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병남의 보내지 못한 이메일
(15) 몸이 좋지 않을 때
(15) 몸이 좋지 않을 때
요즈음 많은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하루 종일, 또 새벽 2~3시까지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고 야근하면서 하루 세끼 식사는 대충 때우거나 바깥 음식에 의존하고 정기적인 운동도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Q. 새 회사로 옮긴 지 3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요즘 몸이 아픕니다. 컴퓨터를 많이 쓰는 사무직이다 보니 어깨가 빠질 듯이 아픈데 날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팔을 들 수 없을 정도인데 침도, 주사도 효과가 없습니다. 몇 달 쉬면 좀 나아질 듯한데 도저히 휴가를 내겠다는 말을 못 하겠습니다. 속사정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동료도 주변에 없습니다. 매일매일 무너지는 몸을 지켜보며 두려운 마음만 커집니다.
자신을 돌보는 무엇이든 하세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병에 걸리는 것이었습니다. 경력직으로 회사에 들어온 탓에 병치레도 능력 부족으로 여겨질까 봐 노심초사했습니다. 무능한 사람,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저도 두려웠습니다. 하루이틀 아프다 낫는 감기 정도야 문제가 안 되지만, 이렇게 일하다가 어느 날 쓰러져서 못 일어나면 아이들 셋은 어쩌나, 대학은 어떻게 보내나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 생명보험이라는 걸 들었습니다. 만일 내게 큰일이 생기더라도 자식들은 공부할 수 있도록 안전망을 마련해주려던 생각이지요. 회사 생활이란 여럿이 모여 함께 일함으로써 공동의 성과를 창출해내고자 하는 것인 만큼 그 과정에서 늘 평가받고 있다는 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성과 창출이 강박이 되는 그런 상황에 관해서, 독일의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대의 개인은 누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성과주체화하여 자신을 채찍질함으로써 그 자신이 소진되고 마모된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는 과잉 긍정성이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낳는다는 것이지요. 일중독이란 것도 끊임없는 성과 강박에서 옵니다. 일을 통한 성취와 인정에서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병치레도 능력 부족으로 느껴질까
스스로 성과 창출 강박 속 채찍질
‘할 수 있다’ 과잉긍정성도 문제
몸과 마음 취약점 살펴 대응해야 조직의 리더는 개인을 돌보는 사람
과로사 각오하며 일하는 시대 지나
미국·유럽은 주4일제 도입도 늘어
건강한 조직 만들 방법이 급선무
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인사담당 임원으로서 일할 때 스트레스는 평소엔 3만볼트, 가을이 되면 5만볼트까지 올랐다가 연말이 되면 10만볼트까지 치솟았습니다. 그즈음에는 몸이 휘지고 혈압이 올라가서 매년 한 차례 늦은 오후에 병원에 가서 입원하고 밤새 수액을 맞고 버텼습니다.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려고 아침에 옷만 갈아입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근하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과로하면서 몸이 주는 신호를 오랫동안 무시하게 되면 우리 몸은 임계점을 넘어서고 그 순간 무너져 내립니다. 요즈음 많은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하루 종일, 또 새벽 2~3시까지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고 야근하면서 하루 세끼 식사는 대충 때우거나 바깥 음식에 의존하고 정기적인 운동도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버텨낼 수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들어온 얘기지만, 규칙적인 일과 휴식, 집밥과 같은 건강한 음식, 충분한 수면, 그리고 정기적인 운동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가능한 한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에 자주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을 돌보는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자주 조금씩이 좋습니다. 미뤘다가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경우 대개는 늦습니다. 더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효과는 그리 나지 않습니다. _______
리더는 구성원을 돌보는 사람 자신의 몸과 마음의 취약점을 잘 파악해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어려서부터 남들보다 많은 수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루 최소한 7~8시간은 자야 합니다. 2~3시간씩만 자면서 엄청나게 일하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저는 그게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수면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낮 시간에 생산성이 훨씬 떨어지는 것을 무수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방법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일과 후 저녁 일정을 단순화했습니다. 손해 보는 인간관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또한 체질적으로 알코올 분해 효소가 부족합니다. 술을 좋아하지만 과음을 하게 되면 부작용이 커서 남들보다 적게 마시고 특히 낮 시간에는 금주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술이 약하다는 사실은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말이지요. 구성원이 아플 때까지 밀어붙이는 조직은 문제가 있습니다. 아픈 조직이기에 아픈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 조직은 건강검진, 조직 진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불어 조직은 돌보지 않으나 개인은 돌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시스템, 구조, 전략으로 움직이는 조직 속에서 프로세스, 목적성, 사람 요소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무엇보다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리더는 돌봐야(care) 합니다. 조직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구성원이 아프다면, 그걸 고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리더의 최우선적 역할입니다. 거의 10년 전 일입니다만, 엘지(LG)인화원 사장으로 일할 때 한 여성 관리자가 사표를 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유능하고 성실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던 직원이기에 이유를 물었습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기가 생기지 않아 몇 차례 시험관아기 시술도 받았는데 실패했다고 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퇴직하고 스트레스 없이 편하게 지내면서 마지막으로 시술을 시도해보자고 권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회사 규정으로는 아파도 한 달간의 병가만 낼 수 있었습니다. 임신을 하게 되면 산전, 산후 휴가가 생기지만 임신 자체를 위해서는 퇴직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인사위원회를 열어 그 직원에 대한 과거의 모든 평가자료를 검토했습니다. 놓치기 아까운 인재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최고경영자(CEO)로서 새로운 휴직 제도를 제안했습니다. ‘난임 휴직’이라는 용어도 없었던 때였기에 그 표현을 딱 쓰지 않았지만 요즘 많은 회사가 도입하는 바로 그 난임 휴직이었습니다. 1년간 무급휴직을 허락하고 그 기간에 4대 보험은 회사에서 책임지고 1년 후 복귀 여부는 본인이 선택하며, 복귀할 때는 원직 복귀를 원칙으로 정했습니다. 인사위원회에서 새로운 제도를 승인하고 직원은 휴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0개월 지났을 때 임신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사자는 물론 회사 내의 분위기가 아주 좋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직 구성원들이 ‘아, 회사가 개인을 챙기는구나!’라는 걸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그 직원은 출산휴가까지 잘 마치고 회사로 돌아와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요즘 남성 육아휴직도 비슷합니다. 제가 회사 다닐 때는 남성 육아휴직은 상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더욱 활성화돼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여성의 육아휴직에 따른 불이익과 사내 차별이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육아휴직을 보장한다고 회사가 방침을 정하면, 회사가 남성을 우대해 뽑을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런 제도가 확산되면 우리나라의 저출산 문제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_______
제대로 된 회사는 인재 놓치지 않아 저 자신도 경력입사를 한 셈입니다만 회사 안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이 없으니 아쉽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파도 주변에 털어놓고 상의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그건 본인이 너무 앞서 걱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조직은 유능한 인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수준으로 포용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레 겁먹고 속앓이만 하지 말고 오히려 회사에 상황을 말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만일 회사가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그 조직은 인재를 보유할 능력이 부족한 곳입니다. 제가 일할 때 그룹 전체 차원의 인사 원칙이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인재를 육성한다’였습니다. 주니어 때부터 전문성과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해외유학까지 다녀오고 현업에서 업무 경험도 다양하게 쌓던 한 임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사장이 되면서 몸에 이상신호가 왔습니다. 병원 치료도 받았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직까지 결심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룹 차원에서 육성한 인재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회장의 철학이었습니다. 자유로운 업무가 가능한 보직을 만들고 그가 그 일을 맡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쉴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심신 건강을 회복해서 현업에 복귀했고 계열사 최고경영자가 됐습니다. 회사가 개인을 기다려주었기에 탁월한 인재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생명보험을 들며 과로사를 각오하면서 일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주 4일제를 도입하는 조직들이 늘어나고 안식월도 점차 보편화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언제까지나 외면만 할 수 없습니다. 일은 삶의 일부입니다. 삶에는 기쁨과 고통이 함께 있으니 일 또한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건강한 고통이어야 합니다. 건강한 조직이 건강한 개인을 만들고, 또 건강한 개인이 건강한 조직을 만듭니다.
▶ 이병남.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조지아주립대에서 경영학을 가르치다 1995년 엘지(LG)그룹 임원으로 입사해 인사, 교육, 노사관계 및 지배구조 업무를 맡았다. 2008년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인화원장으로 부임해 8년간 원장직을 수행하고 2016년 퇴임. 인간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지만 이를 풀어낼 해법 역시 인간에게서 비롯된다는 그의 경영 철학은 저서 <경영은 사람이다>(2014)에 담겼다. 인간 존중이라는 경영의 본질을 잊지 않고 21년간 숨 가쁘게 현장을 누벼온 그가 일터에서 겪는 우리의 고민을 나눈다. 4주 1회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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