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숨지고 아들은 폐 상태 호전 안돼
옥시 협상 때 폐 기능 추이 알려주려
피해자 32명 폐 상태 모니터링 분석
아이들 성장하며 폐 기능 악화 가능성
“누구도 나서지 않아 직접 할 수밖에”
최승운 가습기살균제피해자유가족연대 대표가 지난 6일 오전 국회 후생관 옆 의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옥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폐 상태 모니터링 분석’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냥 있으면 누가 우리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주나요?”
최승운(41)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연대 대표는 지난달 초, 옥시레킷벤키저(옥시)와 국회 쪽에 ‘옥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폐 상태 모니터링 분석’을 제출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부모들과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어 32명(어린이 20명, 성인 12명)의 의무기록을 복사해 스스로 정리한 자료다. 자료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폐 기능이 저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7월에 최종 배상 계획을 발표할 옥시에 이 가능성을 얘기해야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속단할 수 없다”며 선뜻 나서주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나선 것이다. ‘누구도 나서주지 않을 땐 직접 한다’는 건 5년 전 두 살배기 딸을 잃은 이후부터 익숙한 일이 됐다.
평범한 두 아이의 아빠였던 최씨는 가습기 살균제를 쓰고 2011년 2살 딸을 5개월 동안 중환자실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다가 하늘로 보낸 뒤 인생이 바뀌었다. 대전의 한 정부출연기관의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아예 일을 그만두고 가습기 살균제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 옥시를 찾아가 사정하고, 그래도 안 돼 형사고발을 하고, 검찰에 수사 촉구를 하면서 이제 그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 관해선 ‘반전문가’가 다 됐다.
‘1단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 인과관계 ‘거의 확실’을 의미) 판정을 받았지만, 최씨의 아들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됐다. 1년 반 동안 키가 10㎝ 자라고 몸무게는 5㎏이 늘어 134㎝에 29㎏이 됐다. 딱 그 나이 남자아이 평균이다. 아들의 그런 성장을 지켜보면서도 최씨는 늘 불안불안하다. 반쪽(57%) 남은 폐로 살아야 하는 아들은 조금만 뛰어도 숨이 가쁘고 심장이 아프다. 병원에선 “커가며 괜찮아질 테니 지켜보자”고 했는데, 꾸준히 검진해도 아이의 폐 기능을 가리키는 수치는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 5월말, 최씨는 2년 전부터 시작한 아이의 정기검진에서 처음으로 ‘아이의 폐 기능이 악화됐다’는 설명을 들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4~5개월마다 서울아산병원 환경보건센터에서 정기적인 폐 기능 검진을 받는데, 다른 부모들도 비슷한 얘길 했다. 현재로선 치료제도, 치료 방법도 없다. 어떤 아이는 폐 이식을 고려해야 할 수도 있겠단 말도 들었다고 했다. 폐 이식 수술을 해도 10년 미만 생존율이 50% 수준이란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증세가) 나빠지고 있는 듯은 하지만 속단하긴 어렵다”며 데이터 정리·분석에 나서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정부가 확인한 1~2단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운데 19살 미만 환자만 67명이다. 그대로 있을 순 없었다. 최씨는 주변 피해자 32명의 데이터를 모아 자료를 만들기로 했다.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만난 최씨가 직접 만든 A4 용지 7쪽짜리 분량의 ‘옥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폐 상태 모니터링 분석’을 펼쳐 보였다. 자료엔 ‘노력성 폐활량’(FVC) ‘1초간 노력성 호기량’(FEV1) 등 폐 기능 관련 전문 용어가 즐비했다. “용어는 인터넷에 나와 있는 의학용어사전에서 찾아 정리했고, 똑같은 검진을 받은 32명의 폐 기능 데이터를 입력해서 만들었습니다.” 아이들의 폐활량 등 폐 기능을 나타내는 지표의 변화 추이와 성인의 추이를 나눠 그래프를 그려 누구나 일목요연하게 흐름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최씨가 만든 자료를 보면, 초등학생 이하의 피해자 아이들 20명은 분석 기간 동안 키는 평균 8% 이상 크고, 몸무게는 평균 17% 늘었다. 언뜻 보기엔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밟고 있는 듯하지만, 성장과 비교해보니 폐 기능의 경우 여러 지표들이 유지되거나 상당수는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검진을 최소 2번 이상 받은 어린이 19명 가운데 최대한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 날숨의 총량을 나타내는 FVC의 수치가 첫 검진보다 더 좋아진 사례는 7명뿐이다. 나머지 12명은 제자리 수준이거나 더 악화됐다. 변화 폭은 나빠진 사례가 더 컸다. 최대한 들이켠 숨을 내쉴 때 첫 1초간 내쉰 양을 가리키는 FEV1의 경우, 수치가 나아진 아이가 5명에 불과했다. “아이들의 이런 폐기능 변화가 (옥시 쪽 배상안에)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옥시 쪽에 제대로 알려줘야지요. ‘당신들이 만든 제품이 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똑똑히 보라’고.”
일주일 동안 만든 이 자료도 지난달 초 옥시와 국회, 환경부 쪽에 건넸다. 옥시 쪽은 현재 “확정될 배상안에 피해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고려해 반영하겠다”고 답변한 상태다. 최씨가 국회를 찾은 6일, 20대 국회는 본회의에서 전원(재석의원 250명) 찬성으로 ‘가습기 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구제 및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국정조사’ 건을 의결했다. “5년 동안 수사에 늑장을 부려 기업이 증거를 인멸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검찰은 국정조사 대상에서 쏙 빠졌습니다. 조사 의지가 있는 겁니까.” 최씨는 국회를, 정부를, 기업을, 언론을 믿지 않는다.
박수지 기자 suji@hani.co.kr [디스팩트 시즌3#2_장하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상처받을 영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