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업무량 그대로…‘퇴근 도장’ 찍고 집으로 출근합니다

등록 2018-08-03 05:01수정 2018-08-03 10:16

주 52시간제 한달
③모두에게 오지 않은 ‘저녁있는 삶

인력충원 없는 노동시간 단축
남아서 ‘공짜 야근’ 하거나
퇴근 뒤 카페서 몰래 업무 계속
같은 직장서도 ‘칼퇴근’ 희비

‘주52시간’ 시행 과도기에 몸살
“노동시간 단축 연착륙 계기로”

기대와 우려가 엇갈렸던 ‘주 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된 지 한 달이 흘렀다. 제도 시행에 잘 적응한 대기업을 중심으로 가족·동료와 함께 여가를 즐기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됐다는 환호성이 나온다. 반면 ‘야근 체제’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이 무너지며 생계유지도 어렵게 됐다는 소상공인들의 아우성도 함께 들린다. 한 직장에서도 퇴근 시간 차별이 나타나거나, ‘무늬만 노동시간 단축’으로 무마하려는 꼼수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에서 여전히 소외돼 있는 이들도 많다. ‘주 52시간 상한제’ 시행 한 달,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세 차례로 나눠 짚어본다.

서울의 한 유명 백화점에서 일하는 30대 직장인 ㅈ씨의 컴퓨터는 ‘피시(PC)오프’된 이후에도 꺼지지 않는다. 회사는 근로시간 단축에 발맞춰 업무가 끝나는 저녁 6시 이후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지는 ‘피시오프’ 프로그램을 설치했지만, 그때까지 업무를 끝내지 못하는 직원들은 피시오프 프로그램을 뚫는 방법을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다. 노동시간만 줄고 업무량은 그대로이기에 유지되는 ‘공짜 야근’이다. 출·퇴근 시간을 입력하는 지문인식기도 있지만 의미가 없다. 지문만 제시간에 찍어 ‘출·퇴근기록’을 남길 뿐이다. “회사는 겉으로만 제도를 잘 지키는 거죠. 정작 직원들은 차라리 야근수당 받고 야근하는 게 낫다 싶을 때가 많아요.” ㅈ씨는 어느덧 한 달이 넘은 ‘노동시간 단축’을 거의 체감하지 못한다고 했다.

‘주 52시간 상한제’ 시행 한 달이 지났지만, 제도 시행 대상인 300인 이상 기업 직장인 모두가 ‘노동시간 단축’의 온기를 느끼는 건 아니었다. ‘노동시간’만 줄고 ‘업무량’은 줄지 않아, 회사에서 ‘몰래 야근’을 하거나 퇴근 뒤 ‘집으로 출근’하는 직장인들도 있다. 퇴근시간만 지켰을 뿐 정작 퇴근은 하지 못한 직장인들은 노동시간 단축 이후 오히려 ‘공짜 시간 외 근무’를 하게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일부 회사들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이 ‘업무량 단축’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한 외국계 회사에서 기획 업무를 하는 ㄱ(30)씨는 근로시간 단축 이후 오히려 일주일에 6일을 출근하고 있다. 회사가 인력 충원 없이 노동시간을 줄이려고 직원들의 출근 시간을 쪼개면서 ㄱ씨는 더 힘들어졌다고 했다. 오전 9시에 출근했던 직원들이 이제는 오전 9시, 10시, 11시로 나눠서 출근한다. 저녁 6시 이후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출근 시간대를 나눈 것인데, 사람 수는 똑같고 출근시간만 쪼개다 보니 인원이 적은 오전과 밤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업무 강도가 높아졌다. 본인 업무량을 채우지 못한 ㄱ씨는 토요일에도 출근해 일한다. 당직이라도 하게 되면 일요일도 회사에서 보내는 경우가 있다. “52시간 상한제 취지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자는 거잖아요? 인원을 안 늘리고 시간만 쪼개놓으니 한 번에 일처리를 못해 오히려 일이 늘어나게 된 거죠.”

같은 회사 안에서도 부서마다, 업무마다 제도의 혜택이 다르다. 화장품 회사에서 연구직으로 일하는 김아무개(31)씨는 지난달부터 ‘칼퇴근’하고 있다. 김씨 회사는 주 40시간이 넘는 추가 근무를 하려면 상무의 결재를 받도록 했다. 하지만 다른 파트에서 근무하는 김씨의 연구직 동료 중에는 저녁이면 ‘집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간이 아닌 ‘결과’로 평가받기 때문에 저녁에도 집이나 카페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직원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야근하게 해달라’는 불만이 적잖다고 한다. 김씨는 “일부 연구직뿐 아니라 적시에 제품을 공급해야 하는 생산직들은 노동시간 단축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는 부서마다, 같은 부서 안에서도 업무에 따라 다르다”고 전했다.

인천공항에서 특수경비원으로 일하는 이아무개씨는 주 52시간에 빠듯하게 맞춰진 대체근무 사정 때문에 휴가도 가지 못하는 처지다. ‘주 52시간’이라는 상한선에 집착해 ‘업무량 단축’이라는 실질은 뒷전에 밀린 탓에 벌어지는 혼란상이다.

‘직장갑질 119’의 박점규 활동가는 “핵심은 결국 업무량을 줄이는 것이다. 업무량을 줄이는 만큼 필요한 인력을 늘려야 한다”면서 “정부가 노동시간 준수 여부를 단속하는 데서 더 나아가 기업에 인력을 충원하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경영학)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잔업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노사 간 협의를 통해 직무 재설계와 임금체계 개편 논의가 이어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짚었다.

임재우 권지담 기자 abbado@hani.co.kr

영세 제조업 공장에도 ‘주 52시간’ 올까요

“글쎄요, 내가 얼마나 일하더라….”

경남 창원시에서 직원 300인 미만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 다니는 최아무개(28)씨는 자신이 일주일에 몇 시간을 일하는지 쉽게 헤아리지 못했다. 최씨는 주간근무를 기준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휴게시간 1시간 반을 빼고 하루에 10시간30분 일한다. ‘가정이 있는 날’로 지정된 수요일만 8시간 일하고 저녁 5시에 퇴근한다. 토요일엔 주말 특근으로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주야 맞교대가 전환되는 일요일엔 저녁 8시에 출근해 월요일 아침 8시에 퇴근한다. 계산해 보니, 최씨는 일주일에 68시간가량 일했다. 최씨는 ‘주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다. 최씨는 최저임금 수준인 기본급에 잔업수당과 야간근로수당 등을 합쳐 한 달에 300여만원(세후)을 번다. “한 주에 52시간만 일하면 시간외수당이 줄어 200만원 남짓 받지 않을까요? 그럴 거면 편의점 알바 뛰는 게 낫죠.” 집도 사고 결혼도 해야 하는 최씨는 힘들어도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씨처럼 소규모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주 52시간’은 아직 ‘딴 나라 이야기’이다. 대형 사업장 중심으로 시행돼 체감할 만한 변화가 없는 데다, 시간외수당을 제외한 임금 수준으로 ‘저녁이 있는 삶’과 ‘저녁거리를 살 수 있는 지갑’은 양립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52시간제’ 도입 이후 불안감을 느끼는 제조업 노동자들도 생겨나고 있다. 최씨는 대기업 하청업체에 다니는 지인의 월급이 대폭 줄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주야 맞교대로 일하던 지인의 근무 형태가 7월 이후 3교대로 바뀌면서 임금이 월 350여만원에서 270여만원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각종 수당이 없으면 막막한 이들에게 ‘52시간 노동’은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미래였다.

물론 생각이 다른 이들도 있다. 변압기 납품 공장에서 용접일을 하며 190만원 정도를 버는 이아무개(29)씨는 “그래도 주 52시간제가 잘 정착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돈과 여가 중에 저는 여가를 택하겠어요. 지금은 친구들과 술 한잔할 시간도, 좋아하는 볼링할 시간도 없어요. 돈만 벌다 죽을 수는 없잖아요.” 임재우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경찰 내부서도 “개판”…내란수사 대상에 맡긴 서울청 파문 1.

경찰 내부서도 “개판”…내란수사 대상에 맡긴 서울청 파문

윤석열 지지자들 인권위 난동…“이재명·시진핑 욕해봐” 2.

윤석열 지지자들 인권위 난동…“이재명·시진핑 욕해봐”

연세대서 일부 학생 ‘윤석열 옹호’ 시국선언…“부끄러워” 3.

연세대서 일부 학생 ‘윤석열 옹호’ 시국선언…“부끄러워”

‘내란 선동 혐의’ 전광훈 수사 경찰, 특임전도사 2명 참고인 조사 4.

‘내란 선동 혐의’ 전광훈 수사 경찰, 특임전도사 2명 참고인 조사

헌재, ‘마은혁 불임명 권한쟁의’ 선고 초읽기…오늘로 변론 종결 5.

헌재, ‘마은혁 불임명 권한쟁의’ 선고 초읽기…오늘로 변론 종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