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한다고 공식 발표한 21일 낮 12시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근처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연 정기 수요집회에서 소녀상이 서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화해치유재단이) 와르르 와르르 무너져야 내가 완전히 해산됐다고 안심할 수 있지. 재단 해산을 발표해놓고 내일 모레 계속 미룰까봐 걱정이다.”
21일 정부가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공식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는 병상에 누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안타깝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 할매의 소원을 들어서 재단 해산한다고 하니 다행이다.” 93살인 김 할머니는 암 투병 중이다. 지난 9월 3일에는 수술한 지 닷새만에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요구하는 1인 시위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외교부 건물 앞에 나온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일본하고는 우리가 싸울테니 정부는 화해재단인지 ○○재단인지 좀 해산해달라”고 외쳤다.
이날 김복동 할머니는 병원에서 퇴원해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카랑카랑하던 목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작아질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퇴원을 돕기 위해 병실을 찾은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할머니가 빗속에서 시위한 게 결국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끌어냈다”고 김 할머니를 어루만졌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이제 아베 그놈한테 사죄받는 일만 남았으니 정부가 더 힘을 내서 내가 죽기 전에 그 일을 했으면 좋겠다.” 김복동 할머니의 남은 소원이라고 윤미향 대표는 전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인 김복동 할머니가 지난 9월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 앞에서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촉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도 이날 낮에 입장문을 내어 할머니들이 모두 기뻐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일본의 돈을 받아 재단을 설립한 것은 정부가 할머니들을 도로 팔아먹은 것과 같다”면서 “이제라도 해체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강일출, 박옥선 할머니 등도 “앞으로 일본의 사죄를 받을 수 있도록 정부에서 힘써 주었으면 좋겠다”, “일본이 보낸 돈 10억엔을 하루빨리 돌려주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는 이날 낮 12시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근처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제1362차 정기 수요시위를 열고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환영한다는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의기억연대는 성명서에서 “오늘 한국 정부의 화해치유재단 해산 발표는 곧 2015년 한·일 합의의 무효선언”이라며 “일본 정부는 2015 한·일 합의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억지주장을 즉각 중단하고 범죄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시위 참석자들은 ‘화해치유재단’, ‘2015 한·일 합의’라고 앞뒤로 쓰인 노란색 종이를 찢어서 버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화해치유재단 해산으로 2015년 한·일 합의가 무효화되었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날 수요시위에는 NHK 등 일본 언론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윤미향 대표는 “일본에게 위로금 명목으로 받은 10억엔은 일본 정부에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 향후 일본 정부는 10억엔을 되돌려주는 문제를 논의해야지 그 돈을 다른 어디에 쓸 것인지를 협의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나눔의 집’도 입장문에서 “피해자들의 바람처럼 일본이 보내온 10억엔을 조속히 반환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안을 파기 또는 무효화 하는데 정부가 힘써주기를 바란다”며 “생존자 피해자와 사망 피해자의 위로 금액이 다른 점, 위로금을 받지 않은 피해자들이 있는 점에 대한 대책도 강구해달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의해서 10억엔의 반환이 어려워질 경우에 남은 돈(58억원가량)을 위안부 기념사업 등에 쓸 수도 있다는 태도여서 논란이 예상된다.
황예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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