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출석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단
“내년(2016년) 상반기 중 삼성바이오에피스(삼성에피스)의 미국 나스닥 상장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미국 나스닥 역사상 헬스케어 분야에서 가장 큰 기업공개(IPO)가 될 것이다.”
2015년 7월1일, 증권사와 기관투자자 관계자 등 90여명을 인천 송도 바이오캠퍼스에 불러 모은 고한승 에피스 대표는 이렇게 자신했다. 전날 열린 제일모직 긴급 기업설명회에서 “바이오 의약품 개발에 필요한 자금조달을 위해 나스닥 상장을 검토 중”이라고 공개했던 삼성에피스는 이날 ‘2016년 상반기’로 시점까지 못 박아 ‘상장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12월 무렵, 에피스는 나스닥 상장 계획을 조용히 거둬들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부장 이복현)는 이 상장 발표가 주가부양을 위한 ‘허위 발표’라고 결론 내렸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2주가량 앞두고 현실적으로 추진이 어려웠던 에피스 상장을 주가부양을 위해 거짓으로 발표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 부회장 쪽은 “상장 추진이 허위라는 것은 검찰의 억측”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에피스 상장이 허위일 경우, 이 부회장은 수조원대 삼성그룹 지배권 이득을 위해 대형 허위정보를 흘려 주주와 투자자들의 의사결정을 왜곡시킨 혐의(자본시장법 위반)가 더욱 명확해지고 이는 이 부회장에게는 ‘치명상’이 된다. 법조계에서 ‘에피스 상장 허위’ 여부가 검찰-삼성 대전의 최대 ‘승부처’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 에피스 나스닥 상장…삼성-바이오젠의 험난한 ‘밀당’
19일 <한겨레>가 법조계·바이오업계를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 업체인 삼성바이오로직스(삼성바이오)와 자회사인 에피스(바이오복제약 개발업체)의 설립 단계부터 세세히 관여했던 이 부회장은 에피스의 나스닥 상장 추진도 직접 진두지휘했다는 정황이 여럿이다. 삼성의 옛 컨트롤타워로 이 부회장의 ‘손발’ 역할을 했던 삼성 미래전략실이 삼성바이오에 ‘자회사인 에피스의 나스닥 상장을 추진하라’고 지시한 것은 2014년 중반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한승 에피스 대표는 공동투자사인 미국의 제약회사 바이오젠을 수차례 방문해 나스닥 상장을 협의했고 이 과정을 이 부회장에게 주기적으로 상세하게 보고했다고 한다. 이 부회장 본인도 2015년 6월 나스닥 상장 논의를 위해 바이오젠 대표와 직접 통화하기도 했다.
바이오젠과 협상의 쟁점은 상장 뒤 삼성이 에피스의 ‘경영권’을 온전히 가질 수 있는지였다. 삼성바이오 내부사정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바이오 사업을 ‘이건희의 반도체’와 같은 자신의 사업으로 여긴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나스닥 상장 후에 바이오젠으로부터 에피스의 경영권을 가져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짚었다.
문제는 바이오젠이 동의하지 않으면 에피스를 나스닥에 상장시킨 뒤 삼성이 에피스의 경영권을 온전히 얻을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는 점이다. 바이오젠은 삼성바이오(85%)에 비해 에피스 보유 지분(15%)은 적었지만, 원하는 시점에 에피스의 지분의 절반가량을 사들일 수 있는 ‘콜옵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바이오젠은 제3자에게 에피스의 신주를 발행할 때 먼저 사들일 수 있는 ‘우선매수권’도 가졌다. 바이오젠의 반대에도 에피스 상장을 강행하면, 바이오젠이 콜옵션을 행사해 지분의 절반을 차지하거나, 우선매수권으로 신주를 대량으로 사들여 경영권을 가져가는 ‘위력행사’에 나설 수 있었던 셈이다.
협상에서 우위에 있었던 바이오젠은 삼성의 속내를 알아채고는 에피스의 나스닥 상장에 호락호락하게 동의해주지 않았다. 애초 삼성은 나스닥 상장 뒤 바이오젠이 콜옵션을 행사하면 지분을 사들여 에피스의 경영권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경영권 확보에 집착한다는 사실이 노출된 뒤에 협상의 주도권이 바이오젠에 넘어갔다”며 “처음에는 지분을 팔겠다던 바이오젠이 어느 순간부터 ‘콜옵션 행사해도 지분을 팔지 않겠다. 삼성과 동등한 지분율을 갖겠다’고 버티고 후속 시밀러 제품 판권도 넘기라는 요구까지 해왔다. 에피스의 경영권 확보가 불확실해지면서 상장도 중단된 것”이라고 전했다.
■ 검찰 “2014년 초∼2015년 말 상장 어렵다 결론”…삼성 “그런 결론 내린 적 없어”
삼성이 바이오젠과의 협상 난항으로 ‘상장이 당분간 어렵다’고 결론 내린 ‘시점’도 중요한 포인트다. 검찰은 최근 수사를 통해 확보한 물증을 토대로 ‘2014년 말부터 2015년 초’ 사이에 삼성이 당분간 에피스 상장은 어렵다고 결론 내린 것으로 파악했다. 이미 2014년 말∼2015년 초에 상장이 어렵다고 판단하고도 합병을 앞두고 주가 부양이 절실한 시점에 이를 발표했다면, 이는 ‘허위 발표’일 가능성을 높이는 핵심적인 근거가 된다.
에피스 상장이 발표된 2015년 7월1일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기로에 놓인 때였다. 그해 5월26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이사회가 합병 결의 사실을 공개하자, 돌연 삼성물산 주식 7.12%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한 미국의 헤지펀드 엘리엇은 “이 부회장이 대주주인 제일모직에 합병 비율이 지나치게 유리하다”며 합병 반대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두 회사의 주가가 주식매수청구가격보다 떨어져 국민연금과 같은 삼성물산의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면, 합병 자체가 무산될 위험도 컸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미국 나스닥 역사상 헬스케어 분야에서 가장 큰 기업공개”라는 에피스의 나스닥 상장 계획이 발표된다. 에피스를 손자회사로 둔 제일모직으로서는 ‘대형 호재’인 셈이다.
반면 이 부회장 쪽은 “2014년 말~2015년 초, 상장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적이 없다”며 2015년 말이 돼서야 에피스 나스닥 상장을 위한 바이오젠과의 협상이 결렬됐다고 주장한다. 상장 추진 사실이 발표된 2015년 7월에는 내부적으로도 내년 상반기에는 상장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2015년 7월17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에이티(AT)센터에서 열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관련 임시 주주총회에서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대표이사가 합병안을 통과시키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검찰, ‘주가부양 목적 발표’ 문건 확보…삼성 “시장상황 탓에 연기된 것뿐” 반박
검찰은 상장 추진 발표 직전 미전실이 작성했던 다수의 문건에도 주목하고 있다. 검찰이 확보한 문건에는 “상장 추진을 발표해서 주가 상승 국면을 유지하자“거나 “지금 에피스 상장을 발표하면 허위 유포나 이사회 미결 등의 문제가 있으니 제일모직에서 발표해야 한다”며 ‘법적 문제 소지’까지 논의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오젠과의 협상 결렬로 구주매출·신주발행 등 구체적인 상장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위법 가능성까지 논의하고도 삼성이 주가 부양을 위해 발표 강행했다는 것이다.
허위 발표 여부와 별개로 삼성이 주가부양을 염두에 두고 상장 추진을 발표했던 정황은 여럿 있다. 당시 상장 과정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2015년 중순께 고한승 대표가 바이오젠을 방문해 ‘상장 뒤 지분재매입’ 방안에 대한 동의를 다시 요청하면서 ‘삼성에 지분을 파는 의사결정을 7월17일 전에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2015년 7월17일은 합병안 통과를 놓고 표 대결을 벌인 제일모직·삼성물산의 주주총회일이었다. 에피스가 ‘합병 스케줄’을 염두에 두고 상장을 추진하려 했다는 정황인 셈이다. <한겨레>도 ‘주식매수청구 기간까지 주가 부양 효과를 유지해야 하므로 7월 초에 상장 추진을 발표해야 한다’는 취지의 삼성 내부문건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
[단독]삼성, 물산 합병때 주가 띄우려 ‘에피스 나스닥 상장’ 발표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 쪽은 에피스 나스닥 상장에 대해 “진지하게 추진하던 중 바이오 시장 상황이 안 좋아져 미뤄진 것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이 부회장의 변호인단은 “삼성바이오와 에피스의 상장은 설립 뒤 2014년 무렵부터 꾸준히 추진했던 사안이고, 바이오젠도 상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상장 추진 발표 뒤 바이오 시장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에피스의 상장을 포기하고 삼성바이오를 2016년에 상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 부회장 쪽은 에피스 상장 추진 발표에 바이오젠의 동의가 필요 없었다고 주장한다. 변호인단은 “에피스는 삼성이 지분 대부분을 보유해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회사이므로 상장 계획 발표 자체에 바이오젠의 승인이나 사전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며 “검찰의 주장처럼 협상이 완전히 결렬됐는데 주가 부양을 위해 상장을 발표했다는 것은 억측”이라고 반박했다.
■ 허위 발표 땐 ‘외환카드 주가조작’과 흡사…핵심은 ‘객관적 여건’
법조계에서는 ‘에피스 나스닥 허위 상장’ 의혹을 두고, ‘외환카드 주가조작’ 사건과 흡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이번 수사를 주도하는 윤석열 검찰총장, 이복현 부장검사와 삼성 쪽을 대리하는 최재경·이동열 변호사가 대검 중수부에서 함께 수사했던 사건이다.
대법원은 지난 2012년, 외환카드를 싼값에 흡수합병하기 위해 주가하락을 목적으로 ‘허위 감자설’을 퍼뜨린 혐의로 기소된 유회원 론스타코리아 전 대표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확정했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대법원은 유 전 대표 등이 “감자를 추진할 객관적 여건을 갖추지 못했고, 감자를 성실하게 검토·추진할 의사가 없음에도 투자자들이 오인·착각을 하여 주식 투매에 나서 주가하락을 초래할 것을 인식”했다며 “회사에 이득을 취하게 할 목적으로 발표를 공모한 것이므로 증권거래법(현재 자본시장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감자를 추진할 ‘객관적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주가하락을 목적으로 이를 발표했다면 ‘사기적 부정거래’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외환카드 주가조작’ 판례에 비춰보면, 에피스 나스닥 상장의 허위 여부는 당시 삼성이 이를 추진할 ‘객관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는지로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금융소송 전문가인 김광중 변호사(법무법인 한결)는 “나스닥 상장을 위해서는 바이오젠의 동의가 필요한데 그런 동의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거나, 실제로 상장을 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는데 합병 성사를 위해 상장 추진을 발표했다면 판례에 비춰 ‘부정거래’ 행위에 해당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짚었다.
대법원은 자본시장법이 금지한 ‘부정한 수단·계획·기교’를 “다른 투자자들로 하여금 잘못된 판단을 하게 해 공정한 경쟁을 해치고, 선의의 투자자에게 손해를 전가해 자본시장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해칠 위험”이 있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 부회장이 다시 법정에 서면 ‘에피스 나스닥 상장’이 이 부회장 개인의 승계를 위해 “자본시장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해친” 사례로 기록될지 사법적 판단을 받게 된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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