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 안전문(스크린도어) 정비 작업 중 사고로 숨진 김아무개군을 추모하는 꽃과 메모가 붙어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토요판] 윤운식의 카메라 웁스구라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큰 배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민태원의 <청춘예찬>의 도입 부분이다. 주제만큼이나 문장이 속도감 넘치고 화려해 오히려 주인공인 ‘청춘’보다 글이 더 팔딱팔딱 뛰는 것 같았다. 시대적 배경이 일제강점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싶어서 쓴 글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글을 접했던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청춘인 시절에 이 글을 읽은 첫인상은 ‘이게 무슨 소리?’였다. 청춘의 문턱에 이제 막 접어든 어린애가 청춘이 그렇게 가슴 뛰는 것이란 걸 어찌 알겠는가? 다 그 시절을 지나온 사람들이 돌이켜보니 그랬다는 것이지.
식민지 시대의 청춘에게 청춘이 얼마나 근사한가? 잘 안 와닿는 말이지만, 식민지 시대 넘기고 산업화, 민주화 다 이루고 난 뒤 먹고살 만해졌다는데 요즘의 청춘에겐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식의 말이 넘쳐난다. 왜 지금의 청춘들은 아플까?
19살의 청춘이 고장 난 지하철 안전문(스크린도어)을 수리하다가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지난해 8월 강남역에서 일어난 사고와 판박이다. 청년은 외주업체 직원이었다. 얼마 지나면 그 외주업체가 원청업체의 자회사가 될 것이라는 소리가 있었다. 그 청춘은 서울메트로의 직원이 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했다. 19세 생일 전날에 비명횡사한 뒤 그의 가방에서 나온 것은 뜯지 않은 컵라면이었다. 일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 틈나면 먹으려고 넣어둔 것이란다. 끼니를 거르면서 흘린 땀방울은 원청이 방치한 하청의 굴레에 허망하게 사라졌다.
태어나면서부터 무한경쟁에 내몰린 청춘들에게 취직은 여전히 바늘구멍이다. 그나마 있는 일자리도 비정규직 아니면 하청이 절반이다. 두 명이 해야 할 일을 한 명이 하다 사고가 나도 개인의 부주의 탓이다. 효율성에 밀린 안전은 뒷순위로 내려앉은 지 오래다. 처음 난 사고도 아니고 몇 번의 똑같은 사고가 발생했어도 개선되지 않았다. 하청은 하청일 뿐이니까. 싫으면 관두라 하면 되니까. 돈만 좇는 사회에서 ‘청춘’은 ‘열정페이’란 가면을 쓴 자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착취의 대상이 됐다. 청춘들에게 하청노동자를 강요한 사회는 그들의 피땀을 먹으며 돌아가고 있다.
“첫째를 책임감 있게 키운 게 미칠 듯이 후회된다”는 김군 어머니의 절규가 가슴을 때린다. 또다시 지하철역 출입문엔 수많은 포스트잇이 물결친다.
‘이상! 빛나는 귀중한 이상, 이것은 청춘의 누리는 바 특권이다. 그들은 순진한지라 감동하기 쉽고… 그들은 피가 더운지라 실현에 대한 자신과 용기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상의 보배를 능히 품으며, 그들의 이상은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열매를 맺어,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김군이 목숨 걸고 일하면서 받은 한 달 급여는 140여만원, 김군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만물은 얼음에 싸여 죽을 것’이라는 말은 뒤집어 보면 청춘을 죽음으로 내모는 우리 사회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말이 아닐까? 삼포세대와 88만원 세대가 굳어져 가는 이 사회에서 청춘을 예찬만 할 수 없는 이유다.
윤운식 사진에디터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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