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첫 공판을 마친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비슷한 사건으로 기소돼 최근 확정판결까지 났다. 그 사건 기록을 보고자 한다.”
지난달 25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첫 재판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쪽은 국정농단 사건에 함께 연루된 신동빈 롯데 회장의 재판 기록을 열람·복사해 달라고 요구했다. 대법원에서 집행유예가 확정된 신 회장 사례를 들어 본인의 집행유예를 주장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사건 구도가 비슷해 보여도, 이 부회장과 신 회장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전략이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같은 뇌물 공여자라고 해도 뇌물로 얻고자 한 부정한 청탁이나 구체적인 범행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 ‘승계작업’이라는 개인적 현안 우선 이 부회장과 신 회장이 박 전 대통령 쪽에 뇌물을 건네면서 부탁한 현안이 상당히 다르다. 신 회장은 월드타워 면세점 특허 재취득이라는 그룹 차원의 현안이었지만, 이 부회장은 삼성 그룹 경영권 승계라는 개인적 차원의 현안을 해결하려 했다. 지난 8월말 대법원은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 작업과 이를 위한 부정한 청탁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 요구에 수동적으로 뇌물을 건넨 게 아니라 그 요구에 편승해 이익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뇌물을 건넸다고 판단했다. 이 부회장은 ‘개인이 줘야 할 돈을 회사 돈으로 댔다’는 취지로 횡령 혐의도 적용됐다.
한 현직 판사는 “신 회장의 경우, 롯데를 위한 것이 신 회장에게도 이익이 되는 구조라면, 이 부회장은 삼성 회장직이나 최대 주주를 승계하는 것을 삼성의 이익이라고 직접 주장하기 어렵다. 승계작업의 존재가 뚜렷해질수록, 이 부회장 개인의 이익을 위해 뇌물을 건넨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지속적으로 주도면밀한 범행 뇌물 제공 기간과 수법도 다르다. 이 부회장 쪽은 최순실씨 일가를 타깃으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지속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뇌물을 전달했다. 삼성 쪽은 최씨의 딸 정유라씨를 은밀하게 지원하기 위해 코어스포츠와 삼성전자 사이 용역계약을 체결해 용역대금을 송금하는 방식을 썼다. 이 부회장은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과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등에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요구를 전달하고 승마 지원을 지시한 뒤 지원 경위를 보고받고 확인했다. 이는 2016년 3~5월 최순실씨가 주도한 케이(K)스포츠재단에 70억원의 뇌물을 건넨 뒤 한 달 여만에 돌려받은 신 회장 사례와 차이가 있다.
이런 점을 반영해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사건의 성격을 “삼성그룹 총수와 최고위직 임원들이 계획하고 가담한 횡령 및 뇌물범죄”이라고 진단했다. 김남근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는 “재판부가 첫 재판 말미에 어려운 과제를 던지면서 사건의 성격을 명확하게 정의했는데, 이 부회장 쪽이 신 회장 사례를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재판부에 부정적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 신동빈, 시정 못했다고 이재용도? 대법원이 불가피하게 신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확정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 부회장의 집행유예 주장은 더욱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낮다. 대법원은 지난달 17일 신 회장의 유·무죄 판단은 유지한 채, 신 회장이 2심과 달리 ‘강요죄의 피해자’가 아닌 ‘뇌물 공여자’로 판단했다. 그러나 법률심인 대법원은 잘못된 양형을 이유로 재판을 파기할 수 없어 이를 바로 잡지 못했다. ‘적극적 뇌물 공여자’로 대법원에서 2심의 일부 유·무죄 판단이 뒤집혀 파기환송심을 받게 된 이 부회장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 부회장은 2심에서 뇌물 액수가 36억원으로 줄면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뇌물혐의가 추가되고 뇌물액수도 집행유예가 어려운 86억원으로 늘었다.
한 형사전문 변호사는 “신 회장의 대법원 선고 취지는 ‘양형 사유가 잘못됐지만 파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형 사유인데 운 좋게 집행유예를 받은 것”이라며 “이런 사정을 살피지 않고 2심이 잘못됐다고 파기돼 다시 재판을 받는 이 부회장이 신 회장 사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고심까지 치른 이 부회장과 신 회장은 각 심급 선고 때 상대방을 언급하며 선처를 호소해왔다. 신 회장은 지난해 2심 결심 공판에서 “여러 기업이 재단 지원에 참여했는데 롯데만 뇌물이라고 한다면 동의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당시 이 부회장은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상태였다. 삼성과 롯데가 ‘핑퐁’하듯 상대방 재판을 자신에 유리하게 활용하고 있는 꼴이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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