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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소한 전과 있으면 칼 소지만 해도 처벌?

등록 2016-09-26 20:29수정 2016-09-26 20:32

동네변호사가 간다
‘우범자’라는 형벌이 있다. 우범자의 국어사전상의 의미는 ‘범죄를 범할 우려가 있는 자’다. 과연 우범자라는 이유로 아직 아무런 범죄행위를 하기 전이라도 형사 처벌이 가능할까. 놀랍게도 가능하다.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처법) 제7조는 ‘우범자’라는 규정을 두고 ‘정당한 이유 없이 이 법에 규정된 범죄에 공용될 우려가 있는 흉기나 그 밖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거나 제공 또는 알선한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나의 국선변호를 받기로 한 ㅂ씨는 밤에 가방에 칼을 넣고 다니다가 우범자 규정에 의해 기소됐다. 상담을 하기 위해 만나 보니, ㅂ씨는 사소한 전과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몇 년째 매일 새벽 신문을 돌리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평범한 40대 남성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과대망상증이 있다는 것. ㅂ씨는 누군가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늘 느끼고 있었지만 어려운 형편에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신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새벽 신문배달을 할 때 가방에 식칼을 넣어서 다녔던 것이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신문을 다 돌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새벽에 동네를 순찰하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자 불안한 마음에 도주했다. 칼을 숨기고 도망가던 그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은 분명 범죄를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집을 압수수색했지만 절도 피해품이라든가 별다른 범죄 정황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를 폭처법의 우범자로 기소했다.

변호사 생활을 10년째 해온 나조차도 우범자라는 처벌 규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했을 정도로 이 규정은 생소했다. 흉기 소지만으로 아무런 범죄적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처벌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식칼은 가정에서 요리를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범죄에 악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안전한 물건이기도 하고 위험한 흉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냥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정당한 이유 없이’ 흉기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는 사람만 처벌한다는 것인데, 과연 정당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ㅂ씨는 막연한 불안감을 늘 느끼고 있어 호신용 칼을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이것은 정당한 이유가 아닌가. 정당한 이유는 과연 누가 판단하는 것인가?

결국은 ㅂ씨의 초라한 행색이 문제였다. ㅂ씨가 좋은 옷에 좋은 차를 타고 새벽 시간에 거리를 다녔다면 경찰 검문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검문을 받았을 때 차량에 칼이 있었더라도 적당히 둘러대면 우범자로 처벌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처벌을 하느냐 마느냐가 경찰의 선입견에 달린 셈이다. 이 우범자 처벌 규정이 있는 폭처법은 문제가 많은 법이다. 우리나라는 1926년부터 일본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여 집단적 폭력행위를 형법보다 가중해서 처벌했다. 그러다 우리 헌법 시행과 함께 없어졌던 것을 19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집단적, 상습적 또는 야간에 폭력행위를 하거나 이러한 범죄를 목적으로 폭력단체를 만드는 자를 가중 처벌하는 내용으로 지금의 법을 만들었다. 제정 연혁을 보면, 2016년의 법조인인 내가 우범자 규정에 대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 그럴 만도 하다 싶다.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죄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 놀랍지 않은가. 폭처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형법에 이미 처벌 규정이 있는 폭행, 상해, 주거침입죄 등을 지나치게 가중 처벌하여 중복 처벌하고 전과자를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 헌법재판소에 의해 각 규정에 대한 위헌 판결도 이어지고 있다. 경찰청 예규인 ‘우범자 첩보 수집 등에 관한 규칙’을 보아도 우범자는 조직폭력배나 중범죄 전과자 중 성격 또는 환경으로 보아 재범할 우려가 있는 사람이며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을 뿐이다. ㅂ씨는 여러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현행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처벌의 자판기는 작동했다. 기소라는 동전이 들어가자 자판기 판사는 유죄라는 커피를 내놓은 것이다. 2016년의 법정에서 1960년대의 법을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일. 이제는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조수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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