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17일 서울 중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내몸이 증거다> 출판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참여연대 유튜브 채널 갈무리.
“아이들이 고통 속에 있었던 잔상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다. 이 내용들을 종이에 담으려 하니 정말 힘들었지만, 사실 그대로를 알려야 가해 기업도 (우리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기에 글을 쓰게 됐습니다.” (박수진씨)
“하필 글을 쓰는 동안에 손에 힘이 빠지다 보니 13여년간의 투병 생활을 하며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지 못한 게 제일 마음이 아픕니다. (…) 지금은 하반신 마비로 퇴원하게 됐지만, 우리의 참사가 모든 국민에게 기억되는 그 날까지 악착같이 재활할 겁니다.” (조순미씨)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이 눈물로 써내려간 수기가 한권의 책으로 묶여 출간됐다. 책 <내 몸이 증거다>에는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돼 신체적·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스물다섯 가족, 63명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 가해 기업 앞에서 오늘도 1인 시위를 나서는 어머니, 시간이 흐른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각종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은 17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출판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부가 하루 속이 피해를 인정해 적절한 치료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피해자들은 참사가 발생한 지 10년이 흘렀지만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 등 가해 기업과 정부가 피해를 인정하는 데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막내아들을 잃고 폐손상·천식 등을 앓고 있는 두 아들을 둔 이경미씨는 “큰아이는 여전히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제 주변의 많은 분이 ‘옥시가 배상을 끝낸 것 아니냐’고 하는데 아직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처럼 더 많이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위해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며 수기를 작성한 이유를 밝혔다. 이씨는 또 “언제 (피해 인정)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고 앞서 신청한 분들도 피해자로 인정받을지 여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저희가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많은 피해자가 피해자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1999년에 살균제에 노출돼 천식 등의 만성질환으로 21년째 약을 먹고 있다는 강은씨는 “21년간 약을 먹다 보니 약으로 인한 2차 질환도 발생하고 있다”며 “제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옥시에서 피해를 보상해준다면 얼마를 받아야 하나. 20년이 넘는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지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접수받은 피해자는 7476명(6월11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 기준)이다. 이중 1663명이 사망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인 조순미씨가 17일 화상회의 앱 줌을 통해 <내몸이 증거> 출판 기자간담회 참여해 발언하고 있다. 참여연대 유튜브 채널 갈무리.
<내 몸이 증거다>는 임종한 인하대 보건대학원장이 자신이 진료한 피해자들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수기로 작성해줄 것을 제안하고, 피해자들이 이를 받아들여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상당수의 피해자가 잊고 살고 싶었던 기억을 들춰내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지만, 같은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참사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펜을 들었다. 아이 둘과 자신 모두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신 증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혜옥씨는 “적절한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한 데 대해 화가 나서 (과거를) 잊고 싶었지만, 내가 활동해 다른 분들에게 힘이 돼야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밝혔다. 임 원장은 “살균제에 노출돼 심한 경우 세포가 사멸되지만, 병약하게 돼 에너지를 내는 미토콘드리아가 손상되는 경우가 있다”며 “이런 경우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만성질환이 발생하고 노화가 촉진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례는 일부이고 더 규명돼야 할 게 많다”고 지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암 발병 또는 각종 만성질환으로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가 추가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기 작성에 참여한 피해자들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이 살균제 노출로 폐 질환은 물론 독성 간염, 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우울증 등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추천사를 쓴 김동현 한림대 의대 교수는 “살균제 참사는 우리 한국 사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정부나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해야 하는 사건”이라며 “수많은 환자가 생명이 잃어갈 때, 원인이 밝혀지고 그 피해가 피해자들의 몸으로 드러나는데 이 과정에서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생각을 했다”고 지적했다.
<내 몸이 증거다> 책 표지. 참여연대 제공.
장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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