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용 전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오른쪽 둘째)이 지난해 11월18일 오전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1990년대 국내 가습기 살균제 개발 및 출시 상황과 시장형성 과정”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 및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가습기살균제의 유해성 관련 보고서를 유리하게 써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서울대 교수가 ‘허위보고서 작성’ 혐의에 대해 무죄를 확정받았다. 다만 연구비를 연구와 무관한 용도에 사용한 사기 혐의는 유죄로 확정됐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사법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가해 기업들이 건넨 뒷돈을 받고 연구자의 양심을 판 ‘청부과학자’에 면죄부를 쥐여주고 말았다”고 반발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9일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조아무개 서울대 교수의 상고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옥시가 서울대 산학협력단과 맺은 ‘가습기살균제의 안전성평가’ 연구책임자였던 조 교수는 2011년 10월 옥시로부터 자문료 명목으로 1200만원을 받고 옥시에 불리한 실험결과를 의도적으로 뺀 채 최종결과보고서를 작성한 혐의(수뢰후부정처사)로 기소됐다. 또 옥시 임직원들의 형사사건의 증거를 위조하고, 2011년∼2012년 해당 연구와 관련 없는 다른 실험도구를 사는 등 25차례에 걸쳐 연구비 5600여만원을 가로챈 혐의(사기)도 받고 있다.
당시 참여연구원을 통해 최종결과보고서를 직접 건네받은 옥시는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로 인한 업무상 과실치사상 사건을 수사 중이던 경찰에 이를 제출해 옥시 임직원들의 형사사건에서 가습기살균제와 폐 손상 사이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취지의 근거 자료로 사용한 바 있다.
이에 1심은 “해당 최종결과보고서는 옥시 쪽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용됨으로써 수사·사법권의 적정한 작용에 대한 위험을 초래했을 뿐 아니라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 원인을 파악하는 데 장애요소 중 하나가 돼 진상규명이 지연됐다”며 조 교수의 혐의를 모두 인정해 징역 2년과 벌금 2500만원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사기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으로 감형했다. 조 교수가 최종결과보고서에 간질성 폐렴 항목을 삭제했더라도 연구자의 과학적 판단 재량을 벗어난 부정한 행위로 보이지 않는다는 취지다. 탈이온수를 이용한 대조군 시험결과에 대해서도 “참고자료에 불과해 보고서에 포함하지 않았더라도 부정한 행위로 평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가습기살균제의 독성 가능성과 추가 시험의 필요성을 언급한 점 등도 무죄 판단의 근거가 됐다.
대법원도 “조 교수가 연구를 수행하고 최종결과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직무를 위배한 부정한 행위를 했다거나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위조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자문료가 연구와 관련된 직무 행위 대가로서의 성질을 가진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며 양쪽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피해자들은 이날 대법원의 판결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로 꾸려진 ‘가습기살균제참사 전국네트워크’(가습기넷)는 성명을 내어 “사법부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상을 조작하고 은폐하려는 가해기업들이 건넨 뒷돈을 받고 연구자의 양심을 판 ‘청부과학자'에 면죄부를 쥐여주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대법원이 조 교수가 받은 자문료를 직무 행위 대가로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해 “옥시는 왜 조 교수에게 연구용역비 외에 거액의 자문료까지 개인 계좌를 통해 따로 챙겨줬고, 조 교수는 자문료를 받은 뒤 제품 독성 실험을 조작·누락한 보고서까지 작성해 옥시에 넘겨준 것인지 대법원에 되물을 수밖에 없다”며 “직무 행위 대가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가습기넷은 “이번 판결은 탐욕으로 가득 찬 기업들과 윤리의식을 내던진 연구자들이 연구 조작·왜곡을 통해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다”며 “탐욕으로 똘똘 뭉친 동맹의 결과가 소비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그 실체적 진실까지 숨기고 가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법부의 무책임한 판결에 분노한다”고 밝혔다.
조윤영 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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