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텍 노사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11일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오른쪽)과 박준호 사무장이 서울 양천구 서울에너지공사 75m 높이 굴뚝에서 426일째 농성을 끝내고 내려와 소감을 밝힌 뒤 “청춘을 다 바쳤다 민주노조 사수하자 투쟁!”이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민주노조인데… 그걸 지키는 게 왜 이리 힘든지… 진짜 더러운 세상입니다.”(홍기탁 전 지회장)
“안 울려고 했는데 너무 감사하다. 고맙다는 말씀드리겠습니다.”(박준호 사무장)
‘합의서’라는 세 글자로 시작해 ‘최선을 다한다’로 끝나는 종이 두 장을 손에 쥐기 위해 두 남자는 지상 75m 하늘에서 425번의 밤을 보내야 했다. 새도 사람도 살 수 없어 ‘하늘감옥’으로 불리는 그곳에서.
2017년 11월12일,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은 자신들이 일하던 한국합섬을 2010년 인수한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에게 노동자들의 고용승계와 단체협약 이행 등을 요구하며 서울 양천구 목동 서울에너지공사(열병합발전소) 굴뚝에 올랐다. 그리고 426일만인 11일 오후 4시15분에야 땅을 밟았다. 두 사람의 ‘귀환’은 이날 오전 7시20분께 차광호 금속노조 파인텍지회장과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 등 노사 대표자가 ‘자회사 고용’을 보장하는 합의안을 내놓으면서 결정됐다.
파인텍 노사가 극적 합의를 이룬 11일 오후 금속노조 파인텍지회 홍기탁 전 지회장(왼쪽 사진)과 박준호 사무장이 426일째 고공농성을 벌인 서울 양천구 서울에너지공사 굴뚝에서 119 구조대원의 도움을 받아 각각 내려오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하지만 박 사무장과 홍 전 지회장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소방대원들은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에어매트를 깔고 굴뚝에 안전 밧줄을 설치하는 작업을 했다. 한 시간 가량의 안전조처가 모두 끝난 이날 오후 3시30분부터 두 사람은 몸에 밧줄을 묶은 채 수직사다리를 20여분 동안 내려왔다. 이후 굴뚝을 빙 둘러싼 원형 계단에 닿은 두 사람은 소방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30분을 더 내려왔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두 사람의 걸음은 느렸다. 원형 계단 난간을 꽉 붙잡은 손과 떨리는 다리가 두 사람의 건강을 가늠케 했다. 두 사람은 지난 6일부터 6일째 단식 중이었다.
300여명의 시민들이 굴뚝을 내려오는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며 “홍기탁, 박준호 힘내자”, “우리가 함께할게”라고 외쳤다. 두 사람이 ‘하늘감옥’을 모두 벗어나는 데에는 50분이 걸렸다. 땅에 발을 디딘 두 사람은 이동식 침대로 옮겨졌다. 이들이 침대에 누운 채 서울에너지공사 정문을 나오자 동료들은 파업가를 불렀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차 지회장 등 동료들의 손을 꼭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홍 전 지회장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박 사무장은 땅을 밟은 현실이 실감이 안 난다는 듯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민들과 취재진을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했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그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홍 전 지회장은 침대에 앉아 있는 힘을 다해 오른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청춘을 다 바쳤다. 민주노조 사수하자.”
두 사람이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본 시민 문용민(49)씨는 “무사히 내려와 기쁘고 우선 감사하다. 하지만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참 서글프다”고 했다. 이날까지 25일째 동조단식에 참여했던 박승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소장은 “두 노동자가 오늘 무사히 돌아온 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가 ‘사람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발을 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도 “헌법이 보장하는 작은 권리 하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애써야 하는 상황이 슬프다”라고 말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파인텍 노사, 굴뚝 농성 426일 만에 교섭 극적 타결 배경은
굴뚝 농성 426일 만에 극적으로 타결된 파인텍 노사 합의 사항 중 핵심은 합의 사항 이행을 위한 ‘안전장치’로 모기업인 스타플렉스 김세권 대표가 자회사 파인텍의 대표를 맡는다는 점이다. 2015년에도 노사 합의 이후 차광호 지회장이 408일 만에 굴뚝에서 내려왔지만, 회사가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 3년간 고용보장’이라는 단서 조항을 두면서 되레 3년 이후 ‘지속가능한 고용’에 대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파인텍 노사는 11일 오전 공개한 합의서를 통해 △파인텍 대표이사를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가 맡고 △오는 7월1일부터 공장을 정상 가동해 조합원 5명을 업무에 복귀시키며 △고용은 2019년 1월1일부터 최소 3년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았다고 밝혔다. 이어 △회사는 금속노조 파인텍지회를 교섭단체로 인정하고 △기본급 시급을 최저임금+1000원으로 하며 △노조 사무실을 제공하고 연 500시간에 해당하는 타임오프(노조 전임자 근로시간 면제)를 부여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결과적으로 스타플렉스 자회사 고용과 법으로 이미 보장된 노조 활동 인정, 최저임금보다 시급 1000원 많은 임금이 초인적인 426일 굴뚝 농성 뒤에 남은 결과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이날 “극한의 삶을 견뎌내고 그렇게 얻어낸 것이 ‘고용 3년 보장’에 ‘최저임금+1000원의 기본급’이고 나머지는 노조 인정, 법정 노동시간 준수 등 그냥 노동법 지키자는 합의”라며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착잡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교섭 타결은 전날부터 20시간 넘게 이어진 마라톤협상 끝에 이뤄졌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번에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당분간 교섭 재개가 어렵다”며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달 27일부터 지난 9일 사이 열렸던 1~5차 교섭의 핵심 쟁점은 김 대표의 법적 책임과 노동자들의 ‘지속가능한 고용’ 보장 문제였다. 특히 지난 6일부터 굴뚝 위 홍기탁, 박준호 두 노동자가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지상에서 30일 넘게 단식투쟁 중인 차광호 지회장을 비롯해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나승구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 박승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 소장, 송경동 시인 등이 24일째 동조 단식에 참여하면서 노조는 상황을 하루빨리 마무리짓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스타플렉스 직접고용 요구에서 한발 물러서 ‘지속가능한 고용’이라는 대안을 제시한 까닭이기도 하다.
노조의 양보에도 김세권 대표가 답변을 회피하고, 지난 8일 강민표 전무를 내세워 노조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 듯했다. 하지만 11일 새벽 김세권 대표가 파인텍 대표를 맡겠다고 나서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스타플렉스(파인텍)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행동 김소연 대표는 “김세권 대표가 파인텍에서 기업 운영을 맡기로 한 거니까 예전처럼 회사를 페이퍼컴퍼니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서 합의에 이르렀다”고 했다. 426일의 고행이 마감되는 순간이었다.
선담은 이정규 기자
s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