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직장에서 나온 뒤 더 큰 세상을 만났다

등록 2021-06-13 09:08수정 2021-06-13 09:21

[토요판] 이병남의 보내지 못한 이메일
(18) 은퇴 뒤의 삶

은퇴 전부터 가까운 주변 돌아보며
소중한 관계 속에서 자아 성장 추구
저항보다 변화 수용하며 의미 찾길
은퇴 후의 삶에서는 특히 사적 자아의 성숙도가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은퇴 후의 삶에서는 특히 사적 자아의 성숙도가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Q. 정년퇴직을 꼭 1년 남겨두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일자리 구하기 힘들 때 60살 정년퇴직을 한다면 다들 부러워하지만 제 마음은 복잡합니다. 무사히 인생을 마무리한 안도감도 있지만 아직 일할 수 있는데도 쫓겨나는 것 같은 허전함도 있습니다. 은퇴 후 삶,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앞으로 1년,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상상과 현실은 차이가 있다

저는 퇴임 2~3년 전부터 마음으로는 은퇴를 대비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내 은퇴 시점은 내가 정한다, 연연하지 않겠다, 밀려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다 등이었지요. 그러면서, 퇴임 후의 자유로운 생활, 또 공적인 영역에서의 기여를 생각하면서 새로운 의욕이 솟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인 60살 정년을 1년 넘기고 2016년에 저는 회사에서 퇴임했습니다. 회사 생활 21년,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적인 끝맺음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퇴 전에 저는 시민단체의 추천과 회사의 승인을 받아 대기업 사장으로서는 드물게 한 금융기관의 사외이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퇴임한 뒤에도 이 일은 계속할 수밖에 없었지요. 저를 추천한 해외연기금의 요청은 단 하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이사회 의결 과정에서 나 홀로 반대 표결을 몇차례 하기도 했고 그 회사 내부규정을 개정하는 작업을 자원해서 맡기도 했습니다. 퇴임 시점에서 한 대학으로부터 초빙교수직을 제안받아서 경제대학원 석사과정, 경영대학 학부과정 강의를 하고 학교 발전을 위해 기업의 후원을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퇴임 후 그렇게 사외이사 3년, 초빙교수 2년의 생활을 하고 나서 강하게 든 생각은 내가 할 바를 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요청된 공적 미션을 다 수행했으니 이젠 물러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에 두 직책을 동시에 사임했습니다.

퇴직 뒤 허전함 예상보다 훨씬 커
정해진 것 없는 다른 세계 가는 일
상실감과 공허함에 시달리는 일상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던 것과 막상 닥친 은퇴 후의 삶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은퇴 뒤에 삶이 편안하고 여유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가와 휴식이 전처럼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았고, 짜여진 일정대로 움직이지 않는 일상이 어색하고, 바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불안했습니다. 상실감과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늘 측근에서 나의 일상을 도와주던 비서도, 운전기사도, 매일매일을 같이하던 부하직원들도 하룻밤 사이에 없어지니 마치 엄마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아이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사외이사와 초빙교수 사임은 나 스스로 결정하고 내 손으로 끊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라는 후회감까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왔습니다. ‘과연 나의 사회적 역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리무중,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즈음 두세곳에서 최고경영자(CEO), 기관장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뭔가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흔들림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왠지 과거와 같은 삶의 패턴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더라도 길어야 3년일 텐데 그럼 그 다음엔? 또 다른 자리 3년? 그게 영원할 수가 있을까? 그렇게 진정한 은퇴 후의 삶을 사는 걸 배우는 시간을 자꾸 미루어도 되는 걸까? 미룰수록 배우는 게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정신이 번쩍 들어서 결국 제안들을 고사했습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삶의 방식이 달라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 우선 시간을 벌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과거와 유사한 사회적 역할을 다 내려놓고 시간을 두고 뭔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제 무의식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온 듯도 합니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과거의 생활 방식을 연장해 나갈 거니?’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노년

21년간의 회사 생활을 돌이켜보면 헌신적으로 치열하고 치밀하게 일해서 성과를 내고 인정받고 또 예우받는 삶이었습니다. 분명히 보람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받은 예우는 일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일에서 따라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일을 그만두면 그 예우가 없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21년간의 그 예우가 내 몸에 배어서, 그것이 없으니 불편하고 이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우는 스트레스를 수반합니다. 예우를 받은 만큼 긴장하게 되고 그것은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었을 때, 기운이 넘칠 때는 그 스트레스가 별문제가 안 될 수 있지요. 성취와 보람이 그걸 상쇄하고도 남으니까요. 그러나 노화의 단계에 들어서면 그 스트레스가 심신에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스위스의 의사이자 작가인 폴 투르니에는 그의 저서 <노년의 의미>에서 권력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삶을 권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나에게 조언을 구해오지 않더라도 실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고 전합니다. 사회적 지위 모드에서 벗어나 인간적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감을 새롭게 찾으라는 것이지요. 젊음을 한없이 연장하지 말고 계급도 지위도 정해진 역할도 없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라는 조언입니다.

주변을 보면 간혹 70대, 80대의 연령인데도 활력이 넘치고 여전히 직책을 맡아 권한을 행사하면서 사회적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아,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올까?’ 분명히 심신의 건강은 타고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에너지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또 달리 생각해보면, 여전히 직책을 맡고 공적 삶을 놓을 수 없는 이유가 혹시 그의 사적 자아가 제대로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공적 자아만 커져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봅니다. 남들의 인정과 주목, 그것에서만 충만감을 느끼고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전에도 한번 얘기했지만, 문제는 그렇게 공적 자아가 불균형적으로 비대해져 있으면 그 공적 자아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한번에 무너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공적 자아를 도와 부축해서 일으켜줄 만큼 사적 자아가 힘이 없기 때문이지요.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대화할 것

은퇴 후의 삶에서는 특히 사적 자아의 성숙도가 삶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충만감과 안정감을 느낄 때 사적 자아는 성숙합니다. 만약 은퇴 전에 사적 자아를 잘 돌보고 키우지 않았다면, 은퇴 후에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은퇴 전에는 공적 자아의 성장이 주무대이고 사적 자아의 성장은 부수적이었다면 은퇴 후에는 그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은퇴 후에 더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특히 가족 관계가 그렇습니다.

노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는 에너지
언젠가는 고갈되고 반드시 무너져
공적 자아 아닌 사적자아 돌볼 때

오랜 조직 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1년 앞두고 있다면 자신과 가까운 주변을 돌아보시길 권합니다. 나 홀로 행복할 수 없으니까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은 은퇴 후에는 더욱 소중한 치유와 쉼의 에너지원이 됩니다. 그동안 가족 한사람 한사람과 얼마나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왔는지를 점검해보고 ‘존중하는 애정’의 관계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합니다.

회사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주로 일과 관련해서 상사, 동료, 후배들과 관계들을 이어왔을 텐데 이제는 그 관계에서 무엇을 얻고 이루려 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내가 무엇을 나누어 주고 떠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도 좋습니다. 젊었을 때는 일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내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도움이 되는 일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회사 직위, 직책, 권력관계 속에서 직업으로 해왔던 방식과는 다른,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 자신의 인간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초점을 맞춰 보십시오.

이를 위해선 은퇴 전에 자신이 일 중심의 커뮤니케이션에 지나치게 매몰돼 있지 않나 살펴봐야 합니다. 은퇴 전과 은퇴 후는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많이 달라지는데 이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만약 은퇴 전에 사적인 관계에 너무 소홀했다면 은퇴 후에는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나는 원하지만 이미 그들은 돌아서버렸기 때문이지요. 가족이라고 해도 남남이 되는 일은 흔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가끔씩 뒤돌아본다고요. 내 영혼이 날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너무 늦지 않게 내 사적 자아가 함께 성장하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과 상관없이 소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고 삶을 나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노년은 다른 차원의 성장

은퇴 전후 저는 몸의 변화를 발견했습니다. 운동이라고는 산이 좋아서 오랫동안 등산한 것 외에 따로 한 것이 없었는데 발목 관절염이 생겨서 등산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심적으로는 엄청난 장애 판정으로 다가왔습니다. 눈이 뿌예져서 신문을 읽기도 불편하고 스크린을 보는 것도 힘든 지경이 되어서 결국은 양쪽 눈 모두 백내장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등산 대신 수영을 시작했다가 목과 어깨 통증으로 중단하고 시술을 받기도 했고 현직에 있을 때 종종 했던 골프도 팔꿈치와 목 통증으로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육체적 한계를 분명히 느끼기 시작하면서 ‘아, 이것이 노화구나’라고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인간은, 모든 생명체는 생로병사의 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영성가 토머스 키팅 신부는 노화야말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함으로써 의식의 전환을 통해 무아의 관상적 삶으로 넘어갈 수 있는 너무나 감사한 기회라고 말합니다. 저도 자연스럽게 나의 몸은 현직에 있을 때와 달리 여유로운 일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리듬이 달라져야 하는 때가 왔음이 분명해지자 노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은퇴와 노화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수용하면서 동시에 삶의 의미를 찾는 변화를 꾀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생명체의 본질은 변화입니다. 살아 있는 것치고 가만히 고정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존하고 성장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체적 변화 못지않은 정신적 변화도 있습니다. 은퇴와 노화를 겪고 체감하면서 결국 노년의 의미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성장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홀로 앉아서 명상을 통해서 내적 성장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저의 경우에는 주변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더 많이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는 외부의 자극이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거기서 변화의 동력, 바로 마중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봉사하겠다는 것, 젊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것에 앞서 은퇴 후에도 여전히 나의 성장에 주목합니다. 저에게는 이 칼럼을 쓰고 그에 대한 반응을 받는 것, 그것이 성장을 위한 가장 큰 자극이랍니다!

이병남 제공
이병남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중앙지법, 윤석열 구속 연장 불허…“수사 계속할 이유 없어” 1.

[속보] 중앙지법, 윤석열 구속 연장 불허…“수사 계속할 이유 없어”

‘내란 나비’ 김흥국, 무면허 운전 벌금 100만원…음주·뺑소니 전력 2.

‘내란 나비’ 김흥국, 무면허 운전 벌금 100만원…음주·뺑소니 전력

[속보] 법원, 윤석열 구속 연장 불허…검찰, 26일 내 기소할 듯 3.

[속보] 법원, 윤석열 구속 연장 불허…검찰, 26일 내 기소할 듯

[속보] 서부지법 방화 시도 ‘투블럭남’ 10대였다…구속 기로 4.

[속보] 서부지법 방화 시도 ‘투블럭남’ 10대였다…구속 기로

검찰, 윤석열 구속 기소 본격 채비…주말 대면조사 ‘물밑조율’ 5.

검찰, 윤석열 구속 기소 본격 채비…주말 대면조사 ‘물밑조율’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