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토요판] 윤운식의 카메라 웁스구라
기술의 발전은 군사·의료·통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가장 시급하게, 발전한 기술을 써먹으려고 달려드는 분야가 대체로 그쪽이어서 그럴 것이다. 사진도 비교적 기술의 발전이 빠르게 적용되는 분야다. 빠르게 발전하는 광학기술은 현대의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면서 놀랄 만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사진기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자꾸 오래 했다고 하니까 내가 너무 구닥다리 같지만 실은 비교적 젊은 편이다.) 새로 등장하는 카메라를 많이 접하게 되는데 최근엔 그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 장착돼 나오는 기능들은 기존의 것을 체화시키기도 바쁜 나 같은 둔재들에겐 새로운 고통과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솔직히 ‘이젠 좀 그만 나와라’라는 생각마저 든다.
새로운 물건들이 나올수록 과학기술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만 오히려 인간을 만든 창조자의 완벽함에 더욱 머릴 숙이게 된다. 참고로 난 창조론을 믿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꼭 안 믿는 것도 아니지만…. 인간의 눈을 원리로 응용한 기계가 카메라지만 인간 눈이 가지는 그 섬세함까지 가기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카메라는 인간 눈의 홍채처럼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을 조절해가면서 상을 맺게 한다. 그런데 피사체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노출 차이가 크면 한 장의 사진에선 골고루 제대로 된 상을 맺기 힘들게 된다. 사진에서처럼 뒤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광고의 광량이 오른쪽 옆의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경우, 하나의 앵글에서 광고판과 사람 얼굴의 노출이 모두 잘 나오기는 힘들다. 두 가지를 다 잘 보이게 하려면 카메라 쪽에서 사람 얼굴 쪽으로 보조광을 가해줘야 한다. 이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는 그 당시 자신의 눈으로는 오른쪽 그림자만 보이는 사람 얼굴을 제법 뚜렷하게 봤을 것이다. 사람의 눈은 보조광선이 없어도 노출 차이가 제법 나는 피사체를 한번에 인식할 수 있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해변에서 거리가 좀 떨어진 파라솔 그늘 밑에 있는 사람은 사진상으로는 까맣게 떨어지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그 파라솔 밑에 있는 사람이 내 식구인지 남의 식구인지 구별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겠다.
밝은 배경에 그림자의 형태로 사물의 윤곽만 나타나게 하는 것을 사진에서는 ‘실루엣’이라고 한다. 원래 미술에서 윤곽만을 그린 초상화를 일컫는 말이었다. 당연히 세밀한 초상화보다 값이 저렴했을 것이니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 종류의 그림을 예술적인 이유 때문인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인지 유난히 좋아하던 프랑스의 정치인이 있었는데 ‘실루엣’이란 명칭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에서 실루엣은 밝은 배경을 등진 여인의 몸매를 나타낼 때 많이 쓰이는데 그래서인지 실루엣이란 단어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약간 에로틱함을 느낀다. 나만 그런가?
사진은 지난 16일 코엑스에서 열린 ‘2015 중·장년 채용기법 박람회’의 한 장면이다. 메르스가 여전히 그 기세를 좀처럼 수그러뜨리지 않았지만 아침부터 일자리를 구하려는 중·장년들의 발길까지 잡아 세우진 못했다. 중·장년 가장들의 절박함 앞에 제법 치명적인 바이러스도 제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한창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나이에 그깟 바이러스가 실업보다 더 무서울까?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취업정보를 수집한 한 중년의 남자가 행사장 입구 쪽 구석에서 서류들을 열심히 보고 있다. 뒷배경에는 학사모를 쓴 젊은 대학생들이 활짝 웃으며 파이팅을 외친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 무언가 스펙을 쌓자는 광고다. 밝은 광고판의 빛에 그늘진 중년 남성의 그림자가 무겁고 어둡다. 저성장의 그늘, 줄어드는 일자리, 심해지는 빈부차,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경제, 어두운 중년 남성 뒤로 환하게 웃는 청년들의 앞날만큼이라도 사진처럼 밝았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조광을 쳐서라도 모두가 밝길 원하지만 실상은 실루엣도 없는 전체가 어두운 터널 같다. 우리는 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윤운식 사진부 뉴스사진팀장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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