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현 검사가 지난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대법원 판결 뒤 첫 인터뷰를 한 뒤 청암홀 문을 열며 나서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년 전 1월 사표를 준비하고 검찰내부망에 글을 올렸다. 1년 전 1월 법원은 가해자를 ‘유죄’라며 법정구속했다. 그리고 올 1월 대법원은 1·2심을 깨고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서지현은 다시 원점에 섰다.
하지만 그 원점은 결코 제자리가 아니다. #미투의 창시자로 불리는 타라나 버크는 “미투가 힘이 센 건 유명 가해자를 단번에 쓰러뜨리거나 매번 승리해서가 아니다. 파괴됐던 피해자의 인격과 존엄을 되찾는 과정이기 때문”이라 말한 적이 있다. 현직 여성 검사인 그가 방송에 나와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한 말은 한국 사회에 권력형 성폭력의 문제를 전면화시켰고, 이제 그 변화는 누구도 되돌릴 수 없다. 2차 가해가 여전하고 법과 제도의 변화가 느리다지만 사회의 인식은 분명 변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청한 인터뷰에 “가만있으면 저들이 패배자로 여길 것 같았다”며 응한 서 검사를 지난 16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1월이 서 검사에겐 잔인한 달일 것 같다. 대법 판결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10년 전 장례식장에서의 성추행, 5년 전 인사 보복, 2년 전 인터뷰.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드디어 끝난다는 안도감이 이루 말할 수 없어 전날 밤 많이 울었다. 그러다 집에서 뉴스를 봤는데, 어떻게 우리나라 최고 법원이 이렇게 진실과 정의에 눈감을 수 있나,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다음엔 많은 이들이 ‘한번 싸우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거다’ ‘보복을 당하지 않으려면 정치를 해야 된다’ 이런 말을 해주는데, 두렵고 화가 났다. 국가와 법이 피해자를 보호해주지 못해 피해자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싸워야 하고, 그 권력자들과의 싸움은 평생 계속될지도 모르고, 그러면서도 파렴치한 자들의 보복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걸 피하기 위해선 죽거나 아니면 정치를 하라는 현실이 끔찍하고 믿을 수 없었다.”
―인사 보복으로 직권남용 혐의를 받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핵심 주장 중 대법원은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으니 보복할 이유도 없었다’는 것 말고는 모두 인정한 셈이다. 판결 직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는데?
“우선 대법원이 법률심이긴 해도 심리 미진을 이유로 파기 환송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 심리 미진은 없었다. 즉 가해자가 성추행을 하고 이를 덮기 위해 인사 원칙에 반해 유례없는 인사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원칙이 절대적·일의적인 것이 아니라며 인사가 재량 범위 내에 있다고 ‘법리적으로’ 판단한 거다. 그런데 세상에 절대적·일의적 원칙이란 게 있나. 그 맥락을 살피는 게 상식이다. 2015년 차장검사가 없는 부치지청으로 연속해서 경력 검사를 보낸 건 검찰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사례였다. 누가 봐도 ‘나가라’는 인사였다. 부치지청엔 우수한 검사를 보내라고 해놨는데, 그들 주장대로 내 능력이나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 또한 모순 아닌가.”
서지현 검사가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솔직히 1심 때 유죄 예상은 거의 없었다. 직권남용 적용을 넓히는 데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정한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이번 판결이 검찰 인사나 사법농단 판결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 하더라. 하지만 이 세 사건의 직권을 똑같이 직권남용이라며 같은 성격으로 보는 건 옳지 않다.”
―이번 판결대로라면 ‘어떤 인사 불이익이나 인사 특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다. 피해자나 내부고발자를 마음대로 인사 조치를 해도 된다는, 어떻게 보면 인사 보복과 2차 가해의 길을 활짝 열어준 것이다. ‘피해자들은 앞으로 입 다물고 죽으라는 얘기’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안태근 전 국장이 직접이든 간접이든 접촉을 해온 적은 없나?
“단 한번도 없다. 언론과 법원에만 사죄한다고 했다고 전해들었는데 내겐 사과한 적도 없다. 2년 전 <제이티비시>(JTBC) 인터뷰를 하고 한달도 채 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를 용서했느냐 또는 용서해야 하지 않느냐 물어오는데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가해자가 어떤 벌을 받을지는 신의 영역이라 생각하지만, 가해자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사회와 문화는 바뀌어야 한다.”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면 달라졌을까?
“달라지지 않았을까.”
―가해자는 무죄를 받았고 피해자는 사과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판결 몇시간 뒤 페이스북에 “나는 훨씬 크게 이기고 있는 것 같다”고 썼더라.
“2년 전엔 검찰이 제대로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을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상대는 너무나 큰 권력이고 내부고발자들이 조직보호라는 미명 아래 파묻히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대법원 판결이 실망스럽긴 했지만 조사단이 그렇게 부실수사를 하고 검찰에서 그렇게 날 음해했어도 사실이 인정됐다는 것이 긍정적이었다. 또 검찰개혁의 목소리가 계속 퍼지며 관련 법이 통과되고 있고 성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가는 모습에,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이기고 있다고 느꼈다. 성폭력은 범죄라는 것,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가해자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해온 이 잔인한 공동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 이런 마음들이 생겨나고 커져가고 있다. 씨를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따로 있다잖나. 난 그저 씨를 뿌리는 역할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견고한 벽에 조금이라도 균열을 냈다면 커다란 성공을 한 것이라 생각한다.”
―서 검사의 폭로로 성폭력의 권력구조에서 엘리트 여성 역시 예외가 아님이 드러났다. 어찌 보면 가진 게 많은 사람이 잃을 것도 많기에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 한달 전쯤 심리상담사로부터 처음으로 ‘이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게 말할 수 없는 위안이 되더라. 그때까지 8년은 끊임없이 ‘내가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구나’ ‘뭘 내가 잘못했을까’ 자책하는 시간이었다. 2010년 당시 주변 상사나 동료에게 상의를 했지만 ‘너만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니 조용히 검찰에서 나가라’는 조언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네가 아무 잘못이 없는데 이런 일 당했을 리 없다’는 이도 있었다. 물론 어떤 결과가 있을지 굉장히 두렵긴 했다. 그런데 정의를 바로 세우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겪은 범죄 행위조차 말하지 못한다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수년 내 검사인생을 스스로 부정하는 듯했고.”
―사표를 준비하고 글을 올렸다지만, 얼굴과 이름을 드러낸 인터뷰까진 예상 못 했을 텐데 결정적 계기가 있었나?
“분노와 두려움? 내부망에 글이 걸린 그날 오후 제이티비시가 인터뷰를 요청한다는 지인 연락을 받았는데 오후 5시가 넘도록 결심을 못 했다. 검찰에 대한 국민 반감도 잘 알기에 내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걱정이었다. 그런데 법무부에서 출입기자들에게 인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식으로 문자를 보낸 걸 알게 됐다. 검사도 변호사도 평생 못 하더라도 후배들은 이런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단 몇시간 만에 그렇게 덮어버리려는 데 분노가 일었고, 이대로 난 생매장돼 묻혀버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후회한 적 없나?
“없었다면 거짓말일 거다. 법원에 끈질기게 문제 제기해 피해자에겐 거의 내주는 일이 없는 증거자료 일부를 보게 됐는데, 동료이자 친구라 믿던 검사들이 너무나 새빨간 거짓말을 한 걸 알게 됐다. 굉장히 오래 앓아누웠다. 그 고통은 죽을 때까지도 치유되지 않을 거다. 그래도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똑같이 하지 않을까. 난 용감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입을 연 것이었고 정의를 밝히는 검사로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던 거니까.”
―결정적인 새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대법 판결이 뒤집히긴 어렵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거다. 형사가 안 되면 민사도 있으니까. 또 그게 안 되더라도 수십년 뒤 거짓말을 했던 검사나 직원 중에 퇴사를 하고 양심선언을 하는 이가 나올 수도 있잖은가? 진실의 힘은 강하다고, 그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믿는다. 당장이 아니고 10년 뒤가 아니고 설령 내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해도.”
―수원지검 부부장검사로 발령났지만 계속 질병휴직 상태다. 특별한 경우 외엔 외출도 잘 안한다고 들었다.
“일상이 힘든 건 사실이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힘내라는 말을 해주지만 그런 것도 어색하더라. 몇번 말한 적 있는데 너무 힘들 땐 평행이론을 떠올린다. 세상엔 또다른 우주가 있고 거기선 내가 이렇게 범죄피해를 입지도 않고 이렇게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않고 내가 원했던 고요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날 정말 많이 사랑해주고 늘 ‘검사는 정의로운 직업’이라고 얘기해줬던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며, 삶이란 그냥 눈한번 감았다 뜨면 끝나는 찰나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이 고통도 찰나이고 삶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자, 생각한다. ”
―힘들지만 지난 2년은 서 검사가 어쩌면 인생에서 만날 일이 없었던 많은 이들을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나 ‘일본 첫 #미투’로 불리는 이토 시오리는 각별할 것 같다.
“많은 이들의 응원과 지지, 미투와 위드유는 감동이고 내가 버틸 수 있는 큰 힘이었다. 김복동 선생님은 병세가 악화된 다음에야 뵈어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국가가 보호해주지 못해 파괴된 존엄성을 개인이 지키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지 또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건지 감히 표현도 어렵다. 이토와는 처음 만났을 때 국적도 직업도 나이도 달랐지만 서로 너무 닮아 있었다. 사회와 조직이 우리를 미친×, 꽃뱀, 수치라고 하며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음해하는 것까지. 일본에서 살 수 없어 영국으로 옮겨야 했던 이토가 얼마 전 처음으로 민사소송에서 이겼는데, 우익단체 협박이 너무 심해 예정보다 빨리 떠나야 해 만나지를 못했다. 언제까지 피해자들이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 답답하다.”
―검찰 내 연락하는 동료는 있나?
“거의 없다. 그들이 어떤 위치일지 뻔히 아는데. 얼마 전 임은정 검사가 경향신문 칼럼에서 내 사건 증인이라 승진을 못 시켜줬다며 한 고위층이 해외연수로 회유했다고 폭로했잖나. 임 검사에게 그럴 정도면 다른 검사들에겐 어떨지. 임은정·안미현 검사랑은 가끔 연락한다. 경험이나 성격이 달라 사안을 보는 시각도 다를 때가 있지만, 말 안 해도 서로 어려움을 이해한다. 흔히 내부고발자는 강할 거라 생각하지만 상처도 크고 많이 힘들다.”
―검사들은 굉장히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검찰을 위한 검찰’이란 말이 나오는 요즘, 그 자부심과 무오류의 자만심은 한끗 차가 아닌가 싶다. 시스템의 문제일까?
“동료들 얘기가 조심스럽지만, 검찰은 인사·징계·평가·배당, 모든 시스템이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조직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복종하는 게 살아남는 방법이다. 그리고 검사들의 일이 너무 많고 굉장히 열심히 한다. 그처럼 과중한 업무와 절대복종을 강요하는 시스템 아래에선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는 게 힘들지 않나 싶다. 처음엔 자기 업무에만 충실해 다른 사건에 관심 없거나 침묵하다가, 점점 부당한 지시도 따르고 허위진술이나 불법적인 일까지도 하게 되면서 옳고 그름의 판단이 마비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결정적으로 더 이상 검찰에 있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게 2017년 국가정보원 파견 검사가 증거를 조작하고 그 수사 과정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다. 안타까움이 크지만 검사가 증거를 조작했다는 것 자체가 내겐 충격이었다. 그런데 많은 간부들이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으면 그랬을 거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이의를 제기해봤더니 ‘네가 조직에서 상처를 많이 입어 그렇구나’라고 하더라.”
―검찰개혁 입법과 인사 이후 검찰 내 반발을 보며 여러 마음이 들 것 같다.
“2년 전 인터뷰 때 검찰개혁 이야기를 했지만 당시엔 그 부분은 별로 귀담아듣는 이들이 없어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1년 뒤 검찰개혁 촛불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더라. 사랑했던 조직이 그렇게 많은 개혁의 기회를 다 놓친 채 국민의 지탄을 받게 된 게 안타깝고. 검찰은 이제까지 검사가 법을 더 잘 알고 수사를 더 잘한다는 이유로 수사권 조정에 반대해왔다. 그런데 유능하더라도 공정하지 못하면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지 않나. 조국 전 장관 수사 논란도, 그동안 선택적 정의로 일부 사건은 덮고 일부 사건은 파고 했던 탓이 클 텐데, 이런 상황에 대해 검찰이 객관화하고 돌아보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다시 ‘검사 서지현’을 볼 수 있을까?
“대법원 판결이 이렇게 나왔는데… 좀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인터뷰 며칠 뒤 ‘사법농단’ 의혹을 밝힌 도화선이 됐던 이탄희 전 판사의 정치권행 소식이 논란이 됐다. 서 검사는 “모든 것을 내걸고 진실을 알려도, 외부에서 아무리 외쳐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가 승리한다면… 그런 선택이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이미 총선의 공직자 사퇴 시한(1월16일)도 지났지만, 그 또한 ‘정치하려고, 유명해지려고 저런다’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런 음해가 끔찍해 ‘난 절대 정치 안 할 거야, 변호사도 안 하고 책도 안 쓰고 돈 버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야’ 이러며 산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그런 비난이 뻔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걸 깨부술 용기를 낸 이 전 판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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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가 지난 16일 인터뷰를 한 뒤 엷게 웃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서 검사가 밝은 옷을 입은 이유
편한 복장으로 나타난 서지현 검사의 모습은 낯설었다. 늘 그가 인터뷰하거나 자리에 나설 때는 검정 재킷이었다. 염색과 파마는 몇달 전 처음 했다고 한다. “검사일 땐 복장은 물론 머리까지 조금이라도 튀면 말이 나왔으니. 몇년 전까지 남성 검사가 색깔 있는 와이셔츠만 입어도 뭐라 말을 들었다.”
2004년 30살에 검사(사법연수원 33기)가 됐다. 그가 처음 임관했던 홍성지청 역사에선 첫 여성 검사였다. “검사인데요”라고 전화하면, “야 네×이 검사면 난 대통령이다” 같은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내가 왜 아가씨에게 조사받아야 하나라는 항의도 많았다”고 한다. “나 한 사람이 전체 여성 검사를 대표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다른 여성 검사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임관 당시 처음으로 여성 검사가 100명이 넘었는데 검찰에선 ‘우리 조직도 이제 망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다고 한다. 최고의 ‘엘리트’라 불리지만 소수자의 신세. 2010년 장례식장에서 서 검사가 안태근 전 국장 옆에 앉았던 이유도 ‘그 자리에 있는 유일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검사 습관’을 버리지 못한 그가 검은 옷을 갈아입는 것을 일부러 말렸다. ‘희망’을 이야기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결국 인터뷰는 중간중간 울먹임에 그쳤다. 언젠가 웃으며 이야기할 그날이 올까.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