탓과 남 탓, 실패할 운명의 몸부림

세월호 침몰과 같은 엄청난 외상을 당한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회복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분들이 잃은 것은 희생자만이 아닙니다. 그분들은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분들이 애도해야 할 것도 희생자만이 아닙니다. 그분들의 마음속에서는 잃어버린 삶의 의미에 대한 애도도 같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비로소 새로운 의미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길고 힘든 과정입니다. 섣부른 위로나 격려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옆에서 그 먼 길을 같이 걸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만일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면, 외상을 입은 마음은 ‘자가치유’를 시도합니다. 그런 시도 중 하나가 자기비하라는 것을 앞의 글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자가치유의 또 한 가지 방법은 나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탓하는 것입니다. ‘투사’라고 부르는 방법을 통해서, 외상을 입은 사람의 마음은 누군가를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해서 분노를 쏟아내고 복수를 다짐합니다. 자기 탓과 남 탓. 정반대로 보이지만 둘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외상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이유를 찾는 목적은 당연히 혼란과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탓도, 남 탓도 세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처절한, 하지만 실패할 운명의 몸부림입니다.

앞글에서 자기비하와 전능감의 관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전능감은 겉보기에는 자기비하와 정반대로 과도한 자신감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외상의 경험을 이겨냈으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인데, 외상의 무력감에 대한 역작용이기 때문에 건강한 자신감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네까짓 게 뭘 안다고?’라는 식의 우월감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사회가 경험하는 외상의 경우에는 전문적 도움 같은 것을 기대하기가 더욱 힘듭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모두가 외상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사회가 외상을 받으면 위에 열거한 자가치유의 모든 현상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외상으로 점철된 근대사를 가진 우리 사회가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서로 편을 갈라 싸우겠지만, 우리의 남 탓 또한 어느 곳 못지않습니다. 정치로 갈리고, 지역으로 갈리고, 세대로 갈리고, 심지어는 남녀로 갈려서 서로를 비방합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이 모양이고, 그들만 없으면 세상이 잘 돌아갈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의 혼란과 무력감을 누군가의 원인으로 돌려서 적개심을 뿜어내는 것입니다.

유아기적 전능감이 만들어내는 과도한 자신감이 표현되는 예로는 핵무장을 하면 아무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폭력적인 생각, 세계 최고의 줄기세포 기술을 미국이 빼돌렸다는 음모론, 민족 정서에 호소한 수준 이하 영화의 흥행,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광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서글픈 우월의식은 그 자신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자기비하 하지 말자더니, 이 글이야말로 자기비하가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비하와 반성은 다릅니다.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자는 것이지 우리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반성하고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무척 지루하고 어려운 작업입니다. 외면하고 싶은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인 타령’이나 ‘대한민국 만세’로 자꾸만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나든, 남이든,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훨씬 쉽고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일견 반성처럼 보이는 자기비하는,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은 것을 외면하는 얄팍한 방법일 뿐, 진지한 반성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우리는 졸부일 뿐 선진국이 아닙니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기사 중에 ‘껍데기만 선진 한국, 불신지옥에 빠지다’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자기비하와 우월의식이 기묘하게 섞인 우리의 자기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목입니다.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선진국이었습니까? 미국의 용병이 되어서 번 돈, 인권을 팽개치고 돈을 택해서 번 돈, 오이시디(OECD) 국가 평균의 세 배에 달하는 자살률을 대가로 번 돈으로 선진국이 되었다는 생각 자체가 반성 없는 사회의 자기인식입니다. 우리는 졸부일 뿐, 선진국이 아닙니다. 개인도, 사회도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또한 시간만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양한 토론과 뼈저린 반성이 필요합니다.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2차 대전의 전범이라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된 독일과 자신들의 잘못을 한사코 외면한 일본의 차이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군부독재를 겪은 우리는 어땠습니까? 회복에 필요한 시간도, 이야기도, 반성도 우리는 가지지 못했습니다. 친일파를 숙청하지도 못했고 독재자들을 심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혼란과 무력감이 괴로워서 과거를 외면한 채 나를 탓하고 남을 탓하기에 바빴습니다. 이제 외면을 멈추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오래 걸려도 하나하나 우리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것만이 외상에서 회복될 수 있는 길입니다.

세월호의 침몰에 관여한 자들은 당연히 엄벌해야겠지만, 그런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그래 왔듯 우리는 속시원한 결론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늘 그래 왔듯 이 사건도 어느 정도 파헤쳐지다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총체적인 부정부패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 흩어져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또 한 번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통감할 것이고, 우리의 분노는 표적을 놓쳐버린 울분이 되어 가슴을 멍들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뻔히 예상되는 이 사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외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입니다. 무력감을 피하려고 한국인 타령으로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한국인 타령, 국민성 운운은 반성이 아닙니다. 외상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늘 한국인 타령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건을 잊을 때쯤 되면 또다른 자기비하, ‘냄비근성’이라는 말로 한국인 타령을 완성했습니다. 그렇게 한 사이클을 돌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였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길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외면하고 싶겠지만, 집요하게, 끝까지 가야 합니다. 아니,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에 대해서, 우리가 입은 외상에 대해서,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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