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9월 파리 근교의 모네의 집에 놀러 간 이기양씨와 친구들. 왼쪽부터 정하룡(전 대한항공화물 사장), 이기양, 이일(전 홍익대 교수), 김석년(전 국제광고협회장)씨. 정하룡씨 제공
▶ 196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백림 사건’은 한 기자의 실종에서 시작됐다. 그가 체코 프라하에서 사라졌다는 보도 사흘 뒤 한 대학교수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죄’를 자수했다. 당시 부정선거로 궁지에 몰렸던 박정희 정권은 국면 전환을 위해 이를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뻥튀기했다. 본의 아니게 동백림 사건을 촉발한 이기양씨는 아직 실종 상태다. 그의 흔적을 찾는 지인 모임을 따라갔다.
묵직하면서도 따뜻한 음색의 쥘리에트 그레코의 노래 ‘파리의 하늘 아래’가 엘피판의 지지거리는 잡음을 뚫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활발하던 대화가 뚝 끊겼다. 임재경(84·언론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센강을 흐르는 물처럼 느릿한 선율 속으로 침잠했다. 정하룡(87·전 대한항공화물 사장)과 조규하(86·전 전남도지사)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그레코를 추모하는 듯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지난 21일 오전 전남 장성군 북이면 버스터미널 건너편에 있는 한 작은 카페는 순간 1950년대 서울 명동에 있었던 고전음악 전문 감상실이었던 돌체다방이 됐다. 세 사람 모두 돌체다방을 근거로 활동하던 ‘문청’(文靑·문학청년)의 일원이었다.
임재경은 대학 선배이자 오랜 지기인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전날 오후 이곳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전북 고창에서 전날 저녁 두 차례 만남을 가진 뒤 이날 다시 엘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인근 동네에서 만났다. 추억찾기 여행이 아니지만, 오랜만의 만남이기에 자신들의 시대를 풍미했던 아프레게르(전후파: 2차 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사상과 전통, 도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한 청년들이나 그런 사조를 뜻함)의 분위기에 잠시 젖었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임재경이 먼 길을 나선 것은 문청 시절의 우뚝했던 인물인 이기양(1931년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기양은 1967년 4월 중순 체코 프라하에서 실종된 뒤 지금까지 자취가 묘연하다. 당시 조선일보의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던 그는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취재하러 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뒤 북에 의한 납치설부터 자진 월북설(<대화>, 리영희)까지 여러 추측만 무성했다.
정하룡과 조규하는 모두 이기양과 서울대 문리대 동기이자 친한 친구였다. 임재경은 이들보다 대학으로는 3년 후배였지만, 자주 어울렸었다. 술을 좋아한 이기양이 술에 취해 건달들과 시비가 붙으면 뒤처리를 늘 도맡아 한 사람이 정하룡이었다. 전경련 부회장도 지냈던 조규하는 이기양의 권유로 한동안 기자 생활을 같이 하기도 했다.
1967년 4월 체코 프라하에서 실종된 이기양씨와 친했던 정하룡, 조규하, 임재경(왼쪽부터)씨가 지난 21일 오전 전남 장성군 북이면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기양씨 실종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김종철 선임기자
“기양이가 어디든 살아만 있다면 친구로서 정말 좋지. 그런데 나는 월북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야. 그는 실종 한참 전부터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과 사이가 안 좋았거든.”(정하룡)
“기양이는 워낙 자유주의자여서 전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았어. 그런 그가 월북할 리가 없다고 봐. 만약 월북했다면 북한 당국이 남한을 비방하는 방송에 그를 틀림없이 내세웠을 텐데 그동안 그런 게 전혀 없었잖아.”(조규하)
<한국일보> 기자로 있다가 <조선일보>로 옮겼던 이기양은 1960년 초 유럽 특파원을 겸한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 튀빙겐대(철학)로 갔다. 67년 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우리나라도 대표단을 보내자,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장이었던 리영희(2010년 작고)는 이기양에게 출장 지시를 내렸다. “서방 자본주의 세계와 동방 공산주의 세계가 화해(데탕트)의 도도한 조류를 타고 있다는 것을 어느 한국의 저널리스트보다도 앞서서 파악을 했”던(<대화>, 리영희) 리영희로서는 그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이기양이 프라하에서 연락이 끊기자, 한국 정부는 미국에 당시 공산권이었던 체코 정부와의 교섭을 요청했다. 이에 체코 주재 미국대사관이 나섰으나, 체코 외무부는 ‘내무부와 협력해 알아본 뒤 통지하겠다’, ‘내무부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간략히 답만 하고는 끝이었다.(‘미국의 동백림 사건 중재와 반공 연대’, 이정민 논문, 2020년)
“기양이한테 직접 들은 얘기인데 임석진이가 자기를 동베를린에 데려가서 북한대사관과 연결해줬다고 해. 전공 관련 책을 동베를린에 가면 싸게 살 수 있다면서 데려갔다는 거야. 당시 다들 그런 식으로 데려갔지. 유학 초반에는 기양이가 석진이한테 많이 의존했는데 1963년 내가 여행하면서 튀빙겐에 가서 기양이를 만났을 때 보니까 두 사람이 아주 냉랭해. 왜 그러느냐고 기양이한테 따로 물었더니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고 ‘나쁜 자식’이라고만 하데. 나중에 들으니까 기양이가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에서 오라 가라 하는 것을 무시하면서 말을 안 들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북쪽에서는 임석진에게 기양이를 좀 어떻게 해보라고 얘길 했고, 그런 과정에서 둘 사이가 나빠졌겠지. 북쪽은 기양이의 비판적 입장을 알고는 기자였던 그를 그냥 둬서는 곤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납치한 것이 아닌가 싶어.”(정하룡)
임석진(2018년 작고)은 유학생 20여명을 북한대사관에 연결시켜 줄 정도로 북쪽한테는 핵심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1960년 4월 북한대사관 쪽 인사를 만난 뒤 이듬해 평양을 방문했으며, 63년 노동당 가입, 66년 두번째 평양 방문을 했다. 북한은 임석진에게 본의 라인강변에 고급 중국식당을 차려주기도 했다. 그런 임석진도 이기양이 북한의 미움을 샀다고 말했다.
“이기양 기자는 술을 좋아하고 낭만적인 데가 많았습니다. 배짱도 좋아 웬만한 것은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북한에 들어가 보고 겪은 걸 털어놓자 술을 마시며 ‘그럴 줄 알았다. 나쁜 자식들. 우리를 이렇게 속이다니’ 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어요. 조심성이 많았던 저는 겁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이기양은 북한대사관 쪽 사람들과 겉으로는 아무 일 없이 지내려 했겠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북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다녔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미움을 사게 된 것이죠.”(<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조갑제)
1967년 11월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서 열린 ‘동백림 사건’ 공판에서 서독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씨가 답변을 하고 있다. 당시 구속 기소된 피고인 34명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이응노 화백, 서울의 천상병 시인 등 이름난 예술인과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중앙정보부에서 첫 발표(67년 7월8일)를 한 동백림 사건을 보도한 당시 신문 지면.
이기양의 실종 뒤 튀빙겐대 총학생회가 서독과 체코 정부에 그의 행방에 대한 문의를 했다. 체코 정부는 묵묵부답이었으며, 서독은 연방범죄수사청에서 ‘그가 북한으로 보내졌을 것’이라는 추측만 내놓고 사건을 종결했다.(이정민, 앞 논문) 이기양의 실종은 미궁에 빠졌지만, 국내에서는 이른바 ‘동백림 사건’(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과 연계된 데서 따온 명칭)이라고 하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터지는 계기가 됐다. 조선일보의 첫 실종 보도(5월14일)가 있고 사흘 뒤 명지대 조교수 임석진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독일 유학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박정희 처조카 홍세표가 주선한 자리였다. 임석진은 이 자리에서 1956년부터 66년 귀국 때까지 독일에서 자신이 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앞서 그는 66년 6월 평양을 방문하고 서독으로 돌아온 직후 북한 노동당 연락부장(정치국 서열 4위) 이효순에게 “내가 당신들로부터 이탈행위를 하지만 통일에는 장애가 되거나 역효과가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입니다”(조갑제, 앞의 책)라는 내용의 편지를 남긴 채 가족과 함께 급히 귀국했다.
그는 자수한 이유에 대해 “내가 한국으로 귀국하겠다고 북측에 의사를 밝히자, 그들은 나를 끝까지 신사적으로 말렸습니다. 내가 편지 한 통을 보내고 귀국해 버리자 이기양이 납치되었던 것은 나에 대한 북한의 경고로 보였지요”(조갑제, 앞의 책)라고 말했다.
임석진의 진술을 바탕으로 중앙정보부(부장 김형욱)는 베를린과 파리 등 유럽에서 활동하던 예술인과 유학생 등 203명을 간첩행위 혐의로 잡아들였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던 음악가 윤이상, 파리를 무대로 활약하던 화가 이응노 등도 포함됐다. 중앙정보부는 이 중 66명을 검찰에 송치하면서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했다. 또 반정부 시위에 앞장섰던 서울대의 학내 서클 ‘민비연’(민족주의비교연구회)을 이 간첩단의 하부 조직이라고 엮었다.
그러나 법원에서 간첩죄에 대해서는 전원이 무죄를 받았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최고 사형(2명)까지 받았지만, 관련자들은 1970년 말까지 모두 석방됐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2006년)에서 동백림 사건은 내용이 과장 왜곡됐으며, 특히 민비연의 간첩 혐의 등은 조작됐음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관련자들은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거나 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북한과 접촉하거나 평양을 방문했음이 드러났다. 정하룡은 1955년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정치학)로 유학 갔다. 서울에서부터 잘 알고 지냈던 대학 선배 노봉유가 1962년 그를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으로 데려갔다. 대학 때 경제학을 공부했던 그는 당시 남한보다 경제발전이 빨랐던 북한의 계획경제의 실상을 알고 싶어서 그해 평양을 방문했으며, 65년 여름 다시 방문했다. 이때는 9·9절 행사장 주석단에 안내돼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와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이미 서유럽에서는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가고 있을 때였지. 첫번째 방문 때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모습을 보고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한번 코가 꿰이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가게 되더군. 저들이 폭로하면 끝날까봐 두렵잖아.”(정하룡)
1966년 3월에 귀국한 그는 경희대 조교수로 있다가 이듬해 동백림 사건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지도교수였던 세계적인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가 당시 정하룡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였다. 그는 1970년 석방된 뒤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에게 발탁돼 오랫동안 일했다. 은퇴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해 두어 차례 개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기양이는 머리가 비상하고 특히 어학에 재주가 많았지. 6·25 때 프랑스 부대 통역을 맡을 정도로 프랑스어에 능통했어. 입이 무거워서 가족관계에 대해서는 홍난파가 이모부라는 것 외에는 일체 얘기를 안 했어.”(정하룡)
“보들레르의 시 ‘여행으로의 초대’를 기양이가 원어로 낭송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지. 그 친구가 있었더라면 우리나라 예술 수준이 한 단계 높아졌을 거야.”(조규하)
“저는 그렇게 표현하는데 그는 호탕하고 자유분방했던 ‘데카당의 마귀’였어요. 당시는 전쟁 직후여서 지금처럼 노동운동이나 인권, 평화운동이 전혀 없었죠.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 먹고사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정치는 독재로 치달으니까 젊은이들의 현실에 대한 저항이 그렇게 술 먹고 기행을 일삼는 식으로 데카당하게 표현됐던 거 같아요. 그러나 독서의 폭이나 문학, 예술에 대한 기양이 형의 감식안은 당시 부르주아 지식인 가운데 최첨단이었고요.”(임재경)
1967년 5월14일 <조선일보> 지면에 보도된 이기양씨.
‘데카당 마귀’의 흔적을 찾으려는 임재경의 노력은 오래됐다.
“2008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쪽 인사에게 이기양이 북한에 있는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어요. 이름과 신상 등을 다 적어 갔는데 돌아올 때까지 가타부타 답이 없었어요.”(임재경)
그는 얼마 전에는 독일 외교부와 튀빙겐대학교, 주한 체코대사관에 편지와 이메일을 보내 이기양에 대한 정보와 자료를 문의했다. 튀빙겐대학교는 당시 학생들의 구명운동 활동 등을 상세하게 답변해 왔으나, 독일 정부는 아직 반응이 없다. 체코대사관은 당혹해하면서 “본국 정부에 조회해서 답변을 주겠다”고만 회신해 왔다.
“동백림 사건은 그래도 실체와 진상이 많이 밝혀졌지만, 정작 프라하에서 사라진 유학생 이기양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안 밝혀졌잖아요. 관련된 사람들과 자료가 사라지기 전에 역사의 진실이 밝혀졌으면 좋겠어요. 제 젊은 시절의 소중한 기억도 되찾고요.”(임재경)
고창 장성/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이기양씨의 친구이자 후배였던 조규하, 정하룡, 임재경(왼쪽부터)씨가 지난 20일 저녁 전북 고창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김종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