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다치거나 아플 때 속이 상하지만, 그보다 더 속상한 일은 아이가 다른 아이를 다치게 하는 일이다. 예전에 부모님이 ‘때리느니 차라리 맞고 오라’고 얘기하시곤 했는데 그게 참 맞는 말이었다는 걸 절감한다.
얼마 전 상담했던 사연이다. 초등학교에서 친구끼리 장난을 치다가 한 아이가 넘어져서 이빨이 부러졌다. 다친 아이의 부모가 각서를 써줄 것을 요구하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고 나섰다. 요구 조건은 위자료와 당장의 치료비는 물론 향후 주기적 시술이나 후유증에 대해 평생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전전긍긍하던 엄마가 물어왔다. 자기 아이가 일방적으로 잘못한 것도 아닌데 평생 책임을 져야 하는 거냐고. 물론 그건 법적으로 지나친 요구다. 친구끼리 놀다가 발생한 사고에서 무제한의 손해배상 책임이 성립하기는 어렵다. 가해행위가 위법한지도 따져봐야 하고, 다친 쪽도 잘못이 있으면 그 비율만큼 손해액은 감액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상금액은 가해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실제 손해액 범위 내여야 하고, 통상적으로 예견되는 범위를 넘어선 특수한 손해는 인정되기 쉽지 않다. 향후에 계속 필요한 치료 내역이 의학적으로 확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앞으로의 시술비를 기간 제한 없이 책임지라는 것은 무리다. 나는 합의 논의에 성의껏 임하되 다친 경위와 상해 정도에 대한 병원 진단 결과를 신중하게 확인해보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나중에 물어보니 원하는 대로 각서를 써주었다고 한다. 계속 시달리면서 아이까지 소송에 휘말리게 하는 게 힘들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각서를 써준 엄마는 현명한 것이었을까.
반면에 다친 쪽 부모의 요구가 지나치다며 대응에 나섰다가 큰 고통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ㄱ과 ㄴ이 학교에서 싸움을 했다. 경위를 보니 ㄴ이 친구들 보는 앞에서 먼저 ㄱ을 놀리며 발로 걷어찼고 ㄱ이 화를 참지 못하고 서로 주먹질이 시작되었다. ㄱ은 싸움을 잘하는 ㄴ에게 계속 맞다가, 눈을 감은 채 휘두른 주먹에 그만 ㄴ이 맞아 코뼈가 부러졌다. ㄴ의 부모는 많은 합의금과 향후 치료비를 요구했다. ㄱ의 부모가 순순히 따르지 않자 ㄴ의 부모는 학교폭력대책위원회에 ㄱ의 징계를 요구하고 ㄱ의 부모를 상대로 보호자 책임을 묻는 민사소송까지 제기했다. 치료비는 물론이고 부모의 위자료까지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ㄱ의 부모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를 폭력 학생으로 매도하는 걸 참을 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휴가를 내면서 전문가를 찾아 병원기록을 검토하고 밤새 소송자료를 만들었다. 쌍방의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ㄴ의 부모는 한발 더 나가 ㄱ을 상해죄로 형사고소하였고, 이에 맞서 ㄱ의 부모는 ㄴ을 맞고소했다. 형사미성년자라서 형사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학생이 경찰서 조사까지 받아야 했다. 결국 애초 ㄴ의 부모가 요구한 과다한 치료비보다는 줄어든 액수지만 법원의 판결로 치료비 일부를 물어주어야 했다. 그사이 ㄱ의 부모가 들인 돈과 시간, 고통은 돈으로 따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두 사례를 단순 비교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지 말하기는 쉽지 않다. 수많은 아이 싸움 중 어떤 건 웃으며 넘어가기도 하고 어떤 건 격렬한 부모 싸움이 되기도 한다. 어느 길로 가느냐는 대개 초기에 정해진다. 다친 아이 쪽의 상태와 부모의 합리적 태도 여부가 제일 중요하지만, 경험상 그것 말고도 중요한 변수가 있다. 우선 부모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경우에는 부드럽게 진행된다. 둘째로, 다치게 한 쪽의 부모가 빠른 시간 내에 다친 아이와 부모를 찾아 진심을 담아 마음을 위로하고 사과하는 경우 큰 분쟁으로 갈 확률이 적어진다. 그 시기를 놓치면 다친 아이를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에는 상처 위에 분노가 얹히게 된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적용되는 셈이다. 그 후에 진행되는 민형사 소송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를 키우는 쪽이 될 가능성이 높다. 법보다 사람의 마음이 더 무서운 법이다. 송상교/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