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화성 8차 사건 재심을 청구한 윤아무개씨는 과거 항소심에서 무죄를 주장했지만 법원은 조작된 국과수 감정서를 핵심 증거로 삼아 윤씨 주장을 배척했다. 과학적 증거는 그 기반이 되는 과학기술이 탄탄해야 한다. 연구원이 실험기구에 용액을 주입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화성 8차 사건 재심을 청구한 윤아무개씨는 경찰 수사를 받을 때부터 1심 재판까지 일관되게 범행을 시인했다. 경찰 조사 당시 고문과 폭행, 법정에 이르기까지 허위진술 강요 탓이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윤씨는 항소심부터 다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는 현장 음모와 윤씨 음모가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감정서를 핵심 증거 삼아 윤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흔히 과학적 증거는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존재로 간주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숨어 있다. 증거를 뽑아낸 과학적 기반에 중대한 오류가 깃들어 있을 때 과학적 증거로 도출된 법적 판단이 송두리째 부정된다는 점이다. 법과학이 오염되면 가장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법과학에서 여전히 높은 신뢰성을 담보하는 분야는 디엔에이(DNA) 증거다. 1985년 영국 앨릭 제프리스 교수가 최초로 디엔에이 증거를 활용해 강간·살인 사건을 해결했다. 우리나라는 1992년 경기 의정부에서 발생한 강제추행 사건에서 디엔에이 기법이 처음 사용됐다.
디엔에이 기법과 대조되는 건 탄환 비교 분석법이다. 1963년 미국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 때 처음 활용됐다. 이 기법은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탄환과 용의자가 소지한 탄환의 구성 성분을 비교해 범인을 특정하는 기술이다. 하지만 증거의 신뢰성에 문제 제기가 이어져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탄환 분석법을 증거 확보에 활용하지 않는다.
미국 국립과학원 산하기관 ‘국립연구회의’는 2009년 법과학 보고서에서 “디엔에이 분석 외에는 어떤 법과학 기법도 현장에서 확보한 증거와 특정한 개인이 확실하게 동일하다고 입증할 만한 능력이 있음을 보인 적이 없다”고 밝혔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지난해 12월 펴낸 연구보고서 ‘첨단과학수사 정책 연구’에서 물적 증거 수사의 문제를 지적했다. 보고서는 “물적 증거 자체는 객관적이라도 이를 수집·분석·감정하는 것은 사람의 인지 과정을 거친다. 이때 감정관이 불필요한 정보에 노출되면 인지 편향이 나타나 물적 증거의 신뢰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가장 정확한 법과학 증거로 인정받는 디엔에이 감정도 배경 정보를 어떻게 제공하느냐에 따라 감정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고서는 언급했다.
이런 문제 탓에 법과학연구소들의 감정 절차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우선, 감정 결과의 블라인드 재검사를 의무화하는 방안이다. 감정관이 내린 결론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른 감정관이 재검사하는 절차를 추가하는 것이다. 또 감정관에게 순차적으로 증거를 제시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사건 현장의 지문, 디엔에이 같은 증거물만 처음 제공해 분석이 마무리된 뒤 대조 대상 증거물을 제공하는 방법이다. 감정관이 각 증거물의 독립적 평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다. 김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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