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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게이샤는 커피 맛도 모르는 돈 많은 아시아인의 커피일까?

등록 2020-11-22 08:57수정 2020-11-23 08:51

[토요판] 서필훈의 얼굴 있는 커피
⑬ 파나마 게이샤 커피

2004 베스트 오브 파나마 1위 게이샤
일반 스페셜티보다 10배 이상 비싸

상류층 소유한 대농장 중심 생산
실제 소농들은 큰 위험 감수해야

게이샤 마케팅이 만든 신기루인가
맛있고 복잡한, ‘천의 얼굴’ 가져
게이샤가 얼마나 과즙이 풍부한지 보여주겠다며 열매의 즙을 짜서 보여주는 호세. 서필훈 제공
게이샤가 얼마나 과즙이 풍부한지 보여주겠다며 열매의 즙을 짜서 보여주는 호세. 서필훈 제공

2006년 최고의 파나마 커피를 가리는 베스트 오브 파나마의 국제 심사위원 중 한명은 출품된 게이샤 커피를 맛보고 “나는 커피 안에서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게이샤는 신의 커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올해 베스트 오브 파나마 경매에서 소피아 농장의 게이샤가 1파운드에 1300달러에 낙찰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커피로 등극했다. 게이샤 최고 가격은 지난 6년간 매년 경신되고 있다. 뛰어난 파나마 게이샤는 꽃향기, 재스민, 얼그레이, 오렌지, 망고, 복숭아, 열대 과일을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향미를 갖고 있다.

게이샤는 100개가 넘는 아라비카 커피 품종 중 하나고 1930년대 에티오피아 남서부 케파 지역 게샤 마을 주변의 산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게이샤는 1950년대 코스타리카의 커피 연구소로 보내졌고 1963년 파나마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수확량이 적어 생산자들로부터 외면받고 그 뒤 40년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게이샤가 재발견된 곳은 파나마 보케테에 있는 에스메랄다 농장이다. 1999년 농장에 심각한 곰팡이병이 번져 대부분의 커피나무가 죽었는데 계곡 위쪽에 있는 커피나무들만 피해를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나무들의 씨앗을 채취해 인근에 심었다. 2004년 처음 수확하고 맛을 보니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훌륭한 맛을 지니고 있었다. 이 커피는 그해 베스트 오브 파나마에서 1위를 차지하고 그 이후에도 연이어 우승했다. 게이샤가 세계 스페셜티 커피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손으로 기계를 돌려 커피 열매 껍질을 까는 호세. 서필훈 제공
손으로 기계를 돌려 커피 열매 껍질을 까는 호세. 서필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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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하고 적극적인 대농장주들

나는 2010년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를 시작으로 산지 커피 농장과 다이렉트 트레이드를 여러 나라로 넓혀갔지만 파나마는 빠져 있었다. 일반 스페셜티 커피 생두보다 최소 10배 이상 비싼 파나마 게이샤를 팔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방문해서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6년 처음 파나마로 떠났다.

아우로마르 농장은 치리키주 북서부 산속에 있다. 코스타리카 국경에서 2㎞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농장의 전체 면적은 30헥타르지만 절반은 숲으로 보전하고 있고 커피나무들도 원래 있던 나무들 아래에서 자라고 있다. 농장주 로베르토는 다양한 동식물이 잘 살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환경에서 커피를 기르는 것이 자신의 중요한 가치라고 말했다.

그는 70대라고는 보이지 않는 단단한 체구와 강렬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로베르토는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파나마 중앙은행장을 역임한 파나마 금융계의 거물이었다. 80년대 노리에가 군사정권에 밉보여 한동안 고국을 떠나 있기도 했다. 그는 철인경기 마니아로 아직도 현역이라며 자랑했다. 그는 농장과 파나마시티를 오가며 지내고 농장 관리는 이웃 농장주가 담당하고 있다.

누구오 농장은 원시림 사이로 난 비포장 산길을 한참 올라간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누구오의 농장주 호세는 아마도 이곳이 파나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게이샤밭일 거라고 말했다. 고도계는 2030m를 가리키고 있었다. 기온이 너무 낮거나 일조량이 부족하지만 않다면 커피 재배는 고도가 높을수록 품질에 유리하다.

그의 농장은 규모도 작고 나무도 듬성듬성 심어놔서 농장이 아니라 텃밭 같은 느낌이었다. 농장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발전기도 없었다. 가공설비도 커피 껍질 까는 수동 펄퍼가 전부였는데 그가 손으로 손잡이를 계속 돌려야 했다. 껍질을 깐 커피 씨앗은 발효를 통해 과육을 제거해야 하는데 보통 시멘트로 만든 탱크를 사용한다.

하지만 호세는 그마저도 없어서 낡고 작은 나무 상자들에 담아 발효시키고 있었다. 농장 한쪽에는 발효가 끝난 커피를 말리는 건조장이 있었는데 커피에 곰팡이가 하얗게 슬어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높은 고도 때문에 기온이 낮아 커피가 잘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농장을 둘러본 뒤 호세는 갑자기 커피를 마시지 않겠냐고 물었다. 내가 뜨거운 물이 있냐고 되물었더니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는 갑자기 우리가 타고 온 픽업트럭에 시동을 걸고 보닛을 열더니 배터리에 충전용 케이블을 물리고 뒷좌석에서 꺼내 온 전기 포트에 연결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무슨 문제인지 전기 포트는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맛있는 커피를 함께 마신 걸로 하자고 호세를 위로했다. 부족한 것이 많은 누구오 농장의 호세는 내가 파나마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밝은 미소를 갖고 있었다.

아우로마르 농장의 게이샤 열매. 서필훈 제공
아우로마르 농장의 게이샤 열매. 서필훈 제공

파나마는 다른 중미 국가들에 비해 대농장 중심으로 커피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게이샤는 거의 대농장에서만 생산한다. 내가 방문한 대농장들의 농장주는 한명을 제외하고 완벽한 영어를 구사했고 대부분 미국에서 학교를 나와 변호사, 의사, 은행장 등의 직업을 따로 갖고 있거나 은퇴한 사람들이었다.

에스메랄다 농장을 구매한 루돌프 피터슨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 은행장이었고 그의 아들 프라이스는 신경의학과 의사였다. 이들은 똑똑하고 열성적이며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풍부한 자본력과 빠른 정보력, 뛰어난 학습능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품종과 가공 방식, 발효 및 건조 과정에 대한 실험을 계속하며 커피 품질을 높여나갔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전세계의 커피 전문가, 유명 학자를 초청해 자문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명품 농장들과 교류하며 영농 노하우를 터득하고 커피 관련 잡지, 언론 종사자를 농장에 초빙해 자신들의 노력과 성과를 알리는 데 열심이다. 매년 여러 나라의 스페셜티 커피 전시회에 참가해 직접 많은 바이어를 만난다. 대농장주들은 1997년 일찌감치 ‘파나마 스페셜티 커피 협회’를 만들어 공동으로 낮은 국제 커피 거래 가격에 대응했다. 다음해에는 파나마 커피를 국제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 알리기 위해 베스트 오브 파나마 대회를 시작했다. 이런 노력과 성과, 대담함은 파나마를 방문하는 커피 바이어들에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당시 그 어떤 산지의 커피 농장주도 이들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응고베부글레족 아이들이 커피 수확을 하는 부모님 곁에서 놀고 있다. 서필훈 제공
응고베부글레족 아이들이 커피 수확을 하는 부모님 곁에서 놀고 있다. 서필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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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샤 둘러싼 그들만의 리그

파나마는 다른 중남미 커피 생산국가들과는 달리 소농 및 조합을 찾아보기 힘들다. 소수가 존재하지만 대농장들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다. 치리키에는 응고베부글레라는 인디오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소규모 커피 농장을 운영하거나 커피 농장 수확 노동자로 일한다. 커피 수확철이 되면 인근 코스타리카로 넘어가 계절 노동자로 일하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파나마에서 원주민이 소유한 게이샤 농장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원주민 소유의 커피 농장은 투자, 영농 지식, 설비, 마케팅, 병충해 방제 능력, 해외 바이어와의 교류가 부족해 이들이 생산한 대부분의 커피는 대형 커피 수출업체에 낮은 가격에 팔린다.

내가 파나마에서 만난 유명한 농장주는 게이샤가 낮은 커피 가격에 허덕이는 많은 커피 생산자에게 고부가가치 커피 생산을 통한 수익 증대를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실은 다르다. 오랫동안 게이샤 씨앗은 파나마 내에서도 친한 대농장들끼리만 공유됐다. 이들은 게이샤 씨앗을 다른 국가의 명품 농장들이 가진 귀한 품종, 영농 비결과 교환하기도 했다. 덕분에 해외에 잘 알려진 스페셜티 커피 농장이 많은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에는 게이샤가 일찍 도입되어 퍼졌고 최근 두 나라 컵 오브 엑셀런스에서 입상하는 커피 상당수가 게이샤다.

하지만 온두라스나 니카라과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가난한 산지에서는 게이샤를 기르는 농장이 아직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이렇게 게이샤를 둘러싼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게이샤를 독점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이익이 상당하다는 방증이다.

게이샤는 씨앗 구하기도 힘든데다 수확량이 적고 몇몇 병충해에 매우 취약하다. 소농이 게이샤를 심었다가 병충해에 걸려 나무가 죽으면 묘목을 새로 심어야 하고 첫 수확을 기다리는 3~4년간 수입이 없어지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소농들은 게이샤가 커피 생산자 모두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파나마 게이샤는 국제 커피 거래 기준 가격의 약 30배에 거래되고 있다.

호세가 차량 배터리와 전기 포트를 연결한 모습. 서필훈 제공
호세가 차량 배터리와 전기 포트를 연결한 모습. 서필훈 제공

그렇다면 소비국에서는 누가, 왜 그런 높은 가격에 파나마 게이샤 커피를 사는 것일까? 게이샤가 비싼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스페셜티 커피라는 표현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스페셜티커피협회(SCA) 품질 기준 80점 이상의 커피라는 원래의 정의와는 상관없이 스페셜티 커피는 고급 커피라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스페셜티 커피를 다루는 많은 커피 업체는 아직도 스페셜티 커피가 기존의 커피와 품질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고, 왜 더 비싼지 소비자를 설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파는 입장에서 고급 커피라고 할지라도 고객이 느끼기에 그렇지 않다면 그 거래는 실패다.

하지만 게이샤는 커피 맛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일반 커피와 확연히 다르다고 느낄 만큼 강렬하고 매력적이다. 설명과 설득이 필요 없다. 가격이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욕망은 더 커진다. 산지에서 게이샤를 기르는 생산자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처럼 소비자는 게이샤를 구매할 때 음료의 품질 이상으로 게이샤라는 브랜드에 더 열광한다. 모든 커피는 자본주의 상품이지만 게이샤는 사람들의 욕망으로 점점 몸집을 불려가는 커피 산업 최첨단의 상품이다.

커피를 팔면서 이런 확실한 대표 주자가 있다는 것은 고객의 관심을 끄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게이샤의 높은 가격은 좋은 품질과 희소성뿐만 아니라 마케팅에 활용하기 좋은 풍부한 이야깃거리, 늘 화제의 중심에 있는 커피가 가진 홍보 가치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소비자가 게이샤를 통해 다른 스페셜티 커피에도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요즘은 국가별 바리스타 대회에 출전하는 많은 선수가 게이샤를 대회용 원두로 선택한다. 이제는 대회에서 게이샤를 사용하지 않는 바리스타가 오히려 주목받는 지경이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스페셜티 커피숍은 게이샤를 판매하지 않는다. 워낙 높은 가격이라 소비자가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이샤나무 옆의 로베르토. 서필훈 제공
게이샤나무 옆의 로베르토. 서필훈 제공

스페셜티 커피 대회가 커피 시장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지고 미래를 보여주는 것이 원래의 취지였다는 것을 떠올리면 과연 스페셜티 커피 시장의 미래는 게이샤인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러다가 게이샤가 아니면 스페셜티 커피가 아닌 것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생산자에서 바리스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의 노력과 열정이 배어 있는 다른 커피들은 언제쯤 게이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게이샤를 사업에 이용할 수 있을 거라는 우리의 믿음이 혹시 게이샤 마케팅이 만들어낸 신기루는 아닐까?

실제로 파나마 게이샤의 대부분은 유럽과 미국이 아니라 스페셜티 커피 시장이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에서 소비되고 있다. 게이샤는 커피 맛도 모르는 돈 많은 아시아인이 마시는 커피일까? 게이샤를 둘러싼 산지와 소비국에서의 움직임들은 오늘날 스페셜티 커피 시장이 처한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매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어제도 파나마 게이샤를 로스팅했다. 맛있고 복잡한, 명암을 넘어 천의 얼굴을 가진 커피다.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 15년 전 핸드 드립 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시작해 현재는 로스팅과 생두 사는 일을 맡고 있다. 커피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아름다움과 참상, 희망이 한데 뒤섞여 있기는 매한가지다. 한 잔의 커피 뒤에 숨겨져 있는,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한 사람들의 얼굴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4주에 1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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