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강훈의 제안으로 시작된 ‘차벽을 꽃벽으로’는 뜨거운 참여열기와 함께 다양한 논쟁도 낳았다. ‘시위는 평화로워야만 하는가’, ‘진압경찰을 어디까지 배려해야 하는가’, ‘과격한 표현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가’, ‘민주시민은 질서시민인가’.
오늘로 광장에서 48일을 보내고 있다. 7년 전 광화문 광장이 생긴 이래, 나는 숱하게 이곳을 들락거렸다. ‘외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번듯한 광장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이곳엔 사람이 있었다. 16년 전, 문정현 신부는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소파)의 개정을 외치다가 경찰에 쫓긴 끝에 오래된 은행나무에 올랐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두 여중생의 죽음을 추모하고 항의하려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미대사관을 에워쌌을 때, 이곳은 법적으로 차도였으나 의미로는 광장이었다. 광장이었던 곳에 광장이 들어선 셈이다.
권력의 경호원들은 이곳을 ‘마지노선’으로 생각했다. 광화문 네거리가 뚫리면 청와대가 코앞이니 그럴 만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이명박이 세웠던 거대한 컨테이너 바리케이드, 이른바 ‘명박산성’이 이순신 동상 앞을 기점으로 설치됐다는 점은 이곳의 경호지리적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정치적 반대자와 서민에겐 가혹하리만큼 법질서를 앞세웠던 박근혜 정권. 그러나 그들은 법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파괴자였다.
보란 듯 광장을 만들어놓고도 권력자들은 광장의 정치색을 빼기 위해 애썼다. 이루 헤아리기 힘들 만큼의 관제행사로 광장을 점유하기 일쑤였다. 때론 이 광장의 주인이 시민인지 경찰인지 헷갈리는 날도 잦았다.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은 세월호 유족들이 “언제든 찾아오라”던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온몸을 밀고 나아갈 때 가장 먼저 가로막히고, 가장 먼저 포위되고, 가장 먼저 쓰러져 울었던 곳도 이곳 광화문 광장이었다.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이 광장에서 46일을 굶었다. 엄마들은 광장에서 눈물로 머리를 밀었다. 인두겁을 둘러쓴 짐승들은 이곳에서 유족을 조롱하며 피자와 닭튀김을 뜯어댔다. 청와대 김기춘 비서실장과 교감한 자들이었다. 광화문 광장 남단이 ‘세월호 광장’으로 불리기까지 어떤 장면들이 펼쳐졌나 되짚어 본다면 이곳을 오가는 발걸음은 가볍기 어렵다.
지난 11월4일, 예술검열규탄 시국기자회견에 참석했던 한 무리의 문화예술가와 해고노동자, 인권운동가들은 세월호 ‘광장 너머’를 뚫기 위해 텐트를 들고 달려들었다. 경찰은 텐트를 모조리 빼앗고, 우리의 사지를 들어 경계 너머로 버렸다. 맨몸으로 버틴 밤이 지나자, 광장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해방구가 되었다. 박근혜 최순실의 헌정농단에 분노한 시민들이 입추의 여지 없이 광장을 메워 버렸다. 차도와 인도와 광장의 물리적 구분이 사라지고, 촛불이 타올랐다. 대통령이 기겁했고, 의회가 경악했으며, 검은돈을 건넨 재벌들은 숨죽였다. 세계가 감탄했다. 시민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광장은 확장되었다. 56년 전, 4·19 혁명 당시에도 가닿을 수 없던 곳까지 횃불이 타올랐다. 비록 하루였을지라도.
“주먹 쥘 때 떠나라”는 경고는 “당신에겐 하야도 복이다”라는 말과 같다. 공주로만 살아온 그가 우리 사회 평범한 청년의 좌절과 분노를 눈곱만큼이라도 이해할까.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은 2016년을 사는 민주공화정의 시민에게 왕정시대를 경험하게 했다. 세종이 위대했다 할지라도, 오늘의 우리는 왕을 섬길 수 없다.
그렇게 두 달이 흐르고 있다. 대통령은 의회에서 탄핵됐고, 헌법재판소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아니 대비하고 있다. 광장의 온도는 살짝 내려갔다. 광장의 외침보다 법률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여기까지가 광장의 역할이었을까. 어디까지가 광장의 역할이어야 할까.
광화문 광장에 서면 저 멀리 푸른 기와집이 보인다. 그곳에 아직 괴물이 산다. 뒤돌아보면 세월호 분향소. 304명의 작은 얼굴들이 오가는 이들을 바라본다. 시도 때도 없이 주사 맞으며 달게 잤던 산 자와 잠들지 말았어야 할 죽은 이들 사이에, 지금 내가 누워 있다. 우리가 누워 있다. 지난해, 이 광장에서 물대포와 최루액을 거침없이 난사했던 경찰이 지금 함부로 날뛰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다가 돌아가신 백남기 어르신의 희생, 광장의 한 끝을 끝내 지키기 위해 피눈물 흘렸던 세월호 가족들의 끈질긴 투쟁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광장 풍경은 달랐을지 모른다.
지금 광화문 광장엔 축제와 시위가 있다. 환희와 분노가 있다. 함성과 노래가 있다. 그 아래 여전히 마르지 않은 눈물. 어느 새벽, 분향소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에 잠에서 깼다. 말린다고 말릴 수 있는 울음이 아니었다.
글·사진 노순택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