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삼성의 지상과제는 이재용 부회장이 집행유예를 받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여기에 힌트를 준 것처럼 들리는 발언을 했습니다. 교사가 시험을 치르기 전에 정답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파기 환송심 재판부의 이상한 훈계가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정준영 부장판사는 지난 25일 열린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 첫 재판에서 “이건희 회장은 51세 때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 똑같이 51세가 된 이 부회장의 선언은 무엇이어야만 하느냐” “심리 중에도 당당히 기업 총수로서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해주기 바란다” 등 재판과 무관한 발언을 쏟아냈습니다. 이 자체로 뇌물·횡령 피고인으로 재판 결과에 따라서는 실형을 선고받고 재수감될 수 있는 이 부회장을 고무·격려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더 큰 문제는 정 부장판사가 “삼성그룹 내부에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준법감시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런 범죄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이와 관련해 미국 연방양형기준 8장과 그에 따라 미국 대기업들이 시행하는 실효적인 감시제도를 참고하길 바란다”고 권고한 대목입니다. 법조계와 재계에서는 재판부가 미국식으로 삼성그룹의 준법감시제도를 바꾸면 감형까지 해줄 수 있다는 시그널을 준, 부적절한 행위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이번 파기환송심 재판부 발언이 과연 뭐가 문제인지, 이에 대해 우리 사회 각계에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등을 한겨레 경제 담당 안재승 논설위원과 함께 살펴봤습니다.
안 위원은 먼저 정 부장판사가 언급한 미국 연방양형기준 8장의 의미를 짚습니다. 그는 “미 연방양형기준 8조는 기업 내부에 일정 요건을 갖춘 준법감시기구가 있고 이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면 고위 임원이 위법 행위에 가담했더라도 형량을 감경받을 수 있게 한 것”이라며 “정 부장판사가 연방양형기준 8장을 참고하라고 한 발언은 듣기에 따라서는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 선고 공판 전에 준법감시기구를 만들면 형을 감형할 수 있다는 뜻을 드러낸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 부장판사가 “이스라엘 경험을 참고하라”고 한 대목 또한 같은 취지로 이해될 여지가 크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이상으로 재벌체제의 폐해가 컸던 나라였습니다. 이로 인해 양극화, 빈부 격차, 물가 상승 등으로 국민들의 원성이 컸고요. 국민들이 대규모 집회를 연일 벌인 끝에, 이스라엘 의회가 만장일치로 2013년 재벌개혁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여기 들어있는 중요한 내용 중 하나가 기업지배구조 개선이고요. 이재용 부회장 뇌물 사건도 사실 지배구조에서 비롯된 것 아닙니까.”
안 위원은 정 부장판사가 훈계인지, 조언인지 헛갈리는 발언을 내놓은 이상 삼성 쪽이 이번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 전에 사내 준법감시기구 강화나 이스라엘식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습니다. “이재용 부회장 집행유예가 삼성의 지상과젠데, 담당 재판장이 이스라엘 모델 참고해서 재벌 체제를 시정해봐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삼성이 그거 안하겠습니까?”
이 것 말고도 정 부장판사의 발언에는 그냥 흘러들어선 안될 내용들이 차고 넘칩니다. 안 위원은 한 대목에 대해선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어떤 발언이 신문사 논설위원에게 황당함을 안긴 걸까요? 이번 일을 둔 언론 보도의 문제점과 이후 재판 과정에서 ‘안봐도 비디오’로 예상되는 삼성과 보수언론, 보수야당 등의 ‘경제위기’ 공세에 대해서도 꼼꼼히 짚어봅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으로 확인하시죠.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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