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때 싫다고 말하지 못했죠?” “왜 이제야 나서는 거죠?”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의 피해자들에게 언제나 따라붙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들은 ‘위력’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우문이다. 단호히 거절할 수 있고, 언제든 공론화할 수 있다면 위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력은 어디에나 있다. 가해자가 의전 서열 몇 번째에 들어가는 유력자가 아니어도 유효하게 작동한다는 데 업무상 위력의 특수성이 있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또는 추행의 피해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부터 검사에 이르기까지, 상하관계나 갑을관계에 놓인 거의 모든 여성 노동자들에게 해당된다. 서로 다른 조직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 업무상 위력이 어떻게 피해자를 무력화하는지 짚어봤다. 처지와 상황은 달라도 작동방식은 대개 비슷했다.
퇴사를 하고서야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중소기업에서 팀장을 맡고 있던 ㄱ씨는 퇴근 시간을 넘기고도 혼자 야근하는 일이 잦았다. 그가 야근을 할 때마다 사장은 ㄱ씨의 옆자리로 와서 격려를 하곤 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칸막이 뒤에서 사장의 격려는 때로 자주 신체 접촉으로 이어졌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어깨를 만지며 사장은 말을 걸어왔다. ‘열심히 한다’고 격려하는 사장에게 싫은 소리를 하면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될까 봐 ㄱ씨는 불쾌감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러나 어쩌다 ㄱ씨의 굳은 얼굴 너머로 불쾌감이 읽히면 사장은 ㄱ씨를 나무랐다. “너 나한테 선을 긋나.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에게 다 쏟아내고 가르치는지 알지 않느냐.” ㄱ씨는 말을 삼켜야 했다.
사장의 행동은 점차 대범해졌다. 출장 가는 차 안에서 ㄱ씨의 손을 잡은 뒤 “왜 손잡는지 안 궁금해? 좋아서”라고 자문자답하거나 ㄱ씨에게 회사 일을 하소연하던 중 충동적으로 뺨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그의 추행을 견디다 못한 ㄱ씨가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히자 ‘모든 일을 다 덮겠다’는 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ㄱ씨는 결국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를 찾아 진정을 냈다. 지난해 인권위가 발행한 성희롱 시정권고 사례집에 실린 사례다.
지난 22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여성단체와 김재련 변호사(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이들은 서울시 공무원들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고소한 성추행 피해자의 호소를 묵살했다고 주장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 가해자와 피해자의 엇갈린 기억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모호한 경계에서 시작된다. 배려라고 생각했던 윗사람의 호의가 순식간에 선을 넘어 성적 괴롭힘으로 이어지거나, 고압적인 위계구조에서 발생한 갑질이 성폭력으로까지 확대된다. 문제를 제기한 피해 여성은 졸지에 호의를 악의로 되갚은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가해자의 기억은 선택적으로 왜곡되고 재해석된다. ㄱ씨를 추행한 사장 역시 인권위 조사에서 신체 접촉이 있었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ㄱ이 해맑고 밝은 성격이고 업무를 잘 따라와서 칭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ㄱ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인권위에 진정까지 하며 성폭력을 공론화했는데도 그가 느낀 수치심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다른 범죄와 달리 당사자만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초기에 문제 제기를 하기가 더욱 어렵다. 지난 5월 대법원은 20대 신입사원을 추행한 혐의(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로 기소된 40대 남성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서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던 ㄴ과장은 신입사원 ㄷ씨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여기를 만져도 느낌이 오냐”고 묻거나 음란 동영상을 보여주는 등의 방식으로 성희롱을 해온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 때문에 피해자는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회사까지 그만뒀지만 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조직 내에서 문제 삼지는 못했다. 신체 접촉에 거부감을 드러내자 ㄴ과장은 ㄷ씨를 업무적으로 괴롭히기도 했다.
이처럼 아직 직장 내 기반이 취약한 노동자들에게 업무상 위력을 행사하는 상급자는 노동에 대한 의욕을 꺾는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이 공개한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직장인 응답자 2천명 가운데 재직 중인 직장에서 성희롱·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노동자는 전체의 42.5%였다. 가해자의 66.8%는 업무감독자·사장·상사 등 조직 내 상급자였다. 신고나 고소에 나서지 않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 피해자가 많다는 뜻이다.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신고는 2017년 650건에서 지난해 1364건까지 갑절가량 늘었다. ‘미투’ 운동의 여파로 적극적으로 직장 내 성폭력을 신고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미투 운동 이후에도 직장 내 성폭력이 엄연하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 ‘업무상 위력’은 내면화된다
위력은 행사하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로 피해자들을 압박한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낮은 지위’를 내면화해 가해자의 심기를 보좌하는 일에 익숙해지거나 피해를 입고도 직접적인 거절 의사를 밝히기 어렵다.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하고 재판에 임하는 과정에서조차 가해자를 의식해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정도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내면화된 위력이 피해자들의 판단 과정마저 왜곡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서울대에선 조교인 제자에게 지속적으로 갑질·성폭력을 저질러온 음대 교수의 징계 문제를 두고 학생들과 학교 본부가 갈등을 빚고 있다. 피해자와 연대하는 학생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 학교 음대 교수 ㄹ씨는 해외 출장 당시 동행한 피해자의 숙소에 강제로 들어가고, 새벽에 영상통화를 걸어 “잠옷 입은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거나 몸이 닿도록 가까이 앉는 등 수차례 성희롱과 원치 않는 신체 접촉 등을 강요했다. 서울대는 ㄹ씨를 직위해제하고 지금껏 두 번의 징계위원회 회의를 통해 징계 여부와 수위 등을 논의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생의 미래가 교수에게 달려 있다’는 예술계의 도제식 교육 구조가 피해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예술대학생 네트워크’는 지난달 26일 성명을 내어 “예술대학에서는 ‘예술판에 있고 싶으면 교수 라인을 잘 타라’는 게 암묵적인 틀로 전해진다”고 짚었다. 좁은 예술판에서 교수 개인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일자리 등을 위해서라도 교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선 안 된다는 사고가 작동한다는 지적이다. 서울대 음대생 김아무개(23)씨는 “음악계에선 예중 입시부터 취업까지의 과정이 이어져 있다고 여겨지고, 교수 한 명에게 밉보이면 여기서 영영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함이 있다”고 말했다.
음대 학생들은 ㄹ교수의 성폭력 의혹이 공론화되기 전에도 음대 내에선 교수 대신 방을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등 ‘갑질’ 관행이 이어져 왔다고 입을 모은다. 학습된 위계와 모호한 경계 위에서 갑질과 성폭력은 한끗 차이로 갈린다. 김씨는 “처음에는 ‘연주에 방해가 되니 머리를 묶어라’ 정도의 상식적인 지도에서 시작하지만 점점 ‘여성 연주자는 항상 예뻐야 한다’ ‘오늘 네가 못생겨서 지도하기 싫다’ 등 성희롱까지 이어지기도 한다”며 “음악을 시작한 초중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그런 갑질 구조에 익숙해진 상태”라고 말했다.
가해자 67%가 ‘조직 내 상급자’
고압적 위계구조·영향력 탓
낮은 지위 여성 ‘노동 의욕’ 꺾고
거절은커녕 심기 눈치보게 해
‘위력 내면화’ 판단까지 왜곡시켜
처지·상황 달라도 작동방식 비슷
비정규직일수록 ‘해고 위협’ 더해
심신 망가져 ‘노동 불능’ 놓이기도
■ 생사여탈 권한 클수록 ‘위력’은 강해졌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밥벌이’ 권한을 전적으로 쥐고 있는 상황에서 위력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고용형태가 불안정한 노동자일수록 피해 앞에 속수무책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가 발표한 ‘성희롱 구제조치 효과성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연구팀은 “20~30대 여성의 경우 성희롱이 고용 단절에 결정적 요인”이라며 특히 △여성 △20~30대 △불안정한 고용형태 △중소규모 사업장이라는 4가지 요소가 중요 변수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연구팀은 이들이 경험하는 고용 중단의 패턴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대개 입사 직후 한두달 내에 성희롱에 노출되며, 그로 인한 퇴사, 구직 활동, 이직, 다시 성희롱 발생, 퇴사, 이직 등 고용 중단이 계속 이어지다 마침내 심신 악화로 인해 노동 불능 상태에 놓이게 된다.”
피해자가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계약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일 경우 피해 사실을 알리기란 더욱 어렵다. 고용이 불안정한 피해자는 퇴사하거나 병원 치료를 받으며 성희롱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고 난 뒤에야 피해를 알리는 등 사건을 공론화하는 시점이 정규직 노동자에 견줘 늦었다. 고용을 의식해 목소리를 내지 않다가 오히려 가해자로부터 해고 위협이 이어지자 신고를 결심한 경우도 있었다.
한 파견직 노동자는 인권위 조사에서 “1년 단위로 계약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재계약 시기가 되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때 팀장님이 자꾸 만나자고 했다. 선물을 거절하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간접고용 노동자도 “성적으로 모욕을 당하는 건 참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가해자의 성적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퇴사 처리를 당한 건 견딜 수 없었다”고 신고 이유를 밝혔다.
아르바이트 노동자 역시 점주가 채용 권한을 이용하면서 성폭력 피해에 자주 노출된다.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이 전국 아르바이트 노동자 6722명을 대상으로 벌인 성희롱 실태조사(2018) 결과를 보면, 응답자 3분의 1가량은 점주·고객·동료 등으로부터 성희롱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으며, 가해자는 ‘남성 고용주’가 37%로 가장 많았다.
인권위 조사에 응한 한 심층 면접자의 답변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해소하는 게 취약한 처지에 놓인 여성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일인지 보여준다. “(직장 내 성폭력을)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직장의 근로를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1순위 원인이라고 생각해줬으면 해요.”
박윤경 기자
yg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