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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태극기 훼손’ 무죄받은 어느 청년의 사연

등록 2017-07-04 09:40수정 2017-07-04 09:49

[동네변호사가 간다]

며칠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판기일이 열리던 날, 점심시간 즈음 서울 서초동 법원 앞을 지나는데 태극기 부대가 눈에 들어왔다. 100명 남짓 되는 노인들이 “대통령님 힘내세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연히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어르신들의 손에 들린 종이 태극기를 보며, 나는 몇해 전 진행했던 형사사건의 의뢰인 김씨를 떠올렸다.

김씨는 1992년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아 입양됐다. 김씨를 입양한 부모는 2년여가 지나 이혼했고, 김씨는 자신을 입양한 어머니와 스무살까지 기초생활수급자로 지냈다. 김씨가 성인이 되면서,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김씨의 어머니가 기초생활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수급 대상자의 자녀에게 일할 능력이 있으면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부양의무제’ 때문이다. 어머니를 부양할 능력이 되지 않았던 김씨는 어쩔 수 없이 재판을 통해 어머니와의 양친자관계를 해소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김씨는 2014년부터 고용노동부의 취업 지원 프로그램에 다니며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2015년 4월18일 광화문에서는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가 열렸다. 그 전에도 이따금 세월호 추모 집회에 참여했던 김씨는 이날 시위대 앞쪽에서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에 맞섰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참가자 체포에 나서자, 흥분한 김씨는 근처 경찰버스 유리창에 꽂혀 있던 태극기(정확하게는 태극기가 그려진 종이)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며칠 뒤 태극기를 태우는 김씨의 사진이 어느 일간지 1면에 보도되었고,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은 김씨를 속히 잡아들이겠다고 밝혔다. 한달여가 지나 김씨는 어머니가 사는 집에 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수사관들에게 긴급체포됐다. 주된 혐의는 형법 제105조 위반.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이 죄로 처벌을 받으려면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이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이 있었는지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서 이 죄로 처벌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1992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은퇴에 낙담한 어느 국회의원이 지구당 사무실에 있던 태극기를 태웠다가 벌금형을 받은 사안이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를 미리 준비해 집회에 간 것도 아닌데, 김씨에게 그런 목적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경찰은 김씨에게 태극기를 태우라고 시킨 사람이 있는지, 김씨가 어느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는지 중점적으로 캐물었다. 결국 1심 재판부는 ‘김씨는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우발적으로 태극기를 태운 것으로 보여 김씨에게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다만 사건 당일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로 판단했다.)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국기를 훼손하는 행위는 30여년 전 미국에서도 논란이 됐다. 1984년 그레고리 존슨이라는 청년은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장 앞에서 레이건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항의하며 성조기를 불태웠다. 텍사스주 경찰은 존슨을 체포했고, 존슨은 기소됐다. 하지만 미국연방대법원은 성조기 훼손을 처벌하는 텍사스주 법이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어서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 판결문에서 윌리엄 브레넌 대법관은 “성조기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처벌한다면, 성조기가 상징하는 자유라는 가치가 훼손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정민영 변호사
정민영 변호사
김씨에게 적용된 형법 제105조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그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 김씨 사건의 항소심 법원은 이 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재판을 보류한 상태다. 오랜만에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살 시도까지 하는 등 한동안 방황하던 김씨는 요즘 그림을 그리며 지낸다고 했다. 그는 ‘하고 싶은 걸 시도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미술로 대학에 가기 위해 수능시험 준비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형법 제105조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 김씨는 더 이상 형사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 김씨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정민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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